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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술이 원수라고?

by 언덕에서 2014. 12. 5.

 

 

 

 

 

 

 

술이 원수라고?

 

 

 

 

 

좌충우돌의 미학은 / 너로 말미암아 비롯하고, / 드디어 끝난다. / 구슬도 먼지도 못되는 / 점잖은 친구들아, / 이제는 당하지 않을 것이니 / 되려 기뻐해다오.

 

 위의 시는 김관식1(1934 ~ 1970) 시인의 시 '김관식의 입관(入棺)' 중 일부이다. 너로 말미암아 비롯하고 끝나다니 ‘너’는 누구일까? 바로 ‘술’이다. 술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원망하는 것인데 실제로 그는 술 때문에 죽었다.

 

 “오오냐, 오오냐 적당히 살거라 시인들아!”라며 세상을 온통 긍정하면서도 눈물로 시적 에스프리2를 캐냈던 박용래3 시인은 천성적 순수로 현실에는 도저히 편입될 수 없는 시인이었다. 강경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에 들어갔으나 돈 세는 것에 염증나 그만둬버린 시인은 돈ㆍ사회와는 영영 등을 돌리고 술로만 살았다. 술을 마시면서도 울고, 별을 보고도 울고, 봄 햇살에 날리는 장닭 꼬리를 보고도 울고, 울면서 또 울던 박용래는 삼라만상에서 한 (恨)의 원형을 끌어올린 극순수의 서정시인이었다.

 

 골목에서 골목으로

 거기 조그만 주막집.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의 보람인 것을…

 흐리멍텅한 눈에 이 세상은 다만

 순하기 마련인가.

 

 - 박용래 시.  '주막에서' 중에서

 

 이렇듯 술은 잘 마시면 사람의 마음을 삭혀주고 기쁨을 주지만 과하게 마시면 한 인간을 파멸로 인도한다. 술의 폐해 중 으뜸은 주벽(酒癖)과 주사(酒邪)일 것이다.

 전에도 나는 직장생활의 운(運)은 좋은 상사를 만나는 데서 시작하지만 상사 자리에 오른 이후에는 좋은 부하를 만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내용을 적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직장 문화 중에서 가장 고쳐져야 할 부분이 관대한 음주 문화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특히 술이 취한 상태에서 보이는 추태를 그럴 수도 있는 일로 간주하고 넘어가버리는 너그러움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하루의 반 이상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 근무 시간 중에는 예의범절과 규범으로 까다롭게 상대방을 대하기 일쑤이지만 회식 자리 특히 술자리에서는 관대하기 짝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회식 자리에서도 엄격한 예절을 요구한다면 그야말로 피곤한 직장 생활일 것이겠지만, 어느 정도 최소한의 예의와 질서가 유지되어야 건강한 직장 생활 또한 보장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30대 중반일 때 만난 그는 예의바른 직속 부하 직원이었다. 내가 나온 대학의 4년 후배이기도 했던 그는 다변이 좀 흠이었지만 다정다감한 성격과 업무에 열정을 보이는 모습 또한 나무랄데 없었다. IMF를 맞기 전, 그해 부서가 재편되었고 그는 내가 속한 부서에 주무 대리(主務 代理)로 그가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이상한 점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분위기에 따라 과음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적당한 실수는 애교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 근무 후의 직장 음주문화인데 어느 순간 술이 오르면 그는 항상 공격적인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대화 중의 말꼬리를 잡아 시비를 건다든지 평소 타인에게 받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화제로 그 사람에게 과한 공격을 습관처럼 하는 것이었다. 어떨 때는 그런 자리가 평소의 문제 해결을 위한 생산적인 활력소가 되는 것이지만 자신의 비위에 맞지 않으면 상하를 불문하고 공격해대는 습관이야말로 조직 생활과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큰 문제점일 것이다. 그래도 내가 그의 상사이고 학교 선배이기에 별 걱정 없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판단한 것이 나의 착각이요 오만임을 알게 되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창립된 회사의 시스템이 정상화되지 않은 시기라 그를 포함한 부하 직원을 데리고 일본 후쿠오카(福岡))에 출장 갈 일이 생겼다. 새로 만들 시스템을 일본 협력사와 비교하고 최종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일이 끝난 저녁에 발생했다. 시내의 중심지에서 함께 간 나를 포함한 직원 네 명이서 반주를 곁들인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고 이후 간단히 맥주를 한 잔하자는 부하 직원들의 의견에 따라 선술집에서 맥주를 마시게 되었다. 환락가 중심지에 손님을 찾는 길가의 재일교포 삐끼의 안내에 맥줏집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삐끼가 안내하는 곳으로 갔는데 알고 보니 그곳은 그렇고 그런 유흥주점이었다. 이미 주문한 맥주병을 딴 상태였기에 취소를 하지 못하고 그냥 몇 잔하고 숙소로 돌아가면 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런데 이미 취한 그는 여급(女給))을 불러야겠다며 취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상사이자 출장 책임자인 나는 난감해지기 시작했다. 사고 없이 무사하게 귀국해야 하는데 부하 직원 중 그가 유달리 취했다고 판단되었고 평소와는 정반대의 저급한 행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지시를 무시하고 웨이터에게 아가씨 둘을 오게끔 지시했다. 중국 유학생으로 보이는 두 명의 여성이 나와 그 옆에 앉았으나 나는 그 아가씨를 다른 부하 직원 옆에 앉도록 했다.

