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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예의에 관한 어느 기억

by 언덕에서 2014. 7. 11.

 

 

  예의에 관한 어느 기억

 

 

 

 

 

 

별셋상회에서 업무과장으로 근무 중인 B과장은 딱장대요 애주가요 찰진 독설가로 유명하다. 삼십대 후반인 그는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마시는 술 때문에 간이 나빠져서 얼굴에 젊은이다운 맛이란 약에 쓰려도 찾을 수 없을 뿐이고, 검은 빛깔의 시들고 거칠고 마르고 누렇게 뜬 품이 곰팡 슬은 굴비를 생각나게 한다.

술로 망가진 건 얼굴뿐만 아니라 매일 충혈 되어 있는 눈동자라든지, 쌀자루에 곡식이 가득 차 삐져나온 것을 연상시키는 볼록한 배라든지, 걸어 다닐 때 뒤뚱거리는 모습에서 벌써 늙어 가는 자취를 감출 길이 없다. 뾰족한 턱 위의 입을 앙다물고 안경 너머로 찣어진 눈이 상대방을 노릴 때엔 부하 직원들이 오싹 하고 몸서리를 치리만큼 그는 엄격하고 매서웠다.

이 B과장이 질겁하다시피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은 소위 지각하는 부하 직원들과 규정 근무시간에 맞춰 퇴근하는 부하들이다.  별셋상회라면 으레 일본식의 경영 방침을 교과서처럼 신봉하는 창업주의 원칙에 따라 군대보다 더 철저한 근태 원칙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그가 유독 부하들의 그런 행동을 싫어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일주일에 서너 번씩 지각을 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지각을 하니 부하 직원들까지 지각을 하면 상부에 문제점이 그대로 노출됨을 두려워하기 때문이 그 이유였다. 그가 정시에 퇴근하는 직원들을 미워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자신이 매일 지각하기 때문에 밤늦게까지 직원들을 잡아 놓아야 부서 전체가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보이기 위함이고, 둘째는 늦은 시간까지 직원들을 붙들어 두어야 수고했다는 명목으로 그들과 술을 마실 구실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거의 매일 지각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전날 마신 술이 깨지 않아서 아침에 제대로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부서는 항상 예산이 없어 그 흔한 회식 한번 하기 못한다고 여직원들은 불평이었다. 부서에 주어진 회의비나 식대를 B과장 혼자 술 마시는데 전용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가 술을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필름이 끊어질 때까지 술을 마셔야 한다는 점이다. 반대로 남자 직원들은 저녁에 그에게 붙들려 함께 술 마시는 곤욕을 치루지 않을 방법을 찾느라 오후가 되면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때문에 남녀 각각 5명씩으로 구성된 10명의 부서원들은 변변한 식사 한번 못하는 게 당연한 분위기로 알고 있었다.

오후 두시 경에 출근하는 그는 도착하자마자 가장 만만한 막내 여직원을 불러 닦달하기 시작한다.

“저를 부르셨어요?”

하고 묻는다.

“그래 불렀다. 왜!”

팍 무는 듯이 한마디 하고 나서 매우 못마땅한 것처럼 의자를 우당퉁탕 당겨서 철썩 주저앉았다가 여직원이 그저 서 있는 걸 보면,

“장승이냐? 왜 앉지를 못해!”

하고 또 소리를 빽 지르는 법이다.

상사와 여직원은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는다. 앉은 뒤에도,

“오늘 부가세 신고를 왜 늦게 했느냐, 이러고서도 월급을 받어!”

하며 고함에 가까운 톤으로 야단을 친다.

 마찬가지로 수출 외환 L/C개설을 담당한 하는 막내 남자 직원에게도 비슷한 이유로 괴롭히기 일쑤다.

 “보고서, 이거, 맞춤법이 틀린 거 알고 있나? 학교는 제대로 다녔어!”

하고 문초를 시작한다.

 금기야 한숨을 쉬며 재떨이나 결재판을 그를 향해 집어 던지기도 예사다.

 그가 정시에 출근하는 날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날에는 빠짐없이 점심시간에 낮술을 마신다. 소주 한 병은 기본이고 심할 때는 두 병을 마시는 날도 많다. 어떤 점심 시간에는 협력회사 간부와 식사를 하다가 만취한 B과장이 주사를 부려 손님을 폭행하고 식당의 기물을 파손하는 바람에 연락을 받은 Y대리가 회사 경비를 조개어 변상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건 그가 두려워하는 사람이 두 명 있다.

한 사람은 그의 직속 상사인 H부장이고 한 사람은 직속 부하인 Y대리다.

Y대리가 이 부서에 온 것은 3년 전이었다. 그 전에 B과장 수하에서 근무하던 괄괄하기 짝이 없던 T대리가 B과장의 근태와 업무태만을 문제 삼아 회사 감사실에 투서를 하는 바람에 H부장의 미움을 받아 지방의 의류창고 담당자로 좌천되어 주무 대리 자리가 공석이 된 이유로 신임 대리인 Y가 그 자리에 오게 된 것이다. 그러면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인재양성과 사업보국, 합리추구를 공식적으로 추구하는 별셋상회는 왜 그런 사람을 자르지 않고 자리에 앉혀주고 있었을까?

