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크 장편소설 『골짜기의 백합(Le Lys Dans La Vallee)』
프랑스 소설가 발자크(Honoré de Balzac, 1799~1850)1의 장편소설로 1836년 간행되었다. 이 작품은 발자크가 36세에 집필한 소설로, 발표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90여 편의 방대한 <인간극> 중에서 이 소설은 그의 대표작으로 떠오르게 되었으며,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에서부터 지드의 <좁은 문>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문학사의 주요 걸작들의 모델이 되었다. 발자크의 낭만적 성향이 최고로 발휘된 이 작품은 플라토닉한 연애 소설이자 한 인간의 내적 성숙을 묘사한 성장 소설이며, 왕정 복고기의 사회와 인간 군상을 날카롭게 묘사한 사회 소설이기도 하다.
『골짜기의 백합』은 발자크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발자크의 낭만적 성향이 최고도로 발휘된 명작으로서, 정염과 의무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두 가지를 다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글자 그대로 목숨을 바쳐) 모르소프 부인이라는 불멸의 인간상을 창조해 내고 있다.
발자크는 처음에 어줍잖은 문필가 생활과 거듭되는 사업 실패로 부채만 늘어나는 곤경에 빠진다. 그때 20세나 연상인 베르니 부인을 알게 된다. 유년시절부터 냉혹한 어머니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한 발자크는 부인에게 모성적인 사랑을 느꼈으며, 그녀 또한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 주었다. 그들의 사랑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데, 이 작품은 그녀를 위해 썼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다정다감한 청년 귀족인 펠릭스는 우연한 기회에 아름다운 백작 부인 앙리에트를 알게 된다. 앙리에트는 왕실 귀족 출신으로 엄격한 가톨릭 교육을 받은 정숙한 여인인데, 유부녀인 동시에 어진 어머니다. 펠릭스는 앙리에트를 뜨겁게 사랑하지만 앙리에트는 끝내 그 사랑을 거절한다. 그녀는 비록 육체적 사랑은 거절했으나 '사랑' 자체를 거절한 것은 아니어서 앙리에트 쪽에서도 또한 열렬히 펠릭스를 사랑하고 있는 터였다.
육체 대신에 앙리에트가 펠릭스에게 준 것은 경제적인 면을 비롯해 사교와 처세 및 그 밖의 온갖 면에서의 원조였다. 앙리에트의 그러한 도움으로 펠릭스는 파리 사교계에서도 성공을 거두게 되고 연인도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펠릭스의 마음은 한시도 앙리에트에게서 떠나는 일이 없었고 앙리에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사이에 서로 교환되는 대화나 눈짓은 때때로 에로틱한 면이 있기도 했으나, 결코 육체적 탈선을 넘는 일이 없었다. 앙리에트와 펠릭스 간의 사랑은 이상한 사다리를 밟으며 높은 곳으로 자꾸만 상승해 올라갔다. 따져 보면 그 원동력이 된 것은 앙리에트의 '정절'에 관한 이상스러울 만큼 강력한 집착에 기인했다.
앙리에트는 펠릭스에게 모든 것을 허락했다. 자기 대신 육체를 허락할 여인을 사귀는 것조차 허락했다. 그녀는 자기의 육체 이외의 돈과 정성, 마음 등 모든 것을 그에게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두 사람의 사랑도 앙리에트의 죽음으로 종말을 고하게 된다. 죽음을 앞둔 앙리에트는 비로소 펠릭스에게 자신의 사랑이 위선이었다는 점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자기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고 있는 것은 정신적인 사랑이 아니라, 육체적인 사랑이었다는 점을 고백한다. 이 처절한 부르짖음 뒤에 앙리에트의 숨진 얼굴에는 다시금 천사와 같은 아름다움이 되살아났다.
청년시절 발자크의 생활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이 소설은 30대 여인의 마음과 청년의 감정을 자연과 교감시켜 낭만주의적인 정서와 사실적인 필치로 잘 표현하고 있다. 사회에 나서는 펠릭스를 위해 모르소프 부인이 쓴 당부의 편지(본문 170~190페이지)는 이 소설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당대 현실과 사회의 보편적 원리에 대한 발자크의 날카로운 통찰을 드러내고 있다. 모르소프 부인이 단지 연애 드라마의 주인공일 뿐 아니라 높은 수준의 지성의 소유자임을 알려 준다. 등장인물들이 갖고 있는 이런 입체적인 모습이 리얼리즘 소설의 거장으로서 발자크의 흔들리지 않는 평가를 유지하게 하는 비결일 것이다.