 이윽고 맥주를 서너 병 더 마시니 더 이상 그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다들 적당히 취했고 바가지 술값도 상당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만 마시고 일어서자고 하니 급기야 그는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옆에 앉은 아가씨와 자신이 동침(同寢)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계속 인내하던 나는 드디어 짜증이 쌓이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가도록 하지.”

 “누구 마음대로 갑니까?”

 그가 많이 취했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국의 술집에서 행사하는 윤리 없는 저급한 마초 근성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는 계속 중국 여자와 동침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었다. 출장비를 쓰자는 내용이고 회사 돈을 그런 곳에 쓸 상사가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뒷골목의 불량배들에게 변이라도 당한다면 모든 게 인솔자인 나의 책임으로 귀결될 것임은 뻔한 일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직원들에게 숙소로 돌아갈 것을 지시하며 택시를 잡아탔다. 이걸로 출장 1일차는 끝난 것이다고 생각하며.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2인 2실로 배정된 호텔방에 들어오자 말자 자신이 묵기로 한 방을 빠져나와 내 방에 들어와서 취침 준비 중인 사원을 자신의 방으로 보낸 후 내게 주사(酒邪)를 부리기 시작했다.

 “이 대리, 무슨 말인지 알겠고, 술 깨고 내일 이야기하도록 하지.”

 “나는 그렇게 못해요. 왜 나를 이렇게 무시하는 거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오늘은 그냥 자고 내일 이야기하자구.”

 “당신! 상사면 다야!”

 “그래, 내게 섭섭한 게 있는 모양이군. 내일 이야기하면 모든 게 이해될거야.”

 “안돼! 이 새끼야!”

 아, 악몽이라고 해도 그런 악몽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후 10시에 시작된 주사는 새벽 5시까지 쉬지않고 계속되었다. 저러다 지치겠지 하며 불을 끄고 이불을 덮으면 곧장 불을 켜고 이불을 걷어내며 떠들고 욕하고 손가락질하는 행위에 내 인내심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확인하는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서 술주정을 계속 듣고만 있을 수밖에 딴 일이 있을 수 없었다.

 개나 고양이를 키워본 사람들은 야간에 동물의 눈에서 발광(發光)이 일어남을 알게 된다. 호랑이나 사자 등 밀림의 야수들도 야생의 본능으로 동일한 현상을 보인다. 나는 등산하다 길을 잃어 우연히 개사육장 근처에 가게 된 적이 있는데 우리에 갇혀서 낮선 이를 경계하는 개의 눈에서 전기 합선될 때 발견되는 광체를 본 적이 있다. 그날 그의 눈은 발광(發光)하고 있었고 동시에 발광(發狂)하고 있었다.

 그러다 창밖에는 동녘 해가 뜨고 있었다. 그에게 밤새 시달리던 나는 그간 끊었던 담배를 계속해서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다섯 시 반으로 정확히 기억한다. 어느 순간 갑자기 눈빛이 달라진 그가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

 “과장님, 밤새 제가 무슨 짓을 한겁니까?”

 “죄다 기억하고 있는 눈치구만.”

 “평소에 존경하는 분인데……. 제가 어떻게 이런 주사(酒邪)를…….”

 놀라웠다. 그는 자신이 밤새 행동한 것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저를 죽여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기가 막혔다. 밤새 뜬 눈으로 보내었기에 눈은 따갑고 머리는 무겁기 짝이 없었다.

 

♣ 

 

 귀국 후 '재고시스템에 관한 비교'라는 제목의 출장보고서를 제출한 후였다. 옆 부서 과장이 말을 걸었다.

 “일본에서 있었던 이야기는 다 들었어. 윤과장은 사람도 좋아.”

 “하, 어쩔 거야? 내 부덕의 소치지.”

 “아닐 걸? 쟤 술버릇은 전 직장에서도, 전 부서에서도 유명해. 당신이 순진하거나 방심한 거지.” 

