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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나희덕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by 언덕에서 2015. 2. 16.

 

 

나희덕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과연 소멸하지 않는 존재가 있을까? 그럼에도 우리는 사라지는 것들로 인해 고통스러워한다. 때로 그로 인한 슬픔은 말(言)을 잃기도 한다. 꾹 참아두었던 말(言)들이 터져 나올 때 그것은 힘차게 달리는 말(馬)과 같을 것이다. 그리고 파도 속으로 사라진 말(言)은 말(言)이 되어 나오지 못한 말(言)들일 것이다. 다시 말(言)이 되어 나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라는 걸 알지만 말()을 잃은 슬픔을 곁에서 지켜보기란 힘들다. 이 시인은 눈물로 흐르는 말()들, 몸짓으로 전해지는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을 간절히 바랐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시집은 많은 사색을 하게 만든다.

 

"떼어낸 만큼 온전해지는, 덜어낸 만큼 무거워지는 이상한 저울, "삶"을 시로 표현한 이 시인은 "수만의 말()들이 돌아와 한 마리 말(馬)이 되어 사라지는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어쩌면 존재의 시원인 깊고 푸른 바다에서 시인이 만나는 무수한 말(言)들과 그가 내보낸 한 마리 말(馬), 이들의 상호순환적인 움직임은 해변에 이르러 부서지는 흰 포말처럼, 무의 허공으로 사라지는, 자신의 전 존재를 건 도약으로 볼 수 있다.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들이 돌아오고 있다


물방울을 흩뿌리며 모래알을 일으키며

바다 저편에서 세계 저편에서


흰 갈기와 검은 발굽이

시간의 등을 후려치는 채찍처럼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나는 물거품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이 해변에 이르러서야

히히히히잉, 내 안에서 말 한마리 풀려 나온다


말의 눈동자,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파도 속으로 사라진다


가라, 가서 돌아오지 마라

이 비좁은 몸으로는

지금은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수만의 말들이 돌아와 한 마리 말이 되어 사라지는

시간

흰 물거품으로 허공에 흩어지는 시간

 


 



 

 언덕이 요구하는 것


 그 도시는 언덕길이 유난히 많았지요

 언덕길을 오르내리다 지치면

 바닷가 벤치에 앉아 갈매기들에게 빵을 뜯어주었어요

 갈매기들과 비둘기들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며

 바람이 땀을 식혀주기를 기다렸지요

 광장의 간디 동상이 지팡이를 짚고 어딘가를 향해 걸어갈 때

 그를 따르는 백성이 되어 걷고 또 걸었어요

 금지된 소금을 만들러 가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가다가 잘 생긴 거지를 발견하고 그를 따라 걸었어요

 따뜻한 저녁이라도 한 끼 사고 싶었지요

 하지만 거지들은 걸어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더군요

 언덕이 나오자 모퉁이에 주저앉아 버리더군요

 할 수 없이 언덕의 요구에 따라 혼자 걷기 시작했어요

 언덕은 계속 걷고 싶게 만들어요

 언덕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걷다보면 구불구불한 내장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어요

 도시 전체가 계속 출렁거리고 있는 것 같았어요

 오르막길보다는 내리막길을 조심해야 되요

 너무 속도를 내다가는 바다에 풍덩 빠져버릴 수도 있어요

 어느새 가로등이 켜지고

 언덕을 향한 내 등 뒤로 그림자가 길어져요

 언덕이 오래된 성당처럼 가파르고 순결하게 느껴질 때

 낯선 도시에서의 며칠이

 내가 끌고 온 긴 그림자라는 생각이 들 때

 문득 뒤를 돌아보고 싶을 때

 그 도시의 어스름은 이렇게 속삭였지요


 언덕이 요구하는 것은

 발끝을 위로 향하고 걸으라는 것과

 숨 가쁜 순간을 몇 번이고 넘기라는 것, 그리고

 남기고 온 발자국을 돌아보지 말라는 것


 

 


 

 

 

 


 

조롱의 문제


 

조롱은 새를 품은 채 날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철망 사이의 공기 함량이 너무 적었다

조롱의 문제는 무거움보다 조밀함에 있었다

가늘고 촘촘한 정신을 두른 조롱은

새의 눈이 조금씩 어두워지는 동안 조금씩 녹슬어갔다

녹슬어간다는 것은

느리게 진행되는 폭발과도 같아서

붉게 퍼지는 말들이 조롱을 갉아먹었다

조롱은 녹슨 방주처럼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새가 가진 것은 조롱 속의 허공,

새가 할 수 있는 일은 울음소리를 흘려보내

조롱 안과 밖의 공기를 드나들게 하는 것이었다

닻줄 구멍에서 닻줄을 끌어내듯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날개를 파닥이는 것이었다

물론 조롱에게는 작은 문이 있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닫는 것은 조롱 밖의 권한이었다

물과 모이를 갈아주는 손은

이내 문을 닫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닫힌 문으로 절망은 더 잘 들어왔지만

철망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그들을 견디게 했다

희박해지는 공기 속에서

 

 


 

 

상처 입은 혀


너는 혀가 아프구나,

어디선가 아득히 정신을 놓을 때

자기도 모르게 깨문 것이 혀였다니

아, 너의 말이 많이 아프구나


무의식중에라도 하고 싶었던,

그러나 강물처럼 흐르고 또 흘러가버린,

그 말을 이제야 듣게 되는구나

고단한 날이면 내 혀에도 혓바늘처럼 돋던 그 말이

오늘은 화살로 돌아와 박히는구나


얼마나 수많은 어리석음을 지나야

얼마나 뼈저린 비참을 지나야

우리는 서로의 혀에 대해 이해하게 될까


혀의 뿌리와 맞닿은 목젖에서는

작고 검고 둥글고 고요한 목구멍에서는

이제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말이 말이 아니다


독백도 대화도 될 수 없는 것

비명이나 신음, 또는 주문이나 기도에 가까운 것


혀와 입술 대신

눈이 젖은 말을 흘려 보내는 밤

손이 마른 말을 만지며 부스럭거리는 밤


너에게 할 말이 있어

아니,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이생에서 우리고 주고받을 말은 이미 끝났으니까


그러니 네 혀가 돌아오더라도

끝내 그 아픈 말은 들려주지 말기를


그래도 슬퍼하지 말기를,

끝내 하지 못한 말은 별처럼 박혀 있을 테니까


 


 

 ☞나희덕 (1966 ~  )

 

196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 김수영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시집으로 『뿌리에게』『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그곳이 멀지 않다』『어두워진다는 것』『사라진 손바닥』,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산문집 『반통의 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