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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문혜진 시집 『질 나쁜 연애』

by 언덕에서 2015. 1. 21.

 

 

문혜진 시집 『질 나쁜 연애

 

 

 

 

 

이 시인은 만화, 영화, 대중음악 등 인스턴트적 요소와 약물에 취한 도시 뒷골목 아이들의 반항과 일탈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각 시편들을 읽어보면 잃어버린 순수성에 대한 고통과 상처 입은 영혼에 대한 연민, 그리고 기계적이고 비인간화된 도시문명을 원초적 생의 에너지로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어떤 평론가는 "그의 시는 자연스럽게 발아되거나 태어나거나 발효한 느낌을 준다. 익은 것보다는 날것을, 질서보다는 혼돈을, 이성보다는 본능을 긍정한다. 그러면서도 시인의 독특한 시각이 산만한 진술로 희석되지 않고 견고한 구조성을 획득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성의 욕망을 힘주어 표현하는 행위 역시 여성의 본능만 죄악시하는 현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그의 새된 목소리는 현대인을 불쾌 속으로 몰아넣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달래는 기능을 한다. "내 시가 마음껏 울부짖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작은 위로가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고 한 시인의 말과 맥이 통한다.

 

 

 

 

 

 

질 나쁜 연애

 

이 여름 낡은 책들과 연애하느니

불량한 남자와 바다로 놀러 가겠어

잠자리 선글라스를 끼고

낡은 오토바이의

바퀴를 갈아 끼우고

제니스 조플린*의 머리카락 같은

구름의 일요일을 베고

그의 검고 단단한 등에

얼굴을 묻을 거야

 

어린 시절 왜 엄마는 나에게

바람도 안 통하는

긴 플레어스커트만 입혔을까?

난 다리가 못생긴 것도 아닌데

 

회오리바람 속으로

비틀거리며 오토바이를 몰아 가는

불량한 남자가 좋아

머리 아픈 책을

지루한 음악을 알아야 한다고

지껄이지도 않지

오토바이를 태워줘

바다가 펄럭이는

바람 부는 길로

태풍이 이곳을 버리기 전에

검은 구름을 몰고

나와 함께 이곳을 떠나지 않겠어?

 

 

* 27살에 요절한 여성 록가수. 그녀는 날것의 음성으로 노래하는 최초의 여성 록커였다.

 


 

 

 

 시금치 편지

 

 나는 올리브 당신은 뽀빠이 우리는 언제나 언밸런스, 당신은 시금치를 좋아하고 나는 먹지 않는 시금치를 요리하죠 그래서 당신께 시금치 편지를 씁니다 내가 보낸 편지엔 시금치가 들어 있어요 내가 보낸 시금치엔 불 냄새도 없고 그냥 시금치랄 밖에는 아무런 단서도 없지요 끓는 물에서 금방 건져 낸 부추도 아니고 흙을 툭툭 털어 낸 파도 아니고 돌로 쪼아낸 봉숭아 이파리도 아니고 숭숭 썰어서 겉절인 배춧잎도 아니에요 이것은 자명한 시금치 편지일 뿐이지요 당신은 이 편지를 받고 시금치 스파게티를 먹으며 좋아라 면발 쫙쫙 당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동네 공터에 개똥을 밟아 가며 당신을 위한 시금치 씨를 뿌리고 있답니다 시금치가 자라면 댕강댕강 목을 베어 버리겠어요! 그때......다시 쓰지요.

 


 

 

뒤통수 조심해라

 

가슴에 피어싱이라도 주렁주렁 달고 막살아 보고 싶은 날. 믹서에 감기약이라도 갈아서 밀가루 반죽에 넣어 마구 휘젓고 싶은 날. 곱게 갈린 가루를 파우더 통에 넣고 볕 좋은 곳에 앉아 화장을 하자. 화장하다 심심하면 마당의 개나 붕붕 타지 뭐 개를 타다가 싸이가 생각났어. 내가 좋아하는 싸이는 남대문 뒷골목에서 S정과 러미라*를 사다가 구속 수감된 가수야 암스테르담엔 널린 게 약이라던데. 연신내 사는 내 친구 미나노는 할머니랑 다정하게 종이에 말아 맞담배 피웠다는데. 오늘도 9시 뉴스에선 남대문 뒷골목의 초라한 약장수와 더러운 오리털 파카를 뒤집어쓴 불안한 중독자의 손이 오버랩된다. 나를 뜯어먹을 기세로 미친 듯 손을 떤다. 피해망상은 닳고 닳은 누구나의 누더기 껌! 씹고 있는 당신의 껌도 이미 히스테리로 너덜너덜해져. 이런 날은 누구나 뒤통수 조심해라!

 


 


 

 

  탕진

  

 

  가끔씩 난
  똑 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곤 해.
  같은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고


  그러면 어떤지 알아?
  하드보일드하게 지루하지 뭐.
  전인권의 <행진>을 탕진으로 바꿔 부르는데
  그것도 지루하면 펭귄으로 불러
  그럼 정말 썰렁해지지.


  전인권은 왜 행진에서 한 발짝 더 나가지 못했을까?
  그러면 탕진이 됐을 텐데
  스카이 라이프 광고에서 선글라스를 벗은 전인권은
  애송이 개그맨의 폭탄 맞은 개그 같아.
  펑크스타일로 뇌쇄적이야.
  제대로 서글프다는 이야기지.


  그 폭탄 머리를 만드는 데
  노련한 코디네이터가 몇 시간을 주물러댄다지?
  그의 선글라스를 벗길 수 있는 건
  태양도, 비도 섹시한 허벅지도 아니야.
  스타일리스트로 사는 것도
  돈 앞에선 귀찮아진 거겠지.
  하지만 누가 그를 비난하겠어?


  탕진을 흥얼거리며 스니커즈가 닳도록 걷다가 문득,
  지금 내가 부르는 이 노래는
  원유를 잔뜩 부은 베트남 식 커피 같아.
  하드보일드하게 기분이 좋아진다는 이야기지.
  그래.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모두 써버리겠어
  아무 것도 아끼지 않겠어.


  우리동네 미대사관 앞 전경 아저씨들도 탕진!
  우리 삼촌을 닮은 과일가게 총각도 탕진!
  붕어빵 파는 뚱뚱한 아줌마도 탕진!


  피스!로 인사를 대신하던 시대는 갔어
  아무리 외쳐도 평화 따윈 오지 않잖아?


  탕진!

 


 

☞ 문혜진

 

 

 

 1976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다.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와 한양대학교 국문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질 나쁜 연애』『검은 표범의 여인』이 있다. 2007년 김수영 문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