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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진은영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by 언덕에서 2014. 7. 9.

 

 

 

진은영 시집『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진은영(1970 ~  )은 시인이자 철학자이다. 1970년 대전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와 같은 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박사 논문은 <니체와 차이의 철학>이다. 2000년 계간 『문학과사회』 봄호에 시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인 최승자는 진은영을 두고 “드디어 나를 정말로 잇는 시인이 나왔다”고 말했다. 진은영의 저서로는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2003), 『우리는 매일매일』과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2004), 『니체, 영원 회귀로와 차이의 철학』(2007) 등의 철학하기와 관련한 다소 무겁고 어려운 저서 들이 있다. 그는 2011년 <그 머나먼>으로 현대문학상을 받았다. 오늘 소개하는 이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에서 시인은 발랄한 상상력으로 세상을 새롭게 번역하고, 모든 이름 붙여진 것들을 새롭게 명명하여 시집에 등재한다. 시인을 둘러싸고 있는 가족과 추억뿐만 아니라 그가 체험한 빈센트 반 고흐나 카프카 등도 새로운 이름으로 등재된다. 이 시인은 "백주대낮에는 정하신 일만 일어나므로" 밤을 더 선호한다. 그리고 이 시인은 "밤 하늘에 사는 물고기"처럼 "아가미 열릴 때마다" 별처럼 빛나는 글자를 토해낸다. 이 시집은 그 첫 번째 작업 결과로 읽기에 따라서는 어렵지만 행간의 의미를 따라 읽으면 새로운 형이상학을 만날 수 있다. 이 시인은 자신이 건망증이 심하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고 사물을 응시할 때마다 깊은 감동을 받고 즐거움을 느끼지만 그것들을 금세 잊는다. 마르께스는 늘 새벽에 일어나 ‘손이 식기 전에’ 글을 쓴다고 했다. 나도 나를 건드린 사물들, 사람들, 그리고 책에 대한 기억이 내 손에서 식기 전에 뭔가 써보고 싶다. 나는 쓰는 일을 통해, 사라진 사물들과 시간 속에 거주한다.

 나는 오랫동안 아름다운 시들을 읽었고 스피노자, 칸트, 니체의 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맑스와 용수(나가르주나)와 들뢰즈를 내게 가르쳐 주고 함께 읽었던 이들을 사랑한다."

 그 소중한 시간들에 대한 기록으로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2003)과 칸트에 대한 책,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2004)를 출간했다.

  이 시인은 2011년 시 <그 머나먼 >으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문학과지성사, 2003)외에  《우리는 매일매일》(문학과지성사, 2008)이 있는데 책의 첫머리 ‘시인의 말’에서 이 시집을 최승자에게 헌정했다. 《훔쳐가는 노래》 (창비, 2012), 철학 책 《들뢰즈와 문학-기계》(소명출판, 2002) : 고미숙 등과 공저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그린비, 2004),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그린비, 2007) , 이진경 등과 공저 《코뮨주의 선언》(교양인, 2007) 등이 있다.

 

 

 

 

 

 

 

 

 

 

 

 

 

 

그림 일기

 

그런 날이면 창백한 물고기에게 황금빛 수의를

땅이 내준 길만 따라 흐르는 작은 강물에게 거미의 다리를

무엇에 차이기 전에는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돌멩이에게 이쁜 날개를

한 번도 땅의 가슴을 만져본 적 없는 하늘에게 부드러운 손가락을

높은 곳에서 떨어져본 마음을

더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마음 받아주는 두 팔을

높은 곳에 올라가기 전에

네 곁으로 가는 다리를

그러나 높은 곳에서 떨어져 이미 삐뚤어진 입술을

그 입술의 미세한 떨림을

떨림이 전하지 못하는 신음을

크게 그려줘 내 몸에 곱게 새겨줘

그런 날이면 망친 그림을

잘못 그려진 나를 구기지 말아줘 버리지 말아줘

잘못 그려진 나에게 두껍게 밤을 칠해줘

칼자국도 무섭지 않아 대못도, 동전 모서리도, 그런

날이면 새로 생긴 흉터에서 밑그림 반짝이는 그런 날


 

 

 

 

 

 

 

청춘1

 

소금 그릇에서 나왔으나 짠맛을 알지 못했다 인데

절여진 생선도 조려놓은 과일도 아니었다

누구의 입맛에도 맞지 않았고

서성거렸다. 꽃이 지는 시간을

빗방울과 빗방울 사이를

가랑비에 젖은 자들은 옷을 벗어두고 떠났다

사이만을 돌아다녔으므로

나는 젖지 않았다 서성거리며

언제나 가뭄이었다

물속에서 젖지 않고

불속에서도 타오르지 않는 자

짙은 어둠에 잠겨 누우면

온몸은 하나의 커다란 귓바퀴가 되었다

쓰다 버린 종이들이

바람에 펄럭이며 날아다니는 소리를

밤새 들었다

 


 

 

 

 

 

 

 

긴 손가락의 詩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모두 다른 것을 가리킨다. 방향을 틀어 제 몸에 대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다. 잘 부러진다. 가지는 물을 빨아들이지도 못하고 나무를 지탱하지도 않는다.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도 나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어제

 

 

나는 너를 잊었다. 태양이 너무 빛났다

내 집 유리창이 녹아버린다. 벽들이 흘러 내리고

시간의 계곡으로 나는 내려가고 싶다

어릴 적에는 어제를 데려다 키우고 싶었다

오 귀여운 강아지, 강아지들, 내

가 굶겨 죽인 수백만 마리

강철 종이의 포크레인으로

어제들의 거대한 공동묘지를 뒤집을까?

오늘 혼자 부르는 노래는 지겹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을 명명한다. 베껴 쓰기의 시간이

돌아왔다고

플라톤을 베낀다 마르크스를 베낀다 국가와 혁명을

베낀다

무엇을 할 것인가 베낀다

어떤 목소리는 바위처럼 단단하고

어떤 목소리는 바위에 떨어지는 빗물 같다

오늘의 메마른 곳에 떨어진

어제라는 차가운 물방울

무수한 어제들의 브리콜라주로 오늘의 화판을 메워야

한다

태양이 너무 빛났다. 어제와 장미 향기가 다 증발하기

전에

너를 그려야 한다

 

-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문학과지성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