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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옛날의 금잔디

어떤 투사(鬪士)

by 언덕에서 2015. 1. 16.

 

 

 

 

어떤 투사(鬪士)

 

 

 

 




단순한 사람들은 한쪽만을 선택해 보고 그쪽을 이해한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집단 어떤 주장도 완전히 선하지 않은 것처럼 완전히 악하지만은 않다. 그 시점에서 우리의 선택은 적당히 타협하게 되지만, 보다 철저한 신념을 가진 사람은 미덥잖은 그 정도의 차이에 빠져서 어느 한쪽에다 자기 자신을 던지기를 거부한다. 이때 그 두 개의 상반된 집단이나 주장의 동그라미들 사이에 겹치는 부분이 넓으면 넓을수록 그들이 설자리도 넓다. 그러나 우리 사회를 양분하고 있는 두 개의 동그라미는 이미 겹치는 부분이 없거나 없어져 가고 있는 중으로 진영논리는 더욱 첨예화된 것은 아닌지.그리고 그 첨예함에서 탄생한 이단아는 없는지 살펴볼 일이다. 

 


 1980년대 중반 전두환 정권의 5공 시절, 대학 중앙 도서관 내에서 한 학생이 갑자기 '군사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전단을 뿌렸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사복경찰들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학생의 양쪽 팔을 꺾고는 질질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군에서 제대한 우리들 복학생들은 구석에서 숨죽인 채 보고만 있었다. 분노와 무기력, 비굴한 감정이 뒤섞였다. 한 달에 몇 번씩 이런 일은 반복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아주 친했으나 학부 시절 같은 대학을 다니면서도 결국은 소원해진 고교 동기가 있었다. 그는 학교 도서관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나와의 짧은 대화에서 민중 속으로 향해서 결국은 무산대중의 대변인이 되겠다고 다짐했으며 자신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 공활(工活)로 단련할 것을 이야기했다. 그런가하면 부르조아적 사고와 삶의 껍질을 벗지 못하는, 식민지적 분단현실에 노예처럼 길들여져 사는 이들에 대한 연민의 말이라는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마르크스 보다는 레닌이 우선하고, 레닌보다는 스탈린이나 모택동이 우선하고, 스탈린이나 모택동보다는 주체사상 비슷한 것을 주장하는 논리가 이해되지 않았던 기억을 종합해보면 그렇게 대단한 사상가는 아니었다는 판단도 든다. 당시 나는 친구의 한 명으로서 그와 관계를 유지하길 바랐다. 뭐 이데올로기를 위해 같은 방식의 삶을 살지 않더라도 친구 관계는 유지되는 건 보편적인 현상이 아니겠는가?

 그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면 두고두고 잊지 못할 쓰린 기억이 하나 있다. 오십 대 초반의 나이로 아버님이 돌아가신 것인데 슬픔을 가누지 못하던 당시 그와 나누었던 통화 내용이다.

  "슬픈가? 그런데 나와 같은 방식의 삶을 공유하고 싶지 않으면 앞으로 내게 연락하지 마라.”

 

 

 

 


 그 일이 있고 일년 후에 나는 군 입대를 했었고, 3년이 지나 복학하니 학교에서 그를 찾을 수 없었다. 누군가는 그가 타 학교 대학원에 진학했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그가 경인지역의 어느 공단에 위장 취업하여 노동전사가 되었다고도 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기 전 다행히 원하는 직장에 시험쳐서 합격할 수 있었고 그렇게 20대 후반과 30대를 보내고 40대 초반에는 부서장으로 자리 잡아 수많은 부하 직원을 관리하는 직위에 오르게 되었다.

 마흔 두 살이 되던 그해는 학교 동창들을 연결해주는 ‘아이 러브 스쿨(I love school)’이란 인터넷 사이트가 폭풍처럼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아침에 출근해보니 고교 동창회에서 우편물을 보내 온 것이 내 책상 위에 놓여져 있었다. 봉투를 뜯자 그간 헤어졌던 동창들의 주소가 기록된 ‘동창회 명부 수첩’이라는 것이 배달된 것이다. 수첩의 내용은 600명의 동기 중 주소가 기록된 이는 200명 정도로 그야말로 만들어 가는 과정임을 알 수 있었다.  내 휴대폰 번호나 직장명 전화번호 등도 게재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자리로 걸려온 낯선 전화를 받게 되었다. 기억에서 사라졌던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며 이야기했다.

 “친구, 기억하겠나?”

 역사에서 권력자들은 가지지 못한 이들을 핍박한다. 그런 기억, 마르크스의 사상을 갖지 못한 이, 또는 마르크스를 인정하지 않는 이를 핍박하던 이로서의 그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럼, 기억하지. 내가 너를 어찌 잊겠나?”

 “하하, 그렇군. 어떤 기억을 갖고 있나?”

 “너와 같은 이념이 아니면 연락하지 말라는 말을 했지. 내가 그걸 어떻게 잊겠나?”

 “하하, 별의 별 사소한 것을 다 기억하는군. 우리 언제 한 번 만나서 이야기 좀 하지.”

 “찾아와, 사무실이 역 근처에 있으니 연락하게.”

 이튿날 퇴근 무렵 시간에 서무 여사원이 손님이 찾아왔다고 보고했다. 그래서 그와 20년 만에 만나게 되었는데 정장을 했지만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옷차림에다 이미 많이 늙은 얼굴은 벌써 대머리가 되어 있었다.

