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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초정(草汀) 김상옥 시인과 '민들레 바람되어'

by 언덕에서 2015. 1. 7.

 

 

 

 

 

초정(草汀) 김상옥 시인과 '민들레 바람되어'

  

 

 

 

 

 

 

 

 

 

요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라는 다큐먼터리 영화가 이례적으로 400만 관객을 돌파했다고 한다. 그리고  상처한 남편의 순애보를 그린 연극 ‘민들레 바람되어’는 90%대 객석 점유율을 기록하며 대학로 무대를 달구고 있다고 한다.  이 연극의 소재는 60여 년 해로했던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식음을 전폐하고 엿새 뒤 숨을 거둔 시조시인 김상옥(金相沃.1920.3.15∼2004.10.31) 선생의 이야기다. 오늘은 초정 김상옥 시인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에 관해 알아보도록 하자.

 

♣ 

 

 

 


 경남 충무에서 태어난 초정(草汀) 김상옥은 인쇄소에 다니며 독학하면서 소년기를 보낸 뒤 1938년 10월 [문장]지에 <봉선화>와 194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부에 <낙엽>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김상옥의 [문장] 추천제 응모는 이호우의 경우처럼 <봉선화> 작품 한 회에 끝났다. 왜냐하면 두 번째 추천을 받기 전에 [문장]지가 폐간되어 그 기회를 잃은 것이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 사상범으로 여러 차례 영어(囹圄)생활을 했다. 1946년 이후 삼천포ㆍ부산ㆍ마산 등지를 전전하면서 교원생활을 계속, 이때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47년 첫 시조집 <초적(草笛)>을 발간, 1949년에는 시집 <고원(故園)의 곡(曲)>과 <이단(異端)의 시(詩)>를 출간했다. 이 밖에 시집 <의상(衣裳>(1953) <목석(木石)의 노래>(1956), 동시집 <석류꽃>(1952) <꽃 속에 묻힌 집>(1958)을 발간했다.

 한편 1956년 통영문협을 설립, 그 회장이 되었다. 이 무렵에는 주로 [현대문학]에 <목련>(1955) <기억>(1955) <승화(昇華)>(1955) <살구나무>(1956) ,슬기로운 꽃나무>(1957) <근작시초(近作詩抄)>(1957) <속 초적집>(1958) <아가(雅歌)<(1958) 등의 작품을 내놓았다. 그리고 3권의 동인집을 출간, 또한 충무공시비(忠武公詩碑) 등을 건립했다.

 특히 섬세하고 영롱한 언어를 잘 구사하는 이 시인은 시조로 출발, 해방 후에는 시조보다 시쪽에 기울면서 1963년경부터 시조를 3행시라고 주장했다. 1959년 경남여고 교사를 거쳐 상경, 표구사(表具社) [아자방(亞字房)]을 경영했다.

 

 


<아내 따라 6일만에 세상 버린 어느 시인의 비가(悲歌)>- 연합뉴스(2004. 10. 31)

 

 원로 시조시인 김상옥 씨가 60여년간 해로했던 부인을 잃자 식음을 전폐하고 지내다가 엿새만인 31일 오후 세상을 떠났다. 노시인은 부부의 깊고 애틋한 정을 시작품과 함께 세상에 남기고 떠난 것이다.

 김 시인은 15년 전 화랑에 그림을 보러 갔다가 넘어져 다리를 다친 뒤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했다. 이후 지난 26일 81세로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 김정자 여사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아왔다.

 큰딸 훈정 씨는 "아버지의 병수발을 하던 어머니가 보름 전에 허리를 가볍게 다쳐 병원에 입원했는데,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다친 곳이 아니라 다른 곳의 뼈들이 이미 여러 곳 부러진 상태였다"면서 "어머니는 자신의 몸이 부서진 것도 모르고 그야 말로 '분골쇄신'하며 아버지를 수발하다가 세상을 먼저 떠났다"고 말했다.

 훈정 씨는 "아버지는 어머니 없으면 살 수 없는 분"이라며 "이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어머니가 입원한 지 한참 지난 24일에야 아버지와 함께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병문안을 갔다"고 밝혔다.

 병원에 누워 있는 아내를 바라보며 김 시인은 "자네를 전생에서 본 것 같네. 우리의 이생은 다 끝났나 보네"라며 죽음을 예감한 말을 했다고 큰딸은 전했다.

