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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항상 우리 곁에 있는 죽음

by 언덕에서 2014. 11. 28.

 

 

 

항상 우리 곁에 있는 죽음 

 

 

 

 

 

 

                                                                    

사람이 살다 보면 위험하게 생명의 고비를 넘길 때가 있다. 우연히 신문에서 어느 명사가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경우를 칼럼으로 쓴 것을 보고 나도 그런 적이 있었던가 하고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나는 죽을 뻔한 고비를 딱 세 번 우발적으로 당했다. 남들처럼 불치의 병에서 회복되어 살아났다는 그런 영웅적인 투병 경험은 아니지만 내가 비명횡사할 뻔한 첫 번째 기억은 군에서 제대한 이듬해 여름 방학 때였다.

 동아리 멤버의 누님 부부가 사는 가덕도라는 섬에 친구들과 함께 2박 3일의 일정으로 이른바 여름 캠핑을 간 적이 있다. 더위를 식히느라 물에 들어갔다가 발을 헛디뎌 깊숙한 곳에 빠지는 바람에 물귀신을 될 뻔했다. 다행히 그곳에 주재하던 해양경찰이 실신 상태의 나를 건진 후 인공호흡을 하여 겨우 살려 놓은 것이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 중에는 에드가 케이시(1877~1945)식의 전생을 언급하는 이야기 서두에 등장하고, 정신과 의사인 김영우 박사가 소개한 전생퇴행에 관한 책들을 읽어 들어보아도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이 죽게 되면 영혼이 빠져나와서 천장에서 방바닥 쪽을 내려다본다는 것이다. 이른바 임사체험(臨死體驗)과 유체이탈(遺體離脫)이 그것인데 병원에서 사망하게 되는 경우 형광등이 붙어 있는 천장에서 죽은 자신의 모습과 울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게 되고 이후 영혼은 다음 세상으로 간다는 이야기인데 나는 그러한 내용을 믿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물에 빠져 의식을 잃어 거의 죽어가던 그 날, 바다 위에서 물에 빠진 나를 내려다보아야 했는데 그런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발을 헛디딘 순간 "사람 살려!"’하고 외쳐야 했으나 갑자기 물이 입에 들어오니 미처 소리를 지르지 못했다. 물이 코와 입으로 계속 들어옴을 느끼는 순간‘아, 이렇게 해서 죽는구나’를 절감했던 아찔한 날이었다. 나는 이후 지인들에게 그 사건을 자주 이야기하곤 했는데 모두 내게 “그러니 당신은 지금 덤으로 살고 있군.”하며 놀라워한다.

 두 번째 죽을 뻔한 순간은 출근하다 발생했다.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는 7.4제 라는 것을 실시하고 있었다. 설명하자면 서양식의 출퇴근시간제인 ‘9 to 6제’를 탈피하여 7시에 출근하여 5시에 퇴근하자는 제도를 의미였는데, 이는 발상을 바꾸어 새로운 것을 창조해보자는 사주의 강한 의지가 담긴 결과였다. 그러나 그 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야 말았다. 9.6제에서도 9시에 출근하여 6시에 퇴근하지 되지 못하고 11시에 퇴근하던 마당에 출근 시간만 두 시간 당겨놓은 결과는 이미 예견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른바 '7 to 11'이 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강철 같은 투지와 체력으로 버티던 젊은 시절이었다. 어쨌든 7시에 출근하기 위해서는 매일 다섯 시에 일어나야만 했다. 당시 회사는 부산의 변두리 바닷가에 새로 지은 자동차 공장으로 집에서 그곳까지의 거리는 무려 30km의 거리였기에 씻고 밥 먹고 서류 챙겨서 집을 나와서 회사에 도착하면 6시 30분이 되도록 해야만 했다. 게다가 나는 정시보다 한 시간은 일찍 출근해서 근무 준비를 하는 것이 회사에 대한 예의라고 지켜오던 터라 다른 사람들보다 30분은 더 일찍 출근하고 있었다.

 그날 새벽 5시 30분경, 새벽 일찍 운전대를 잡고 출근하는 중이었다. 2차선 차로를 물고 고속도로 나들목에 진입하려던 순간 반대 차로에서 차선을 무시한 덤프트럭이 중앙선을 침범하여 내 차를 향해 순간 돌진했다. 놀란 나는 급히 차를 우회전시켰는데 그 덤프트럭은 내차를 아슬아슬하게 비켜 그대로 반대 차선 옆의 가로등을 들이받고 말았다.

