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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세 병정과 바람둥이

by 언덕에서 2014. 8. 8.

 

 

 

세 병정과 바람둥이 

 

 

 

 

 

 

앞에서 쓰려다 깜빡하고만 이야기들이 있다. 처음 ‘옛날의 금잔디’를 구상할 때 오늘 이야기도 많은 소재의 하나로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망설이다보니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망설인 이유는 '19금'의 이야기들이어서 행여 물의를 빚을지 모른다는 노파심 때문이었다. 어쨌든 써보도록 하겠다.

 

 

성(性)을 자동차의 운전에 비유한 사라 러딕의 말은 옳다. 자동차 운전석에 오르기 전에 대부분의 인간들은 여러 법규들의 정당함이나 자기 생명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한 번 운전석에 오르고 보면 어린애 같은 흥분과 쾌감에 그 모든 것을 종종 잊어버린다. 비정상적인 성(性)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에 빠지기 전에 부도덕한 행위의 위험을 잘 알고, 그로 인해 삶에 가해질 위해를 피하려는 결의를 가진다. 그러나 한 번 그것에 몰입해 버리면 대부분의 범인(凡人)들은 이내 비정한 쾌감과 잔인한 위기에 휘몰려 그 모든 것을 잊고야 만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믿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우려되지만 그래도 사실이므로 적어보도록 하겠다. 20대 중반일 때 아주 친한 친구로부터 들은 경험담이다. ‘옛날의 금잔디’을 쭉 읽으신 분이라면 기억력에 관한 한 글쓴이가 비상한 면이 있다고 인정하시리라 믿는다. 고3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친구가 있다. 그와 나는 비슷한 시기에 군 입대했는데 정확하게 3년이 지나서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복학한 우리는 그간의 고생을 위로하며 학교 앞 대폿집에서 회포를 풀었는데 그때 들은 이야기가 하도 특이해서 지금까지 또렷히 기억하고 있다. 1982년, 본적이 경남 김해인 나는 국민의 의무인 병역을 위해  창원의 ○○사단 신병교육대로 입소했다. 그리고 본적이 경북 성주인 친구 A는 경북 안동에 위치한 ○○사단 신교대(新敎隊)로 입영했다. 아래의 이야기는 친구 A에게 훈련소 입소 전날 밤부터 입소하는 당일 10시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그림 출처 : 글림작가의 세상바라기 ( http://blog.daum.net/e-klim )

 

 

 군 입대 영장은 경북 안동시에 위치한 향토사단에 해당일 오전 10시까지 입소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A는 해당 입소일 전날 부산을 출발하여 안동 시내에서 일박한 후 다음날 아침 식사 후 해당 사단에 입대하는 걸로 결정했다.

 그가 탄 시외버스는 밤 8시 경에 안동역에 도착했다. A는 저녁을 먹고 여관에서 잠을 청한 후 아침 8시 경에 일어나서 조식 후 군부대로 향하면 되겠다는 일정을 머릿속에 넣고 있었다. 역전의 낡은 식당에서 순댓국을 먹고 있는데 앞 탁자와 뒤 탁자에서 머리를 짧게 깎은 청년 둘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일이 입대일이니 다들 암담한 심경들이었을 것이다. 서로를 발견한 이들은 식사하다 누구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식사를 마친 셋은 자리를 의기투합하여 자리를 한 군데로 모아 소주와 안주를 추가 주문하여 한 병씩 마셔댔다. 알콜로 인해 얼추 얼얼하게 된 셋은 여관에 가서 자기로 했는데 이왕이면 돈을 아낄 겸 큰 방 하나를 얻기로 했다. 공식적인 건 아니지만 이미 입대 동기가 되었으니 말이다.

 안동역 앞에 위치한 여인숙의 가장 큰 방 하나를 얻은 셋은 여장을 풀고 이불과 요를 깐 뒤 잠을 청하려던 참이었다. 오십이 다되어가는 중년의 주인 여자가 방문을 두드리며 들어오더니

 “총각들, 예쁜 아가씨 불러 줄까?”

하는 것이었다.

 A는 완강히 주인의 제의를 거부했으나 B와 C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후 두 차례 방을 찾아온 주인의 제의에 동행을 무시하고 일방적인 주장을 했다는 생각에 A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B가 C에게 ‘그렇게 하면 어떻겠느냐’는 의사를 전했다.  C는 “내일이면 입대인데 마지막으로…….”하며 말끝을 흐렸다. 침묵하고 돌아서 누운 A도 어쩔 수 없이 방조한 셈이 되었다.

 주인 여자는 옆방이 비어 있으니 거기서 '그것을 하면 된다'고 말하며 B에게 일단 화대(花代)를 받았다. 10분 후 주인 여자가 다시 노크를 했다. 비어 있던 옆방에 방금 손님이 들어와 방이 모두 차버렸으니 화대를 돌려받는가 아니면 세 명이 묵고 있는 방에서 그 일을 하면 안 되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여자를 기다리며 소주를 마시던 B와 C는 만취한 탓인지 자신들의 방으로 여자를 불러들이기로 했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소위 ‘갈보’라고 불리는 여자가 방에 들어왔다. 세 사람이 떠드는 소리에 자고 있던 A마저 일어나 여자와 장정 셋이 소주를 마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C가 밖에서 사들고 왔던 소주 두 병이 금세 동이 났다. 술 때문이었을 것이다. 옷을 벗은 여자가 이부자리에 눕자 B가 그 몸 위로 올라갔다. 옆에 앉은 A와 C 중 A가 형광등 불을 끄려고 했으나 C가 제지했다.

