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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청춘을 돈과 바꾸겠다니

by 언덕에서 2014. 11. 14.

 

 

 

 

청춘을 돈과 바꾸겠다니

 

 

 

 

 

 

 

호사다마(好事多魔). 좋은 일이 많으면 나쁜 일이 생기는 법이다. IMF로 상징되었던 그해, 좋은 일은 끝나고 나쁜 일이 몰리기 시작했다.

 흔히들 직장생활의 운(運)은 좋은 상사를 만나는 데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초급 사원 시절에는 좋은 상사를 만나는 것이 얼마간 중요하겠지만, 부하를 거느리는 상사 자리에서는 좋은 부하를 만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 평소 나의 생각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무슨 경제개발계획에 의해 철강공업의 다각적인 전략이 인정되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진 동해안의 제철공장에서 설립한 공대를 졸업한 부하 직원이 있었다. 서글서글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하나를 지시하면 두세 가지를 만들어 오는 능력이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 반드시 고쳐야만 할 단점이 있었다. 근태(勤怠) 문제였다. 아침에 직원들을 모아 놓고 조회나 회의를 하려고 하면 항상 보이지 않는 이가 그였다. 그러다 업무가 시작된 후 30분 정도가 지나면 머리를 숙이며 살짝 자리에 앉아 항상 늦게 근무를 시작하는 그를 쳐다보는 것은 고역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IMF가 오기 전 그때도 나는 부하 직원에게 질책하거나 문제를 지적하면서 개선을 도모하는 것보다 칭찬을 통한 레벌 업(Level - up)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부류다. 그래서 작성한 서류나 업무 진척사항을 보면서 부족한 부분에 대한 지적보다는 잘한 부분을 칭찬하면서 업무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고 있었다. 당시 내가 몸담았던 회사의 대부분 간부가 부하 직원에게 딱딱하고 일방적인 지시로 업무를 진행하며 자신의 지시 사항에 맞지 않으면 냉정하고 비인간적으로 야단치기 일쑤였지만 적어도 '나' 하나만은 그러지 말자고 다짐했다. 직장 관계는 순간이겠지만 인간관계는 영원하다는 철칙 같은 것을 믿고 있었고, 사람이 인격이지 직급 자체가 인격은 아니라는 믿음도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든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만든다는 지도력은 어느 부분에서는 얼마간의 장점이 되겠지만 다양하고 개성이 많은 신세대 부하직원들에게는 다소 문제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데서 배(船)가 조금씩 새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내가 알게 모르게 거의 매일 지각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를 불러 조용히 타일렀는데 매우 죄송해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원인은 술이었다. 타 부하 직원들의 말을 들어보니 그는 거의 매일 밤 인사불성에 이를 지경까지 폭음하는 특이한 직원이었다. 나는 빈한한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주말에는 해변에서 윈드서핑을 즐기는 신세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 그는 공장 내의 기숙사에서 생활 중이었는데 어떤 날 아침은 내가 직접 그의 기숙사 방까지 가서 술이 덜 깬 그를 사무실로 데려와 출근시킨 경우도 있었다.

 IMF가 터지던 그해 10월 초순의 어느 날, 잔업 수당 반납은 물론이고 휴일에도 아침 일찍 출근하여 풍전등화와도 같은 회사를 살려보려 몸부림치던 일요일 아침이었다. 그날도 출근 체크를 해보니 그는 자리에 없었다. 이후 한 시간 정도가 지나서 전화가 왔다. 출근하다가 운전 중 접촉사고가 나서 경찰서에 있는데 처리하고 오후에 회사에 도착하겠다고 했다. 이후 오후에 다시 전화가 왔는데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기가 막혔다.


전날 밤에 의사인 친구와 밤새워 술을 마시다 병원의 레지던트 숙소에서 함께 자게 되었고 다음날 아침, 그날따라 새벽에 잠이 깼다. 좀 더 잘 수 있었으나 항상 지각하여 부서원들에게 미안한 마음 때문에 일찍 친구 집을 나와 운전대를 잡았다. 새벽 6시경 회사를 향해 강변의 안개 낀 도로 위를 운전하다가 도로 위 쓰레기를 치우는 환경미화원을 치고 말았다. 운전석에서 충돌을 느끼고 차에서 내려 쓰러진 사람을 살펴보니 즉사한 상태였다. 이어서 119구급차와 경찰순찰차가 도착하고 즉시 구속되었다.


 그날 저녁, 해당 경찰서에서 겨우 그를 면회할 수 있었다. 구속 당시 혈중 알코올이 면허취소 수치라고 경찰관은 말했다. 늦은 밤 자정을 넘긴 후로도 술을 마셨고 3시간 정도 수면 후 다시 운전했으니 숙취 상태의 혈중알코올농도가 높았고 안개 낀 아침은 운전 중 시야 확보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내가 속한 부서의 담당 임원은 ‘그래도 사람을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며 내게 문제 해결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일단 구속을 정지시키고 피해자 가족들과 합의를 보게 한 후 그를 회사로 복귀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부하 직원의 가정은 결코 넉넉한 형편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의 부친은 노동일을 하고 있었고 모친은 호텔에서 청소일을 하고 있었다. 명문대를 나온 오빠 뒷바라지 때문인지 동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취업 준비 중이었다.

 나는 그의 부모를 만나 피해자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한 후 보상을 합의하라고 조언하며 문제 해결을 도모했다.