 면회 후 이틀만에 부인이 세상을 떠났지만, 김 시인은 그 사실을 모르고 지냈다. 충격을 받을까봐 자식들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훈정 씨는 "사후 이틀만에 아버지께 사실을 알렸는데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면서 "하지만 아버지는 '이제부터 나에게 밥을 권하지 마라'며 식음을 전폐했다"고 전했다. 김 시인은 이날 큰딸에게 '어머니 은혜'를 부르라고 시키는가 하면, 밤새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지난 30일 판교 공원묘지에 묻힌 아내의 묘지에 다녀온 김 시인은 거주하고 있던 종암동의 둘째 딸집에 도착하자마자 거실에서 쓰러져 인근 고려대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가족들은 전했다. 뇌사상태에 빠져 있던 노 시인은 이튿날인 31일 오후 6시 20분께 산소호흡기를 제거함으로써 60여년간 떨어져 살아본 적이 없던 아내 곁으로 따라 갔다. 훈정 씨는 "아버지는 다리가 불편한 것 외에는 건강해 오래 살 줄 알았는데 어머니를 잃은 슬픔이 너무 깊어 일찍 돌아가셨다"면서 "아버지가 평소 좋아했던 조선 백자 등 골동품을 정리하는 일을 도우며 미술관을 함께 열 계획이었는데 생전에 꿈을 이루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경남 통영 출신으로 일제시대 이후 국내 시단의 대표적 시조시인으로 활동했던 고인은 '봉선화' '백자부' '청자부' 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몇몇 작품은 중고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딸 훈정(58) 훈아(55) 씨와 아들 홍우(53.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씨 등 2녀 1남, 사위 김성익(58) 인하대 초빙교수 등이 있다.

 


 

 

 

 




 

봉선화(鳳仙花)


 비 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 주던

 하얀 손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노나


 - [문장] 9호(1939. 10)-

 




 초정 김상옥은 이호우1와 함께 1940년대 초에 가람 이병기2에 의해 [문장]지를 통해 나온 시조 작가 중 대표적 인물이다. 이호우가 시조에 현대시적 내용을 도입한 공로자라면, 그는 시조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한걸음 발전시킨 공로자라 할만하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 제재를 취한 회고적 작품이 주류를 이루며, 섬세한 언어를 잘 구사하여 아취 있고 향수 어린 독특한 세계를 표현하였다.


 

 

家庭 


늙으신 어무님은 나만 보고 언정하고

안해는 그 사정을 내게 와 속삭이다

어쩌누 그는 남으로 나를 따라 살거니.


외로신 어무님은 글안해도 서럽거늘

안해를 가진 맘이 금 갈까 삼가로워

이 밤을 어서 새우고 그를 가서 뵈리라.


- 시조집 <초적, 1948>

 

 

 

 

 

 그가 즐겨 쓰는 시조의 세계는 한국적 생활과 사상이다. 따라서 소재를 선인이 끼친 문화재나 역사적 설화 또는 예스러운 몸맵시 따위에서 취하여 한국의 미를 끈질기게 추구하되, 특히 주옥같은 영롱한 시어를 마음껏 구사하여 가구(佳句)로 엮어 놓았다. 한마디로 그의 시는 다분히 낭만적이며 시상은 현대시와 동질이다. 그러나 언어 구사에 있어선 고아(高雅)한 말을 쓰기에 힘썼다. 명상적이고 관념적이며 화려했던 그의 시는 죽음과도 닮았다.

 

 

 

  1. 한때 시조시인들의 자성을 촉구하는 평론을 발표해 한국시조시단에 경종을 울렸다. 호는 이호우. 누이동생이 시조시인 영도이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의명학당을 거쳐 밀양보통학교를 마쳤으며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신경쇠약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1929년 일본 도쿄예술대학[東京藝術大學]에 입학했으나 신경쇠약에다 위장병까지 겹쳐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8·15해방 후에는 잠시 대구일보사를 경영했으며, 〈대구매일신문〉 문화부장 및 논설위원을 지냈다. 1946년 〈죽순〉 동인으로 참여했고, 1968년 〈영남문학회〉를 조직했다. 1940년 이병기의 추천을 받아 시조 〈달밤〉이 〈문장〉에 발표되어 문단에 나왔다. 이어 발표한 〈개화〉·〈휴화산〉·〈바위〉 등은 감상적 서정세계를 넘어서 객관적 관조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노래하고 영탄하던 종래의 시조와는 달리 평범한 제재를 평이하게 노래했으며 후기에는 인간의 욕정을 승화시켜 편안함을 추구하는 시조를 썼다. 작품집으로 1955년에 펴낸 〈이호우시조집〉 외에 누이동생 영도와 함께 1968년에 펴낸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가 있다. [본문으로]
  2. 이병기(李秉岐, 1891년 3월 5일 ∼ 1968년 11월 29일)는 대한민국의 시조 작가 겸 국문학자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호는 가람(嘉藍)이며 전라북도 익산에서 출생하였다.한성사범학교를 나와 경성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많은 시조를 발표하였다. 1926년 시조 부흥을 위해서 동아일보에 《시조란 무엇인가》를 발표한 후부터 현대적 감각을 띤 새로운 시조를 짓기 시작하였다. 1939년 《가람 시조집》을 발간하였으며, 또한 문헌학자로서 숨어 있던 많은 고전을 학계에 소개하였다. 광복 후에는 한민족의 고전 문학을 현대어로 고치는 일에 힘썼으며, 전북대학교 문리대 학장·서울대학교 강사·중앙대학교 교수 등을 지냈다. 대표작으로 《초》, 《별》, 《냉이꽃》 등이 있으며, 저서에 《국문학 개설》, 《국문학 전서》 등이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