이 작품은 작자의 청년시절의 애인 베르니 부인을 모델로 한 소설로서, 자서전적 요소가 많다. 소설의 무대도 작자가 좋아하는 풍경으로 이루지 못하는 꿈을 그리는 30대 여인의 마음과, 청년의 감정이 정열적인 필치로 잘 표현되어 있다.
아름다운 육체와 순결한 마음을 가진 모르소프 부인은 앙드로 강(江) 골짜기의 흰 백합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나 그녀의 정숙하고 지고지순한 덕은 단순히 종교적인 색채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부인은 난폭한 남편과 병약한 자식을 돌보면서 펠릭스의 사랑으로 쾌락에 눈을 뜨고 괴로워하지만, 결국 그에게 순결한 사랑을 보여주고 죽음을 택한다. 이 소설은 ‘정신적인 사랑’이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낭만주의적인 성향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발자크는 당시 사회에 살고 있던 인간의 전형을 그려내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 그는 소설에 등장하는 한 사람의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묘사하고 환경에서 그 특성을 밝혀가고 있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가구들과 벽지까지도 자상하고 면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또한 그 인물의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서 작중 인물의 직업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경우도 보게 된다. 그는 작중 인물들에게 제각기 무언가 격력한 정열이나 광기를 부여하고 예민한 관찰력에 바탕을 둔 상상력에 의해서 인물들에다 강렬한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으제니 그랑데'의 금전에의 집착에서 오는 인색함, '시골 의사'의 헌신, '고리오 영감' 부성애, '사촌 베뜨'의 질투 등은 좋은 예이다. 발자크에 있어서 사실주의는 세계를 구성하고 움직이는 새로운 여러 가지 구조들에 대한 놀라운 직관이라고 할 수 있다.
『골짜기의 백합』은 잘못된 역어이며 〈은방울꽃〉이라 번역해야 한다는 주장이 전부터 있었다. '골짜기의 백합'이라는 표현 자체는 구약성서에서 기인한다. 프랑스어의 'le lys dans la valle', 영어의 'lily of the valley' 모두 이것을 번역해서 차용했다. 식물도감에서라면 이것을 〈은방울꽃〉이라고 번역할 도리밖에 없다. 그러나 이 소설의 제목을 그렇게 번역하면, 본문 속에서 수십 차례 강조되면서 등장하는 〈골짜기〉, 그리고 〈백합〉이라는 낱말의 울림이 제목과 무관한 것이 되어 버린다. 다른 것도 아니고, 여주인공이 사는 곳이 〈골짜기〉이고, 여주인공이 <백합>이다. 이것을 〈은방울꽃〉이라고 번역하면 어색해진다. 그래서 은방울꽃에 대해 다른 말(Maiglöckchen )을 사용하는 독일에서도 이 책의 제목을 『골짜기의 백합』(Die Lilie im Tal)이라고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프랑스의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 1799~1850)는 1799년 투르에서 태어났다. 신경질적인 어머니의 냉대를 받으며 고독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나중에 파리에서 법률 사무소의 견습생으로 일하다가 20세 때 글로 출세하겠다고 선언한 뒤 2년간의 유예 기간을 받아 비극을 집필했으나 가망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생계를 위해 익명으로 통속 소설을 썼다. 또한 경제적인 안정을 꾀하기 위해 출판업, 인쇄업, 활자주조업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업에 착수했으나, 모조리 실패해 약 6만 프랑의 빚을 평생 동안 짊어지게 되었다. 30세 때 새로운 결의로 써낸 역사 소설 『올빼미당』(1829)으로 데뷔했다.그는 죽을 때까지 약 20년 동안 진한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켜면서 하루에 많을 때는 18시간, 평균적으로 12시간씩 일하며 소설 · 희곡 · 평론 · 잡문 등을 아우르는 초인적인 집필 활동을 했다. 1834년 『고리오 영감』을 집필하면서 ‘인물 재등장’이라는 방법을 고안했고, 이윽고 ‘19세기 프랑스 사회사’를 묘사한다는 의도를 체계화하기 위해 모든 소설 작품을 하나의 종합적 제목인 ‘인간희극’각주주) 안으로 끌어들이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인간희극』은 프랑스 전국을 무대로 하여 활약하는 약 2,000명의 등장인물과 함께 장편과 단편을 합쳐 약 90편의 소설을 포함한 방대한 소설집이 되었다. 대표작으로 『골짜기의 백합』(1844), 『외제니 그랑데』(1833), 『사촌 누이 베트』(1846) 등이 있다.각주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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