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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희곡

체호프 희곡 『숲귀신(призрак леса)』

by 언덕에서 2014. 7. 24.

 

체호프 희곡 『숲귀신(призрак леса)』

 

 

 

러시아 극작가·소설가 안톤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1860∼1904)의 희곡으로 1889년 초연되었다. 희곡 『숲귀신』은 러시아의 어느 조용한 전원에 퇴임한 유명 교수가 젊은 둘째 아내와 쉬러 오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작품이다. 체호프의 4대 희곡 중 하나인 <바냐 아저씨>의 전신으로 잘 알려진 이 작품은 권력과 사랑 사이에 놓인 인물들의 갈등을 그려낸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숲의 수호신>, <숲의 정령>이라는 제목으로도 소개되었다.
 1889년 아브라모프극장에서 초연한 『숲귀신』은 당시 참혹한 실패를 겪었으며, 채호프는 모든 출판과 공연에 대한 금지령을 내린 뒤 10년간 대대적으로 수정했다. 이 희곡의 공연은 1889년 초연 당시 참혹한 실패를 겪었고, 체호프는 이 작품을 각색해 10년 후 『바냐 아저씨』(1897년)라는 걸출한 성공작을 탄생시켰다.

 이런 연유로 이야기 기본 구조와 등장인물 성격 등은 『바냐 아저씨』와 비슷하지만, 이고리의 자살 시도가 미수가 아닌 죽음으로 이어지고 엘레나의 미래도 바뀌는 등 전개와 결말이 다르다. 소냐가 못생긴 처녀가 아닌 아름다운 처녀로 나오는 점도 흥미롭다. 『바냐 아저씨』는 시골 영지에서 조카 소냐와 함께 농사를 짓고 살던 주인공 바냐가 시골로 내려온 매부 세레브랴코프 교수와 그의 후처 옐레나와 함께 살면서 벌어지는 질투와 환멸의 드라마다. 일면 『숲귀신』은 『바냐 아저씨』와 극적 구조는 흡사하다. 하지만 ‘삶은 어둡고 힘들지만 살아내야 한다’는 『바냐 아저씨』와 달리 '허무한 삶은 끝내는 게 마땅하고, 산 사람은 우습게도 그냥 살아가야 한다'는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결말이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890년 러시아의 시골 마을이 배경이다.

 조용하고 한가한 러시아 전원에 퇴임한 유명교수가 그의 젊은 둘째 아내 엘레나와 함께 자신의 영지에 쉬러오면서 그곳이 떠들썩해 진다. 시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저명한 퇴임교수 알렉산드르 세례브랴코프가 두 번째 부인인 27살의 아름다운 옐레나와 함께 등장하면서 보이지 않던 인간의 갈등 관계가 노출되기 시작한다.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은 이 부부를 놓고 마을 사람들의 색안경을 낀 해석이 잇따른다. 특히 교수 전처의 오빠인 47세의 이고리는 옐레나를 짝사랑하며 심각한 상사병을 앓게 되고, 마을 남자들 대다수도 옐레나에 추파를 던진다. 또한 마을 남자들 대부분 그녀의 도시적인 세련됨과 미모에 반하게 된다.

 이고리의 구애는 도를 넘어서게 되고, 이를 경멸하는 숲귀신 흐루쇼프는 숲을 지킬 것을, 도덕을 지킬 것을 요구하지만, 옐레나의 영향력에 기운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이고리의 고뇌는 자신이 일군 영지를 매각하려는 교수와 충돌한다.

 어느날 교수가 이 영지를 팔고 핀란드에 별장을 살 것을 제안한다. 이고리는 늙은 어머니와 자신은 어디서 살라는 얘기냐며 교수에 대한 증오와 자신의 못 이룬 사랑에 대한 자괴감에 시달리다 결국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마을은 이고리의 자살사건으로 풍비박산이 나고, 옐레나는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로 인해 어느 오두막에 숨어 지낸다, 하지만 교수 부인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운명을 자각한 옐레나는 마을로 돌아와 주민들과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삶을 살아간다.