 간단하게 차를 마시면서 그간 살아왔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흘러간 시간 동안 그의 삶의 궤적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이십대와 거의 일치하는 이 나라의 80년대를 나는 열정과 혁명의 시대로 알아왔다. 그 시대의 험상궂고 뒤틀린 외양, 정통성도 정당성도 결여한 권력과 불합리한 분배구조는 그런 확신을 한층 자신만만하게 했다. 우리의 이데올로기는 아직도 유효하며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끝까지 추구해야 할 그 무엇이다. 오류와 착종이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시대이며 역사이다. 그 밖의 모든 논의는 나약한 패배주의거나 비굴한 타협의 논리다…….

 그러나 내가 현재의 가난을 외면할 수 없기에 새로운 길을 모색하다가 발견한 것이 있다. 너에게 그것을 안겨줌으로서 못다한 친구로서의 도리를 다하려고 한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부하 직원들도 퇴근하고 저녁 시간이 훨씬 넘은 지라 회사 근처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술이 몇 잔 들어가니 그간 살아왔던 이야기가 훨씬 상세하게 전개되었다. 제국주의 식민지 주구(走狗) 역할을 하는 군대에 가지 않기 위해 손가락을 잘랐으며, 졸업 후 구로공단에 위장 취업하여 노동 전사들을 지도한 보람찬 성과들이 훈장의 영예처럼 이어졌다.  

 

 

 

 

 

 나는 인내를 가지고 들었지만 그가 지금 내게 나타나 주장하는 것을 대체 종잡을 수 없었다. 뭘 어쩌잔 말인가. 그러나 그 궁금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가 물었다.

 “재산은 얼마나 있는가?”

 “많진 않지만 그간 열심히 저축한 결과 남에게 손 벌릴 정도는 아니지.”

 “그렇다면 지금 이대로 만족하며 살 건가?”

 “지금의 내 삶이 어때서?”

 이 정도에서 이야기를 마쳤으면 하는데 난데없는 제안이 시작되었다.

 “네가 책임자로 있는 사무실에는 직원들이 굉장히 많더구먼. 모두에게 획기적인 부(富)를 안겨 줄테니 내 제안을 받아주길 바라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네.”

 학부 졸업 후 노동운동을 하며 사회 변화를 도모했지만 모두 여의치 않았고 이후 30대 중반부터는 사법고시 공부를 했으나 결과는 모두 실패에 그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다시 사회에 나와 뭔가를 이루어볼려고 하던 차에 획기적인 것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자신 혼자만 하기에는 매우 아까운 사업이어서 함께 하려고 찾아왔다고 했다.

 “그게 뭔데?”

 “네트워크 사업이지. 들어보았나?”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실소가 났으나 애써 참았다.

 “피라미든가 뭔가, 다단계 판매를 말하는구만.”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게. 자네가 알고 있는 것은 모두가 편견에 불과한 것임을 내 알고 있으니. 내가 볼 때는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어쩌면 자본주의의 꽃이기도 해. 동참해주게. 자네를 위해서 내 이러는 거야. 자네처럼 많은 부하직원을 둔 경우는 금방 돈방석에 앉을 수 있어.”

 “나와 내 휘하 직원들을 동원해 다단계를 하겠다는 말이로군."

  " ... "

  "술이 마시고 싶으면 언제든 연락하게. 그 정도 능력은 있으니까. 돈이 필요하면 옛정을 생각해서 얼마간 융통해줄 수도 있고. 그러나 자본주의의 쓰레기 같은 그것을 나에게 권유할 생각을 더 이상 말아주었으면 좋겠어.”

 “다단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그러는가? 지금부터 내가 설명할테니 잘 들어주게!”

 “듣고 자시고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만 하지.”

 나는 자리를 막차고 일어났다. 뜻밖의 만남이었던 만큼 어이없는 시간이었고 한 혁명투사의 일그러진 뒷모습에 실망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다음날 점심 시간, 옆 건물에 입주한 선박회사에 근무하는 대학 후배를 청하여 차를 마시게 되었다. 그 시절 총학생회 사회부장으로 시위 때마다 핸드마이크를 들고 도서관에 들이닥쳐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우 여러분!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고문정권! 학살정권! 군부독재 타도하자! ”를 외치던 운동권의 핵심멤버였기 때문이다. 

 “알만한 친구들은 청와대 비서관으로 가고 정부 기관, 공공기업의 고위직으로 모두 훈장처럼 한 자리를 차지했지요. 그 선배는 논공행상에서 제외되었군요. 훈장 탄 그 부류와 노선이 달랐던지…….”

 계속 듣기만 하는 내게 차분하게 일침을 가했다.

 “그런데 형은 왜 말하지 못했습니까? 그 잘난 다단계 하려고 친구에게 그래 함부로 대했느냐고.”

 나는 선천적으로 남에게 쓴소리하는 것을 싫어한다. 남이 나에게 심하게 대했더라도 나 역시 그러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게 생활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이후도 집요한 전화는 끊임이 없었으나 그때마다 나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아래의 통화가 그와의 마지막 통화였을 것이다.

 “정 나의 사업에 동참하기 싫다면 한번만 도와주게.”

 “그게 뭔데? 말해보게.”

 “정수기나 안마의자, 자석매트. 이 셋 중 하나만 구입해주면 안되겠나? 아로마나 스쿠알렌이 들어가 있는 건강식품도 좋고.”

  " ... "

 나는 그를 다시 만난 이후로 계속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자칭 혁명투사가 자본주의의 쓰레기로 전락하는 이 부분이야말로 그들 내부의 부조리나 불철저함 때문에 치른 희생과 고통의 사례가 아니었겠는지, 아니면 그 무엇으로 설명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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