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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김영승 시집 『반성』

by 언덕에서 2014. 10. 21.

 

 

 

김영승 시집 『반성』

 

 

 

 

 

 

김영승1의 시 <반성> 시리즈는 1980년대 현실을 특유의 해학으로 극복하고 있다. 이 시집은 1987년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같은 계열의 시집 <취객의 꿈>도 연시적 분위기를 저변에 깔고서 가혹하게 자아를 성찰하며 세상사의 이면을 뒤집어 보고 있는 점에서 동일하다.

 

 

시인 김영승(1958~)

 

반성 16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반성 21

 

친구들이 나한테 모두 한마디씩 했다. 너는 이제 폐인이라고

규영이가 말했다. 너는 바보가 되었다고

준행이가 말했다. 네 얘기를 누가 믿을 수

있느냐고 현이가 말했다. 넌 다시

할 수 있다고 승기가 말했다.

모두들 한 일 년 술을 끊으면 혹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술 먹자,

눈 온다, 삼용이가 말했다.

 

 

반성 39

 

오랜만에 아내를 만나 함께 자고

아침에 여관에서 나왔다.

아내는 갈비탕을 먹자고 했고

그래서 우리는 갈비탕을 한 그릇씩 먹었다.

버스 안에서 아내는

아아 배불러

그렇게 중얼거렸다.

너는 두 그릇을 먹어서 그렇지

그러자 아내는 나를 막 때리면서 웃었다.

킥킥 웃었다.

 

 

반성 79

 

아내가 내 빤스를 입고 갔다. 나는 아내 빤스를

입어 본 적이 없다.

아내는 내 빤스를 입고 가 버린 것이다. 나는 빤스가 없다.

일주일 후에 아내는 내 빤스를 빨아서 갖고 왔다.

나는 빤스를 입었다.

 

 

반성 99

 

집을 나서는데 옆집 새댁이 또 층계를 쓸고 있다.

다음엔 꼭 제가 한 번 쓸겠습니다.

괜찮아요, 집에 있는 사람이 쓸어야지요.

그럼 난 집에 없는 사람인가?

나는 늘 집에만 처박혀 있는 실업잔데

나는 문득 집에조차 없는 사람 같다.

나는 없어져 버렸다.

 

 

반성 100

 

연탄장수 아저씨와 그의 두 딸이 리어카를 끌고 왔다.

아빠, 이 집은 백장이지? 금방이겠다, 머.

아직 소녀티를 못 벗은 그 아이들이 연탄을 날라다 쌓고 있다.

아빠처럼 얼굴에 껌정칠도 한 채 명랑하게 일을 하고 있다.

내가 딸을 낳으면 이 얘기를 해주리라.

니들은 두 장씩 날러

연탄장수 아저씨가 네 장씩 나르며 얘기했다.

 

 

반성 156

 

그 누군가가 마지못해 사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할 때

그는 붕어나 참새같은 것들하고 친하게 살고 있음을 더러 본다.

마아고트 폰테인을 굳이 마곳 훤턴이라고 발음하는 여자 앞에서

그 사소한 발음 때문에도 나는 엄청나게 달리 취급된다.

그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도 사실 끔찍하게 서로 다르다.

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도

살벌할 만큼 다른 의미에서 거래된다.

그들에게 잘 보여야 살 수 있다.

 

 

반성 163

 

코끼리들이 문득 가엾다.

코끼리 발바닥엔

어느 정도 두께의 굳은살이 박혔을까.

그 거대한 몸뚱이를 지탱하며 먹이를 찾아

뛰어다닌 벌판.

굳은살이라곤 입술과 유방과 성기밖에 없는

불행한 남녀들이 다투어 몰려온다.

귀족적이려고 매력적이려고 그리고

지성적이려고 무지무지 애를 쓰고 있다.

가엾다.

