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규 시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金光圭.1941.1.7∼ ) 시인은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 독문과ㆍ동대학원 졸업. 독일에 유학한 후 서울대에서 <귄터 아이히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5년 계간 [문학과지성]에 시 <유무(有無)><영산(靈山)> 등을 발표하여 등단했으며, 한양대 독문과 교수를 역임했다.
1979년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을 발표하여 제1회 녹원문학상을 수상했다. 1981년 제5회 오늘의작가상 수상 시선집 <반달곰에게>를 발표했고, 1984년 두 번째 시집 <아니다 그렇지 않다>로 제4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1994년 다섯 번째 시집 <아니리>로 제4회 편운문학상을 수상했다.
4월의 가로수
머리는 이미 오래전에 잘렸다
전깃줄에 닿지 않도록
올해는 팔다리까지 잘려
봄바람 불어도 움직일 수 없고
토르소처럼 몸통만 남아
숨막히게 답답하다
라일락 향기 짙어지면 지금도
그 날의 기억 되살아나는데
늘어진 가지들 모두 잘린 채
줄지어 늘어서 있는
길가의 수양버들
새잎조차 피어날 수 없어
안타깝게 몸부림치다가
울음조차 터뜨릴 수 없어
몸통으로 잎이 돋는다
-시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1995.민음사)
그의 시는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끌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즉 평범한 일상의 일들을 내용으로 하고, 형식 또한 시의 언어가 추구하던 긴장을 오히려 이완시키고 있다. 따라서 함축이나 상징, 비유 등 시적 언어의 특징이라고 여겨져 왔던 요소들이 배제되며, 시와 산문 사이의 구획도 모호해진 일상시라는 새로운 영역이 개척된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시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1995.민음사)
현대시에 관해서 얘기하려는 사람들이 흔히 거역하지 못하는 유혹의 하나는 모호하고 불투명한 작품 세계에 대한 선호적(選好的) 경도이다. 아리송한 수수께끼나 반복적인 추측의 축적에 의하여 어렴풋이 함축이 트여오는 대목이 겹쳐 있으면 있을수록 그것은 분석적 호기심의 추구의 대상이 된다. 시를 읽고 해석하고 설명하는 일이 어엿한 전문 직종의 하나로 정립되어 있는 현대 세계에서 이러한 모호함과 중층적 의미구조에 대한 숭상은 더욱 확대되어 갈 공산이 크다.
분석적 호기심이나 해석의 전문기술이 그 솜씨를 정당화하고 구사할 공간을 여유 있게 제공해 주는 것이 바로 이 중층적 모호함 속에서이기 때문이다. 김광규 시를 읽으면서 ‘의미 없는 있음’의 시세계를 얘기하는 것은 그의 시세계가 이에 대해서 적극적인 의미를 띤 하나의 역상(逆像)이 되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생활 세계의 현재적 질서와 운행(運行)의 한 복판에서 똑바로 나오는 그의 시는 공유(共有)경험에 관한 의미 있는 전달이고자 하는 노력 속에서 스스로를 강력하게 특징짓고 있다.
출퇴근길에 시달리는 전철간의 비좁은 틈에서 조막조막 접어 읽는 신문의 재미란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그저 오늘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기보다는 우리가 이러이러하게 살아야만 하는 그 이유를 기사화된 인물들은 너무 속없이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재미는 일순간 업보 같은 스트레스가 되어 지친 다리에 철퇴를 달며 우리가 삿대질하는 대상이 결국 우리였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하루분의 반성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일상이다. 시인은 그러한 일상을 그린다. 아니, 일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게 아니라 너무 나약하고 불합리한 우리네 정서를 바늘로 콕콕 찌른다. 극복해야 할 것들이 해결한 것들보다 많은 이 세상에서 시인은 우리에게 채찍을 들어 나날의 반성을 촉구하려는 것이다.
1981년 겨울
낮과 밤이 하나로
검은 땀 되어
숨가쁘게 흘러내리는
지하 300m
막장에서 갑자기
물줄기가 터졌다
쏟아져 나오는 죽탄
순식간에 갱도를 막아 버린
시커먼 죽음
그 차가운 광물을
몸으로 밀어내며
하루 이틀 사흘
비상갱에서 겨우 목숨을
건졌을 때 비로소
시간이 다시 흐르고
목숨은 거듭 태어났다
힘겹게 견뎌온 우리의 삶을
1분도 멈출 수 없는
시뻘건 목숨을
낙서처럼 지워버린 그것은
결코 기계의 잘못이 아니다
콤퓨터에 자료를 넣은
그들의 잘못도 아니고
그들에게 지시한
그 사람의 잘못도 아니다
그 사람이 받은 명령은
아득히 먼 곳에서 왔다
어딘가 너무 멀어
보이지 않는 그 곳은
우리의 머릿속에
가슴속에
마음속에도 있다
눈감고
귀기울이면
가파른 산을 넘고
녹슬은 철조망을 지나
우리를 찾아오는 바람 소리
육신을 잃고
휘파람으로 떠도는 말들이
허공을 할퀴며 달려들어
혀를 찌른다
거리마다 침묵의 구호들
시체처럼 널려 있고
상점마다 바겐세일의 깃발
만장처럼 펄럭이는데
자유를 자유라 부르며
사랑을 사랑이라 부르는
우리의 모국어는 어디 있는가
온종일 들려오던
호각 소리 멈추고
유리로 된 진열장이
모두 닫힌 밤
우리는 잠들지 않고
깨어 있었다
심장의 고동 헤아리며
앞으로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생각했다
동이 트면 또다시
어제의 옷을 입지만
이제는 쫓기며 뛰지 않겠다
안개 낀 새벽길을
천천히 걸으며
잊었던 말들을 되살리고
몸 속에 퍼지는 암세포까지도
우리의 삶으로
받아들이겠다
-시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1995.민음사)
【시집】<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1979.문학과지성사) <반달곰에게>(1981.민음사) <아니다 그렇지 않다>(1983.문학과지성사) <크낙산의 마음>(1986.문학과지성사) <좀팽이처럼>(1988.문학과지성사) <아니리>(1990.문학과지성사) <대장간의 유혹>(1991.미래사) <물길>(1994.문학과지성사)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1995.민음사)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1998.문학과지성사) <누군가를 위하여>(2001.문학과지성사) <처음 만나던 때>(2003.문학과지성사) <시간의 부드러운 손>(2007.문학과지성사) <환생한 새우>(2009.답게)
【산문집】<육성과 가성>(1996.문학과지성사) <천천히 올라가는 계단>(2006.작가)
【저서】<십구세기 독일시>(1980.탐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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