첫째는 은행과 관공서 등을 상대로 하는 B과장 부서의 업무가 Y대리의 분전에 힘입어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B과장의 상사인 H부장이 그의 고등학교 선배이며 인사권을 쥐고 있는 인사부장 역시 그의 고교 선배인 동시에 ROTC선배이기에 그들만의 리그에서 그는 타인의 시선을 아랑곳하기 않고 혼자만의 방종을 즐기는 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러한 B과장의 방탕한 소문이 회사에 돌 때마다 H부장이 야단을 치는 점은 B과장이 두려워하는 이유가 되었다. 대부분의 회사와 마찬가지로 직속 상사는 인사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B과장은 Y대리를 두려워했다. 부서 업무의 대부분을 눈에 꿰고 있는 그는 협력업체와 B과장이 어떤 거래를 하고 있으며 잦은 술자리의 대부분은 그들과 함께 이루어지고 향응과 뇌물이 오고 간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B과장과 협력업체의 간부들도 Y대리의 시선을 눈치채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주연은 은밀하고 비밀스러웠다. 만의 하나 Y대리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큰 약점을 잡히는 셈이어서 B과장은 유독 Y대리만은 자신의 테러 대상에서 열외시키고 있는 지도 몰랐다.

 

(*현진건 작 'B사감과 러브레터'를 패러디 했음을 밝힌다)

 

 

 

 

 

 위의 이야기는 내가 직장 생활 5년차이던 해에 실제 일어났던 이야기다. 눈치 빠른 분은 Y대리가 글쓴이임을 짐작하셨으리라.

 위의 사건을 겪으면서 이 년 후 나는 과장으로 진급이 되어 그룹 내 타 회사로 전출가게 되었다.  늦은 밤 회식 때문에 취한 상태라 운전하지 못하고 택시를 타고 귀가하던 중이었다. 택시의 라디오 음악에서 얼마 전에 사망한 故김현식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살아 생전 몇몇 마니아들에게만 유명가수였던 김현식은 사후에 레전드로 부활하여 집중적인 갈채를 받았다. 술김이지만 갑자기 그 이유가 궁금하여 “왜 그럴까요?” 하고 택시기사에게 물어보았다.

 기사는 대답했다.

“사람이 죽으면 더 이상 자신의 라이벌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죽은 사람에게 후한 마음을 가지는 게 아니겠어요?”

 내가 기대한 정답은 아니었지만 기사의 답은 나름 명쾌했다. 의외의 답변에 의표를 찔리는 기분이어서 술이 다 깨어버리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B과장이 생각났다. ROTC 출신인 그는 중증의 알코올중독자였다. 전날 마신 술이 깨지 않아 매일 오후 2시에 출근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출근 이후로는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특유의 '꼬장'을 부리는데 그것은 부하 직원들을 남보기도 민망하게 닦달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조그만 꼬투리라도 잡히면 부하 직원들을 비인간적으로 '깨고' 모욕하기 일쑤였다.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보상(Compensation) 심리가 공격적 행동으로 표출된 경우였다. 근태 불량 뿐만 아니라 요즘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협력업체 금품수수, 횡령, 향응, 근무 중 음주는 당연히 이루어지는 생활의 일부분이었다. 결국 그는 파면 당하여 중소기업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곳에서도 '쿠세'는 여전했다. 대낮에 만취하여 비틀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하고 길을 걷는 모습을 여러 번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의 부음 소식이 왔는데, 과음으로 인한 위암으로 40대 중반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었다. 문상을 갈까 생각했지만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다행히 나는 같은 그룹 내의 다른 회사로 옮겼지만 그로 인해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직장을 그만 둔 여러 동료들을 생각하니 도저히 그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함께 근무하면서 그로부터 많은 고통을 받았던 아픔의 앙금이 남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로 인해 인생이 망가진 선후배들에 대한 예의를 생각해서라도 문상을 가지 않겠다.”

 대부분의 동료들 역시 문상을 가지 않았지만 같은 부서의 직속 부하 직원이었던 나는 이후로 유독 몰인정한 인간이 되고 말았다.

 이유는 아무리 나쁜 인간일지라도 그래도 그가 죽었는데 '고인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매정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때 택시 기사로부터 들은 위의 말이 생각났다. 나를 탓한 사람들은 세상을 떠난 그가 '이제는 더 이상 라이벌이 아니므로 이제는 한없이 관대해지자'는 생각을 했을 것 같다. 그리고 현재는 내가 그들의 라이벌이니 더 그럴 것이다.

 우리가 이 지상에 태어나는 것은 우리 자신이 결정한 사항도, 선택한 사안도 아니다. 그러나 그 사실 때문에 삶에 대한 나의 책임, 당신의 책임, 우리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탄생은 내가 결정한 바 없고 선택한 바 없는 일이지만, 그러나 탄생 이후의 우리의 삶은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사건이다. 이것이 인간이 인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생각하는 가장 초보적인 사유의 과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인간이 선천적으로 이기적인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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