 

 

 반성 608

 

어릴 적의 어느 여름날

우연히 잡은 풍뎅이의 껍질엔

못으로 긁힌 듯한

깊은 상처의 아문 자국이 있었다

징그러워서

나는 그 풍뎅이를 놓아주었다

나는 이제

만신창이가 된 인간

그리하여 주(主)는

나를 놓아주신다

 

 

반성 740

 

어둠-컴컴한 골목

구멍가게 평상 위에 난짝 올라앉아 맥주를 마시는데

옛날 돈 2만원 때문에

쫓아다니며 내 따귀를 갈기던

그 할머니가

어떻게 나를 발견하고 뛰어와

내 손을 잡고 운다

 

머리가 홀랑 빠졌고 허리가 직각으로 굽었고......

 

나도 그 손을 잡고

하염없이 울었다

 

맥주까지 마시니 돈 좀 생겨지나 보지 하면서

웃는다

 

이따가 다른 친구가 올 거예요 하면서

나도 웃었다

 

 

반성 902

 

하나님 아버지

저는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지

날이 갈수록 머리가 띨띨해져 갑니다

고맙습니다

 

 

 

 

  

 1987년 3월 30일, 스물아홉 청년 김영승(54)은 시집 『반성』을 세상 밖으로 밀어낸다. ‘반성’이란 표제에 번호만 바꿔 단 82편의 시가 실렸다. 욕설과 비속어가 득실대는 시편에 문단은 감전됐다. 이를테면 “서양 미친년 볼기짝 같은 네 유방(‘반성 782’)”과 같은 시어들. 여성의 성기를 일컫는 비속어까지 시어로 둔갑했다. 그러면서 시인은 “내가 인정할 수 있는 서정시”(‘반성·序’)라고 우겼다.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는 술 마시는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술을 찾는 주정뱅이를 이상한 눈으로 본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반성(反省)이란 돌이켜 살피는 일이다. 김영승은 “『반성』은 1980년대 개인이 말살되는 비극을 노래한 시집이다. 24년이 흘렀지만 개인의 존엄성은 더 처참히 무너진 것 같다”고 했다. 개인성이 축출된 시대, 『반성』을 반성해볼 일이다.

 

 

 

 

 

 

 

 

 김영승은 <반성>, <취객의 꿈> 이들 시집 외에도 풍자와 야유의 방법으로 세상의 허위와 기만에 대응하는 <차에 실려 가는 차>(1989), 슬픔의 정조를 지닌 독설과 자학으로 권태에 대한 공격과 그 공격 자체에 대한 권태를 그려낸 <권태> 등의 시집에 실린 그의 시는 뒤틀림과 외설, 자조, 야유, 탄식 등을 통해 자아 성찰을 위한 노력 및 현실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김영승은 세상에 대한 저항과 정화의 욕망을 배설의 시학으로 그려내는 시인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김영승의 시는 고도의 지적 통찰과 직관, 성찰을 요한다. 그러면서도 눈물겹고, 따뜻하고 깨끗하다. 심한 비속어의 남발이 꽤 많음에도 찌푸리게 하지 않고 자신과 세상의 속을 파 들여다보게 하는 튼튼한 사유가 있다. 행동이 아니라 사유인 한, 나약하되 맑고 순결한 영혼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히 높은 조건일 것이다.

 그는 시의 위선을 떨어버리고 자신을 포함 세상을 자조, 조롱하지만, 그 저변을 흐르는 시인의 마음은 사랑과 평화, 연민의 연대에 깨어 눈물겨운 풍경도 그려내는 것이다. 순결한 영혼, 시적 천재라는 믿음과 함께 영적인 심플한 시인이라는 개인적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1. 1958년 인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1986년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반성?序」 외 3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반성』, 『車에 실려가는 車』, 『취객의 꿈』, 『아름다운 폐인』, 『몸 하나의 사랑』, 『권태』, 『무소유보다도 찬란한 극빈』, 『화창』, 에세이 『오늘 하루의 죽음』 등이 있다. 현대시작품상, 불교문예작품상을 수상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