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 신고
'친구'로 유명한 곽경택 감독의 영화 ‘똥개’에서 이런 장면이 나온다.
형사인 아버지(김갑수)가 낯선 고아 소녀(엄지원)를 집에 데려오며 비슷한 또래의 고교생 아들(정우성)에게 친남매처럼 지내라고 한다. 그러나 주인공(정우성)은 사사건건 자신의 생활에 간섭하는 그 소녀가 싫어진다. 그래서 어느 날 또 잔소리하는 소녀에게 생각 없는 한 마디를 짜증스레 내뱉고야 만다.
“니, 너거 집에 가라! 이 가시나야!”
고아로 자라온 소녀에게 이 말이 큰 상처가 됨은 물론이다.
화가 난 소녀가 이야기한다.
“니, 그거 밖에 안 되나? 이 씨발놈아!”
“…….”
“어릴 때 엄마가 바람이 나서 가출하고 아버지는 칼을 품고 엄마를 찾아다니다 죽었다. 그래서 나는 먼 친척 아주머니 집에서 자랐다……. 어느 해 어린이날, 친척 아주머니가 나를 예쁜 옷으로 갈아입히고는 어느 집 대문 앞에서 눈감고 100까지 헤아리라고 했다……. 시킨 대로 눈을 감고 100을 헤아린 후 무서워 눈을 떠야 하는데……. 그런데 눈을 뜨면 아주머니가 나를 두고 멀리 뛰어가는 게 보일까봐 눈을 못 뜨겠더라.…….”
코미디 풍의 영화였는데 이 장면이 너무 슬퍼서 나는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못살던 시절,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많은 부모님들에게도 경우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녀가 어릴 적 길에서 잃어버린 경험이 한 번 정도는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에는 백 명씩이나 되는 학급 인원 중에서 고아원 소속인 아이들이 한 학급에 늘 서너 명 있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못살아서 부모가 버렸을 경우가 많겠지만 길에서 우연히 길을 잃어 고아 아닌 고아가 된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내 어머니는 우리 삼형제가 유년 시절일 때 길에서 큰형을 잃어버린 이야기를 자주 하시곤 했다. 그 당시 도시의 변두리 극장에서 김지미, 최무룡이 주연으로 나왔던 ‘미워도 다시 한 번’이라는 영화를 이웃 아줌마들과 함께 보고 오다가 그 이웃들과 즐겁게 담소하는 틈에 네 살 어린 아이가 사라진 사건이었다. 집에서 3km 가량 떨어진 먼 거리에서 아이를 잃어버렸기에 젊은 새댁이 받은 충격은 실로 대단했던 것 같다. 하루 종일 찾다가 밤늦게 집근처 골목 어귀에서 겨우 찾았다는 것이다. 그런 일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어 이후에도 나들이 때 두 번이나 큰형을 길에서 잃어버린 아찔한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요즘도 TV를 보면 어릴 때 길을 잃어 고아가 되어 외국에 입양된 아이가 장성하여 부모를 찾는 장면을 흔히 대할 수 있다. 故 최진실이 주연으로 나와서 유명했던 실화 영화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이나 최근에 언론에 보도된 한국 입양아 출신 프랑스 통상장관 '펠르랭'도 그런 경우이다.
내게도 그런 일이 있었다. 그러니까 큰 아이가 네 살이던 해, 어느 토요일 오후로 기억한다. 평소처럼 오전 근무를 마치고 서점에 들러 휴일 읽을 책을 몇 권 사들고 집으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동네 어귀에 들어오니 어머니와 아내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길을 헤매고 있었다. 이유인 즉슨, 아들아이가 아침 일찍 말도 없이 집을 나갔는데 오후 네 시가 된 그 시간까지도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어서 찾아 나섰다는 것이다. 두 고부(姑婦)는 거의 울상이 된 얼굴이었다. 아들 녀석의 친구 집이나 유치원 등을 빠짐없이 들렀건만 아무도 애를 본 적이 없는 사실도 불안감을 더하게 만들었다.