 그러나 다음날 사태는 더욱 복잡하게 꼬여있었다. 상가(喪家)에 간 부하 직원 즉 가해자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공대 출신의 엘리트니 사람 살리는 셈 치고 봐달라고 말한 것이 피해자 가족들을 분노케 했다. 피해자의 아들은 당시 우리가 근무하던 회사와 같은 계열의 선박 제조회사 현장에 근무하는 생산직 사원이었는데 결혼식을 일주일 앞두고 아버지가 윤화(輪禍)로 사망하는 변을 당한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이랬다. 청소원으로 평생을 힘들게 살았으며 아들을 많이 공부시키지 못하여 조선소 현장 노동자로 보낸 아버지는 그 아들의 결혼을 일주일 앞두고 일터인 새벽 거리에서 술이 덜 깬 청년이 모는 차에 즉사한 것이었다. 게다가 가해자의 아버지는 고인의 빈소에 와서 자신의 아들이 ○○공대 출신 엘리트 운운한 것이다. 피해자 아들은 아버지를 이렇게 만든 이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며 ‘합의’는 있을 수 없고 법이 정하는 최대한도의 형을 받게 만들겠다며 눈물을 흘렸다.

 '죄는 밉지만, 인간을 미워할 순 없다.'

 피해자 아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려고 나는 그가 근무하는 조선소로 발길을 옮겼다. 피해자 아들의 상사(上司)에게 설득을 요청할 참이었다. 가해자의 고의성이 없고 젊은이의 장래를 생각해서라도 합의를 해주도록 상사가 설득하면 행여 마음이 바뀌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이가 나보다 20살은 더 많아 보이는 조선소의 과장은 머리를 흔들었다.

 “과장님 보세요. 그러잖아도 전화를 받고 상가(喪家)에서 제가 설득을 했어요.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살아있는 사람은 살려야 하니 합의를 해주는 게 어떠냐고, 그리고 고의성도 없었잖아요. 술 많이 마신 후 다음날 음주측정계를 불면 숙취로 누구라도 그런 음주 수치가 나올 수 있는 것이고. 그런데 그 친구는 안 된다고 해요. 불쌍한 아버지를 저렇게 죽게 한 이를 용서할 수 없다는 거죠. 그리고 가해자 아버지가 유족들을 너무 자극했어요. ○○공대 출신이라고 자랑을 않나, 직급이 주임이라고 떠들지 않나, 공고 졸업한 그는 피눈물이 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쟤는 노조위원이기 때문에 내가 이래저래 제어할 수 있는 친구도 아녜요.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빈손으로 돌아온 나는 한숨이 났다. 그간의 결과를 보고하니 내가 오매불망 존경하던 임원은 드디어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당신 아니면 누가 쟤를 살려요? 이대로 두 면 쟤는 전과자 되고 끝장 아니오?”


 이후 몇 달이 지나 부하 직원의 가족은 피해자 가족과 합의를 했고 법원에서 다시 재판이 열렸다. 그 사건으로 인해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찰서에 가보았으며 구치소, 법원의 재판정(裁判廷)까지 구경하게 되었다. 검사의 구형이 있고 변호사의 변론이 끝난 후 판사가 선고했다.

 “피고는 ○○공대를 졸업하고 ○○차에 근무하는 재원으로 음주 수취가 높다고는 하나 얼마간의 수면을 과신한 탓도 있다. 피해자와 원만한 합의를 했고 반성을 깊이 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여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한다.”

 위와 같은 대략의 선고 내용을 기억한다.

 그러나 본부장의 선처 요청에도 불구하고 대표이사는 그의 파면을 결정했다. 나의 상사인 담당 임원은 재계약 대상에서 제외되어 회사를 떠났고 나는 부하직원 관리 소홀이라는 이유로 중징계를 받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출소(出所)한 그로부터 연락이 왔다. 출감(出監) 인사를 하겠다고 했는데 손에는 그의 모친이 보낸 작은 선물이 들려져 있었다. 석방하느라고 백방으로 노력하고 애써주어서 고맙다는 전언이었다. 나는 받을 수 없노라고 손사래를 쳤다. 그들 모자에게는 잔인했겠지만, 그 부하 직원으로 인해 회사의 구설에 자주 오르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부하 직원이 회사를 관두었는데 상사는 이후 선물까지 받았다는 소문은 뻔한 것이었다.

 그 때문인지 모르겠다. 소주를 두어 잔 마신 상태의 그는 내게 따지기 시작했다.

 “저희 부모님에게 하신 행동은 너무 하셨습니다.”

 “무슨 내용을 말하는 거지?”

 “피해자와 합의를 보라고 권유하신 거 말입니다.”

 “그러면 3년 동안을 감옥에서 지낼 생각이었어?”

 “합의금 삼천만 원은 우리 집 전 재산입니다. 전세금이었는데 이제는 월세 집으로 내려앉았고요.”

 “그러면 그 돈 때문에 3년을 감옥에서 썩겠다는 말인가? 전도양양한 젊은 사람이?”

 “구치소. 알고 보면 그곳도 그런대로 지낼만한 곳입니다.”

 “…….”

 그날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아까운 청춘을 돈과 바꾸겠다니. 이후로 그를 만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우리는 인간인 이상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고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재도약을 하게 된다. 그래서 패자의 서사는 불가피하게 분산과 수모, 파편화와 해체의 이야기를 담은 후 반전한다. 어디에서나 패자의 서사를 아름답게 하는 것은 다시 자기를 추슬러 통합적 인격에 도달하려는 인물들의 고결성이다. 본심은 아니었다고 믿고 싶지만, 자신을 위해 애써다가 불의의 피해를 본 사람들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렇게 해서 IMF를 맞은 잔인한 그해는 저물고 있었다.

 

 

- 월간 소식지 『맑고 향기롭게』 2016. 5월호 게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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