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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이상국 시집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by 언덕에서 2015. 2. 26.

 

 

 

 

 

이상국 시집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오늘 소개하는 시인은 핍진한 현실인식을 견지하면서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우주적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순박한 삶의 풍경을 전한다.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따사로운 상상력과 정감 어린 묘사, 자연의 숨결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정갈한 언어들이 삶의 깊고 오묘한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김남조 시인(숙명여대 명예교수)은 이 시인을  "시의 심장 부위는 착하고 유순한 우수(憂愁)"라며 "세상에서 이겼기보다 패한 쪽이면서 아량과 용서의 상을 차려 세상에게 대접하는, 그런 유의 우수를 절실히 받아 느끼고 공감하게 된다"고 했다.

 이 시인은 어둠과 별과 나무를 노래한다. 여기서 어둠은 도회의 비겁한 빛과 달리 깜깜하게 빛나는 어둠으로, 별은 인간이 공평하게 거주해야 할 공간으로, 나무는 그 고요한 품성으로 칭송받는 성자로 묘사되고 있다. 자연에서 소재를 퍼올린 이상국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마음속에서 어질고 선한 기운들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봄날 옛집에 가다

 

봄날 옛집에 갔지요

푸르디푸른 하늘 아래

머위 이파리만한 생을 펼쳐들고

제대하는 군인처럼 갔지요


어머니는 파 속 같은 그늘에서

아직 빨래를 개시고

야야 돈 아껴 쓰거라 하셨는데

나는 말벌처럼 윙윙거리며

술이 점점 맛있다고 했지요


반갑다고 온몸을 흔드는

나무들의 손을 잡고

젊어서는 바빠 못 오고

이제는 너무 멀어서 못 온다니까

아무리 멀어도 자기는 봄만 되면 온다고

원추리꽃이 소년처럼 웃었지요

 


 

 

 

 

 

 

 

 

 국수가 먹고 싶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 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나도 보험에 들었다


좌회전 금지구역에서

좌회전을 하다가 사고를 냈다

택시기사가 핏대를 세우고 덤벼들었지만

나도 보험에 들었다

문짝 찌그러진 택시는 견인차에 끌려가고

조수석에 탔다가 이마를 다친 남자에게

나는 눈도 꿈쩍하지 않고

법대로 하자고 했다

나도 보험에 들었다

좌회전이든 우회전이든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나의 불행이나 사고가 적극적일수록

보험금은 높아질 것이고

아내는 기왕이면 좀 더 큰 걸 들지 않은 걸 후회하며

그걸로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가구를 바꾸며

이 세계와 연대할 것이다

나도 보험에 들었다

 


 





영덕에서 개와 싸우다


해남까지 갔다가

너무 멀리 간 것 같아 돌아선 길

진주 포항 지나 영덕에 오니 해가 진다

생은 길고 겨울 해는 짧으니

오늘은 여기서 묵어 가자


누군가 버스 뒤켠에서 엉덩이를 빼고 소변을 보는

터미날 어둑 어둑한 마당을 나서는데

한 쪽 다리를 저는 개 한 마리,

내가 절 보는 마음을 어떻게 알았던지

연신 힐끔 거리다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저것도 나처럼 몸 때문에 마음을 버렸구나

삶아 썰면 열댓 근은 되겠다


모든 생은 얼마쯤 불구이고

불구는 불구를 피하고 싶어 하므로

이 겨울, 나라 남쪽을 돌며 어떤 날은 처음 가 본 역에서

찐달걀을 먹으며 낯선 사람들은 바라보거나

벌교 장바닥에서 낮술에 흔들리며

어물쩍 나를 두고가고자 하였으나


불과 오백 리 북쪽에 집을 두고

저 불학무식한 것에게 마음을 들키고

영덕 허름한 목욕탕 어머니 자궁 같은 욕조에

다시 백열 근 짜리 생을 눕힌다


 


 

 

 

 

 

이상국 : 시인. 1946년 강원도 양양 출생. 1976년 에 ‘겨울추상화’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 시집으로 『동해별곡』『내일로 가는 소』『우리는 읍으로 간다』『집은 아직 따뜻하다』가 있다. 백석문학상, 민족예술상, 유심작품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