 

안톤 체호프( Anton Pavlovich Chekhov.1860 &sim; 1904)

 

 체호프는 연극인들 사이에선 셰익스피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양대 극작가로 꼽히지만, 일반인들에게 그의 작품은 아직도 난해하고 생소한 존재다. 체호프는 ‘갈매기’ ‘세 자매’ ‘숲귀신’ 등 자신의 희곡 앞에 ‘4막짜리 코미디’란 문구를 적어두었다. 이들 작품은 코미디가 아니다. 하지만 체호프는 한 발 떨어져 객관적으로 바라본 삶은 모두 코미디라고 본 것이다. 오래전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최불암 시리즈' 유머처럼 썰렁함과 허무함이 떠돈다. 『숲귀신』에서도 코미디 같은 일이 자주 벌어진다. 부잣집 도련님 졸투힌의 생일파티에 3시간이 지나도록 손님이 단 세 명밖에 오지 않았다. 또 늙은 교수는 다리 통풍 때문에 젊은 둘째부인과 성관계가 힘들다. 모두 당사자에게는 비극이지만, 남이 보면 웃긴 얘기다. 아마도 체호프는 모든 삶의 속성이 그렇다는 걸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작품을 읽노라면 체호프의 작품이 대부분 그렇듯 뚜렷한 메시지를 주는 게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의사였던 체호프가 44살에 독일에서 폐결핵으로 죽어가면서 독일어로  ‘나는 죽는다’고 했을 정도로 코미디 같은 삶을 살았던 것처럼 이 작품은 부조리 투성이 인간을 비웃는 듯한 느낌을 준다.

 또한 『숲귀신』에는 냉소가 넘쳐난다. 세례브랴코프 교수는 극의 주인공 이고리는 물론 심지어 딸인 소냐에게도 무시당하는 ‘혐오스런 늙은이’일 뿐이다. ‘왕따’신세에도 교수는 오랜 지인들을 시시하고 저질적인 이야기나 하는 사람들로 치부한다. 방탕한 생활에도 여유 있게 잘사는 교수의 어릴 적 친구 이반의 모습은 삶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모순적이고도 코미디적인 인간 군상이다. 늙고 병든 남편에게 지겨움을 느끼고 애정도 없지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 옐레나는 새장 바깥의 자유로운 삶을 그리워하는 ‘카나리아의 행복’을  즐길 뿐이다.

 

 

 숲 보존의 인류적 가치를 운운해 『숲귀신』이란 별명이 붙은 흐루쇼프 역시 남의 말을 듣고 사람을 판단하는 오류를 범한 모순성을 지니고 있다. 어느 누구에게도 믿음이나 진실은 찾아보기 어렵다. 모두가 뒤틀려 있다. 그렇게 뒤틀려 있지만, 이들은 결국에는 화해하고 진실을 찾고, 용서하고 평화롭게 죽은 이고리를 잊은 채 그냥 또 살아간다.

 장황하고 러시아 문학 풍토에 어울리지 않게 우스꽝스러운 4막극 『숲귀신』은 나중에 많이 삭제되어 기적적인 예술에 의해 위대한 희곡 『바냐 아저씨』로 탈바꿈했다. 시골 장원의 목적 없는 삶을 훌륭히 파헤친 작품으로 개작한 이 작업은 1890~96년에 이루어졌다.

 연극에 남긴 체호프의 가장 큰 공적은 ‘연극답지 않은 연극’ㆍ‘실생활 그대로의 연극’ㆍ‘정서를 주로 하는 기분극(靜劇)’을 창조한 데 있다. 그의 연극은 독자적인 리얼리즘으로 무대예술에 획기적인 혁신을 가져왔다는 평을 받고 있다. 타계 110주년을 맞은  체호프의 작품이 연이어 연극 무대에 오르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스런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체호프의 위대한 점은 일상 대화로 문학을 만들었다는 점인데 어려우리란 편견을 버리고 일상으로 인생을 논하는 재미를 찾아보는 것이 작품의 감상 포인트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