 이후 두 달 동안 그 부하 직원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날 밤 8시간 동안 들었던 갖은 무례와 욕찌꺼기가 내 머리 속을 계속하여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신뢰라고 하는 것이 덧없는 것임을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후 두 달 동안 내가 맡은 부서의 분위기는 초상집과도 같이 우울하고 침울해져 갔다. 자신이 제어하지 못하는 술주정으로 일어난 엄청난 사태에 대해서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한 번 속는 셈치고 저를 용서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노력은 해보겠네. 어째 그게 생각처럼 쉽게 되지 않으니 나도 어렵군.”

 

 

 

 

 

 

 누구나 인간인 이상 완벽하지 못한 것이고 또한 인간이기에 실수를 할 수 있다. 두 달이 지나자 나머지 직원들을 위해서라도 이 일을 매듭지어야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어스름 여름 저녁이었다. 퇴근 후 그와 둘이서 식사를 하며 지난 모든 일은 없었던 걸로 하겠노라고 선언할 참이었다. 그일을 영원히 안고 갈 수는 없는 일이었고 회사일은 계속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날 그와의 저녁 식사 때 반주로 한 병씩 마시는 소주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를 바랬다. 그리고 무슨 마음이었는지 시작부터 끝까지 무릎 꿇은 상태로 술 마시는 태도 또한 그의 반성과 앞으로의 각오가 어떠한지를 짐작하게 하는 듯했다.

 그렇게 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가는 택시를 잡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그가 나를 잡았다.

 “과장님, 한 잔 더하면 안 되겠습니까? ‘

 “이만하면 됐네. 내일 할 일도 많고.”

 “아, 한 잔 더 하자니깐 씨발!”

 갑자기 다시 발광(發光)한 눈빛의 그가 내 멱살을 잡자 내 와이셔스 단추가 우두둑하며 떨어져 나갔다. 무엇이 그를 저렇게 만드는 것일까. 술이 원수였을까? 저급한 쾌락주의, 젊음의 일회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 따위가 합쳐진 결과는 아니었을는지? 독한 술이 만든 주사는 무엇보다도 개인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원활한 사고를 방해하며, 의지와 극기심을 현저하게 파괴하고 있었다.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용서한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깨닫게 된 날이었다.

 

 

 

 

 

 

 

  1. 1934. 5. 10 충남 논산~ 1970. 8. 31. 시인.초기에는 전통적 서정을 읊다가 차츰 가난한 자신과 이웃에 대한 연민을 노래했다. 본관은 사천. 호는 추수(秋水)·우현(又玄).한약방을 경영하던 아버지 낙희(洛羲)와 어머니 정성녀(鄭性女)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4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다. 1952년 강경상고를 졸업한 뒤 충남대학교에 입학했다가 고려대학교에 편입, 1953년 다시 동국대학교 농과대학으로 옮겼으나 중퇴했다. 강경상고를 다닐 때 정인보·최남선 등 한학의 대가를 찾아가 성리학·동양학을 공부했다. 1954년 서정주의 처제인 방옥례(方玉禮)와 혼인했다. 여주농고·서울공고·서울상고 등의 교사를 지냈고, 1958년 세계일보 논설위원을 지냈다. 1960년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하여 재산을 다 날린 뒤, 죽을 때까지 특별한 직업 없이 살았다. 심한 주벽(酒癖)과 기행(奇行)을 일삼아 천상병과 함께 문단의 기인(奇人)으로 많은 화제를 남겼다. 가난과 10여 년 동안의 병마로 인해 36세에 요절했다. [본문으로]
  2. (프랑스어로 esprit, 즉 기지, 재치, 정신) [본문으로]
  3. 1925. 8. 14 충남 부여~ 1980. 11. 21. 시인.향토적 정서를 시적으로 걸러 시어의 정수만을 골라 읊었다. 1945년 강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은행에서 일하다가 곧 그만두고 1946년 김소운에게 문학수업을 받았다. 동백시인회를 조직해 동인지 〈동백〉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1955년 〈현대문학〉 6월호에 박두진의 추천을 받아 시 〈가을의 노래〉를 발표한 뒤 〈황토길〉·〈땅〉 등을 발표했다. 1969년 한국 시인협회가 주관한 〈오늘의 한국시인선집〉의 하나로 첫 시집 〈싸락눈〉을 냈고 1971년 시인 한성기·임강빈·최원규 등과 함께 시집 〈청와집 靑蛙集〉을 펴냈다. 시집으로 〈강아지풀〉(1975)·〈백발의 꽃대궁〉(1980)·〈먼 바다〉(1984)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우리 물빛사랑이 풀꽃으로 피어나면〉(1985)이 있다. 1961년 충청남도 문화상, 1971년 현대시학작품상, 1980년 한국문학작가상을 받았다. 1984년 10월 대전 보문산 사정공원에 시비가 세워졌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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