 새벽이어서 도로에 차가 없어서 내가 마음 놓고 차를 우회전시킬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옆 차선에 차들이 있었으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납작한 상태로 황천길을 갔을 것이다. 이후 119구조차가 오고 경찰차가 당도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회사로 향했다. 저녁에 TV를 통해 지역뉴스를 보니 가로등과 전신주를 들이받는 고장 난 덤프트럭 운전사는 충돌 이후 크게 다친 것으로 보도되었다. 아마 내가 덤프트럭을 피해 급히 우회전해서 피하지 않았다면 그날 나는 즉사했을 것이다.

 세 번째 기억은 이렇다.

 몇 년 전 아내와 딸아이를 태우고 고속도로를 가다가 룸미러 창이 뒤차의 앞 얼굴(라디에이터 그릴)로 꽉 차 있는 것을 보았다. 3차선이었는데도 시속 120km의 속도였고 앞차와 내 차와의 거리는 2m가 채 되지 않았다. 뒤차는 가스를 실은 대형 탱크로리 트럭이었다. 비상등을 누르고 클랙슨을 눌렀지만, 뒤차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차를 추돌할 기세였다. 짐작건대 그 차 운전사는 졸음운전 중인 것 같다. 급기야 나는 앞차를 추돌하지 않기 위해서 급브레이크를 밟아야만 했다. 졸다가 놀란 뒤차 운전사 역시 급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그 차는 회전하여 3개 차선도로를 차지하고 말았다. 그 차를 따라오는 뒤차들이 있었다면 굉장한 대형사고가 날 뻔했다. 그날의 사건은 구사일생이라 표현해야 맞을 것 같다. 내가 죽는 것은 그럴 수 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채 피지도 못한 어린 딸아이에게 변고가 생기지 않은 것은 천지신명께 감사할 일이다.

 어쨌든 그 사건 이후로 언제든지 찾아올 죽음에 대해 본격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위기를 함께 했던 아내도 공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내가 죽거든, 매장하여 후대가 사용해야 할 국토를 점유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화장(火葬)해 달라, 수의(壽衣)를 입히거나 화장(化粧)을 하지 말고 평소 즐겨 입는 옷차림으로 입관(入棺)해 달라, 장례식은 친한 친지만 연락하며 지나칠 정도로 최대한 검소하게 해 달라, 불치병에 걸려 회생 가능성이 없으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하지 않고 존엄사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등의 요망 사항을 가족에게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 이후 장기기증 서약을 하게 되었다.

 10만 년에 달하는 인류 역사 중 최근 수백 년을 제외하면 인간의 평균 수명이 항상 30세 이하였다. 로마 제국 시민의 평균 수명은 28세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고 한다. 늙기 전에 죽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는 이야기다. 사실 인류 역사 대부분의 기간 죽음은 나이와 뚜렷한 연관성 없이 날마다 남녀노소가 접하는 위험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16세기 후반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사상가인 몽테뉴는 그 시대 말엽의 사회상을 관찰하고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노령으로 죽는 것은 드물고, 특이하고, 놀라운 현상이다. 다른 형태의 죽음보다 훨씬 부자연스럽다. 그것은 그야말로 마지막 남은 극단적인 형태의 죽음이다.”

 그러나 의학의 발달로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평균 수명이 80세가 넘은 지금 이 시점, 우리는 정해진 시간을 굉장히 초과해서 사는 특이한 삶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의학자들이나 생명과학자들이 연구하는 노화라는 현상은 결국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기보다 부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아직 많이 늙지 않은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은 경박해 보일지 모르나 우리의 죽음을 그 누구도 예견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젠 자녀들도 세상 물정을 대략 알 수 있는 정도로 성장했으니 이런 나의 희망 사항을 합리적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어차피 유한한 인생을 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거론해야 할 사항이고 ‘넘어야 할 산’ 같은 문제이기에 정면으로 대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정리를 해 둔 것은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 생각해본다.

 

- 월간 소식지 『맑고 향기롭게』 2016. 7월호 게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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