문득 며칠 전에 있었던 아들아이가 부모에게 한 이야기가 내 뇌리를 스쳤다. 집으로 들어가는 동네 어귀 큰 골목에는 차가 한 대 다닐 정도의 길이 있는데 그곳은 지금도 여전히 ‘ㄱ’자의 급 커브길이다. 아들 녀석은 자신이 그 길 가운데로 급히 뛰어 갔는데 갑자기 녀석 앞으로 승용차가 ‘끽!’ 소리를 내면서 급정거를 하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운전사는 핸들에 머리를 묻고 한 동안 꼼짝하지 않았다고 했다. 놀랬기 때문일 것이다. 아내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사색이 되어 방구석에 놓여있던, 회초리 대신 사용하던 빗자루를 찾기 시작했다.
“이 자식아, 너 차에 치어 죽기 일보직전이었다!”
그 사건이 다시 생각나자 내게도 불안감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아내와 나는 파출소로 달려가서 유아실종 신고를 했으나, 담당 경찰관은 아직 날이 어두워지지 않았으니 좀더 찾아보자고 이야기하며 무전기에다 대고 뭐라고 이야기하며 우리 부부를 안심시켰다.
이윽고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나는 초조해져서 그야말로 미쳐버리는 느낌이었다. 아내는 이내 울먹이기 시작했고 나는 애꿎은 담배만 피우면서 동네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기를 계속했다. 드디어 나는 돌아가신 아버님 이름을 부르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평소에 믿지 않던 하느님께 몇 십번이고 기도를 했다.
“하느님 아버지, 제발 우리 아들 무사히 돌아오게 해주십시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앞으로 제게 일어날 어떤 대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부부가 길을 헤매는 동안 날은 많이 어두워졌다. 길에 있는 공중전화로 집에 있는 어머니에게 연락을 했으나 여전히 아이는 집에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다. 부부는 패닉 상태가 된 채 낙담하여 집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런데 걷는 중 뒤에서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뭔가 말하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피곤하고 신경이 날카로워진 탓이리라 생각했는데 뭔가가 들리고 있다는 느낌은 계속되었다.
“엄마, 아빠! 어디가노?”
뭔가 헛게 들리기 시작하니 갑자기 이제는 모든 게 막막하고 희망이 없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아내는 거의 실성한 듯했다. 그러다가 뭔가 작은 물체가 어둠 속에 우리 앞으로 갑자기 '톡' 튀어 들어왔다.
아들 녀석이었다.
“헤헤, 엄마 아빠! 어디 갔다 오는 거야?”
나는 너무도 감사해서 녀석을 부둥켜안고
“요 놈의 새끼! 주먹 만 한 새끼! 어디 갔다 이리 늦게 기어 들어오는 거야?”
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아내는 금시 정신이 돌아왔는지
“요놈의 자식, 삽살개 같은 자식, 너 오늘 매 맛 좀 봐야겠다. 너를 찾느라 여섯 시간 동안 동네를 미친 듯 헤맸다. 너 오늘 한 번 제대로 맞아봐라!”
이렇게 해서 그날 아들 녀석의 실종 사건은 막을 내렸다. 녀석은 근처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옆 동네 아이들과 해지는 것도 모르고 공놀이를 한 모양이었다. 부모가 놀라는 모습을 보고 녀석이 더 놀랐던 사건이다. 물론 아내와 나는 녀석이 무사히 돌아온데 대한 감사한 마음으로 말로만 겁을 주었을 뿐이다. 우리는 비폭력주의를 주장하는 가족이니깐. 아내의 말에 의하면 그날 밤, 내가 꿈을 꾸는지 계속 같은 내용의 잠꼬대를 하더라는 것이다.
“하이고 ~ 하느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 감사합니다!”
- 월간 소식지 『맑고 향기롭게』 2016. 9월호 게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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