 “그럴 필요가 있겠소. 내일이면 인생 끝인데.”

 그러다 보니 여자와 B가 관계를 갖는 동안에 A와 C는 옆에 나란히 앉아 정사 장면을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한 차례의 정사가 끝나자 여자는 옆에서 지켜보던 두 남자에게 말했다. 삼 년 전 결혼을 약속한 여자의 애인이 입대하여 몇 달 후 사고로 사망했다고 했다. 그런 연유로 군입대하는 세 명의 장정들에게 원하는 만큼의 관계를 허락하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잠시 후 C가 여자의 몸으로 올라갔다. A와 B는 옆에 앉아서 그 장면을 지켜보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윽고 그것이 끝나자 망설이던 A를 여자가 불렀다. 이번에는 B와 C는 구경을 하게 되었다. 군 입대라는 절망감이 상호간의 수치심을 없애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여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남자가 군 복무 중 죽었기 때문에 입대하는 병정들이 애처로워 보시(布施)한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날 밤 A, B, C 세 남자가 그 여자와 각각 세 번씩, 여자의 입장에서는 아홉 차례의 관계를 가졌다. 그렇게 하다 보니 새벽 세 시경이 되었고, 여자와 함께 안동 역전의 식당에서 해장국을 먹고 후 작별한 세 사람은 여관에 돌아와 짧은 잠을 잔 후에 군부대로 향했다. 군대에서의 만남이란 원래가 그런 거지만 훈련소 이후론 그들 서로간에 만날 길이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림 출처 : 글림작가의 세상바라기 ( http://blog.daum.net/e-klim )

 

 

 군 제대 후 복학하여 우연히 만나 그냥 아는 사이로 지내던 사회학과 박사 과정의 대학원 여학생이 있었다. 지인의 초등학교 동기로 나와 동갑이었는데 대학 졸업 후 조그마한 사회조사 기관에서 일하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대학원에 진학한 아가씨였다. 내가 대학 4학년일 때는 도시락을 싸다니기 뭣해서 학교 뒤편의 하숙집에서 상식(常食)을 했다. 하숙집에서 잠은 자지 않고 매일 점심 식사만 하는 경우 말이다. 아주머니의 음식 솜씨가 좋고 가격 또한 저렴해서 복학생이나 대학원생들이 자주 애용하는 곳이었는데 매일 점심 그곳에서 식사를 하다 보니 같은 상(床)에 앉는 멤버 네 명이 친해지게 되었다. 식사 후 학교 벤치로 돌아와서 자판기 커피를 한 잔 뽑아 마시는 게 상례(常例)였는데 공부하다 약간의 틈이 나면 신기한 경험담을 서로 공유하곤 했다. 화제가 빈곤했던 나는 용감하게도 친구 A로부터 들은 위의 이야기를 했다. 혼기가 된 27살의 나름 노련한 대학원생 아가씨는 나를 흘겨보면서 말했다.

 “그게 불가능할 걸요?”

 내가 물었다.

 “하하, 저와 가장 친한 친구가 실제로 겪은 일이라니깐, 근거가 뭡니까?”

 그녀는 대답했다.

 “○○씨, 나는 결혼을 안 한 처녀라서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그래도 알 건 다 알아요. 이런 일이 있었어요.”

내가 힐난하며 물었다.

 “사회학적인 이론이오? 아니면 심리학에서 말하는 프로이트 어쩌구 하는 곰팡이 냄새 나는 이야기겠지? 실제 현실과는 무관하면서 논리적으로 어쩌니 저쩌니하는 개떡 같은 이론들 말이요.”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호호, 아니라니깐, 지금부터 하는 내 이야기를 한 번 들어봐요. 나름대로 수긍 가는 점이 있을 수도 있으니.”

 그때 그녀가 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편의상 ‘그녀’가 이야기 한 내용을 그대로 옮겨 보도록 하겠다. 그러니까 아래의 이야기에서  일인칭을 사용하는 '나'라는 사람은 그 여자 대학원생이다. 

 

 

그림 출처 : 글림작가의 세상바라기 ( http://blog.daum.net/e-klim )

 

 

 졸업해도 취직이 어려운 사회학과는 춥고도 배고픈 학과이다. 대학을 졸업한 나는 모 신문사에서 운영하는 사회조사 기관에 어렵게 들어갔다. 맡은 일은 단순한 조사 업무를 취합하는 일이어서 부서원들 사이의 팀워크가 대단히 중요했다. 그런데 같은 부서의 업무 파트너 격인 남자 K씨가 있었는데 소문을 들어보니 여자관계가 복잡했다. 남자 직원들 사이의 풍문에 의하면 호색한(好色漢)이어서 치마만 두르면 동서노소(東西老小)를 가리지 않음은 물론이고 결혼을 했건 아니건 청탁물문(淸濁不問)으로 일단 마음을 정했다면 직접 육체 관계를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절륜의 정력가라는 것이다. 성(性)에 대해서 굉장히 관대하고 개방적인 생각을 갖고 있어서 눈만 떴다하면 오늘은 누구와 어떻게 관계를 가질까를 고민하는 미혼남이기도 했다. 그에게는 성(性) 관계가 인생의 즐거움이고 오락이며 유일한 생존 이유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느 날, 부서원이 식당에서 회식을 시작하는 참이었다. 남자 셋, 여자 셋 해서 여섯 명이 모였는데 주문한 음식은 나오지 않고 일단 소주와 맥주만 식탁에 놓여졌다. 음식을 기다리던 일행은 간단하게 맥주를 한 잔씩 하며 여담을 나누고 있었다.

 호색한인 K가 갑자기 입을 열더니 세상에는 이런 일도 있다는 식으로 옆에 앉은 남자 직원을 향해 자신의 발기불능을 탓하는 낯 간지러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있잖아요? 그게 안서는 일이 있었어요.”

 남자 직원이 또 시작이구나 하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하하, 천하의 색마(色魔)에게 우째 그런 일이?”

 듣다듣다 이런 민망한 이야기까지 듣게 되는구나, 이런 게 바로 직장 내 성희롱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내가 저지를 했다.

 “에이! K씨 그런 이야기하지 마라니깐, 뭐예요 이거! 아가씨들 앞에서.”

 K는 정색하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음담패설 하는 게 아니고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에게 가야하는 건지. 아니면 그럴 수도 있는 문제인지가 궁금해서 해보는 이야깁니다.”

 K의 이야기는 이랬다.

 호색한임을 자랑하는 그는 친구 3명과 모여 내기를 했다는 것이다. 내기를 제시한 친구 3명은 ‘타인들이 보는 앞에서 성관계는 절대 불가능하다, 타인이 두 남녀의 성관계를 지켜보고 있는 상태에서는 남자는 절대로 발기(勃起)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었고, K는 무슨 소리냐 그런 속설이 틀렸음을 내가 증명해보이겠다며 팽팽히 맞서다 결국은 내기를 걸게 되었다는 것이다. 절륜의 스태미나를 자랑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속설이었기 때문이다.

 회식 자리의 옆 남자 동료가 물었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되었소?”

 “내기에서 지고 말았죠.”

 “어떻게 해서 지게 되었다는 말인가요?”

 K와 그의 친구들은 시내 환락가의 모텔방 하나를 얻고 상당액수의 금액을 제공하여 다방 아가씨를 불렀다. 물론 자신들이 구상하고 있는 실험의 내용과 관찰자가 있음을 사전 고지한 상태였다.

 K는 사전에 자신만만했지만 실제 뚜껑을 열어보니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아! 수많은 여자들과 셀 수 없이 많은 관계를 가졌건만 친구 세 명이 지켜보고 있으니 그게 안 되더군요. 한 시간 동안 갖은 노력을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위의 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나를 향해 이야기했다.

 “이게 심리학적으로 어떻다, 정신 병리학적으로 어떠하다 할 문제는 아닌 것 같고요. ○○씨가 이야기한 친구의 경험담과 상반되는 것 같아서 저도 들은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뭐 굳이 이야기의 결론을 내려 보라고 한다면 그때 상황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게 아닐까요? 예를 들어 ○○씨 친구 분과 입대할 군인 둘은 3년 동안 군에서 썩어야 한다는 절망감이 심리적으로 내재해 있던 수치심을 무의식이 제거해버린 경우라고 할 수 있겠고요. 제 직장 동료 호색한의 경우는 성적인 욕구보다는 숨어있던 체면이나 도의심 같은 게 순간적으로 튀어 나온 경우가 아닐까 해요. 그래서 정신과 의사되기가 어려운 거죠. 정상인과 정신병자의 경계는 원래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자크 라캉도 주장한 거를 ○○씨도 알고 계시잖아요?” 

 세 병정에게 나타난 창녀의 이야기는 믿기 어려울 만치 비극적이고, 바람둥이의 이야기는 꺼꾸로 희극적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세 병정 이야기는 희극적이고, 바람둥이 이야기는 비극적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 최대의 편리성과 편의성을 도입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 경향은 쾌락추구의 경제학적 원리이다. 잘산다는 것은 적어도 쾌락만을 추구하는 삶은 아닐 것이다. 특히 성욕만이 유일한 관심사일 때 인간은 '베르제 선생의 강아지'와 비슷해진다. 프랑스 작가 아나톨 프랑스는 "베르제 선생의 작은 강아지는 하늘의 푸르름을 쳐다본 적이 없다.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는 요지의 말을 남기고 있다. 그 강아지에게는 푸른 하늘, 여름 저녁의 노을, 가을의 단풍, 눈 내린 숲의 아름다움은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 오늘의 길었던 이야기를 이젠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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