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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옛날의 금잔디

아들과의 만남

by 언덕에서 2014. 7. 4.

 

 

 

 

아들과의 만남

 

 

 

 

 

아이들이 자라 성인이 되니 키울 때 생겼을 다양한 사건들이 생각난다.

 나는 평소에도 입버릇처럼 자식이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부모에게 보여주었던 재롱과 귀여움을 밑천 삼아 평생을 부모 등골 빼먹으면 사는 존재이라고 지인들에게 이야기하곤 한다. 물론 나 자신도 예외가 아닌 모습으로 부모님에게 그랬을 것이다.

 

 

 큰 아이는 돌이 지났을 즈음에 할머니의 포대기에 업혀 있다가 몸을 지나치게 흔드는 바람에 창문의 유리창에 부딪혀 큰 상처를 입은 적이 있다. 피를 철철 흘리는 아기의 모습에서 내 어머니는 너무 놀라 한 동안 패닉 상태였고 때마침 퇴근해서 그 광경을 목격한 아내는 아기를 맨발로 안고 1km나 되는 병원까지 뛰어가서 급히 봉합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여파였는지 이후론 아들아이의 키가 자라지 않아 부모의 속을 태우게 만들었다. 내 키가 171cm이고 아내 역시 164cm 정도 되는데 아들아이는 고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반에서 맨 앞자리에 앉는 꼬마였고 작은 키 때문에 또래들에게 얻어맞고 다녔기에 안타까움은 더해만 갔다.


 큰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 역시 항상 걱정스런 마음에서 지켜보았던 기억뿐이다. 한 번은 유치원의 사정 때문에 등교 셔틀버스가 오지 못한 날이 있었다. 그날따라 아내가 조기 출근하는 바람에 내가 직접 아들아이를 데리고 유치원에 함께 가야만 했다. 유치원 문을 지나서 입구로 강당으로 함께 가는데 그곳에는 신발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이는 벗은 신발을 자발적으로 들고 신발장에 신발이 놓인 순서대로 가지런히 정리한 뒤 선생님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본 뒤 이유 없는 슬픔이 밀려와서 하루 종일 짠한 마음이었던 기억이 있다. 인간은 자유로워야 하는데 어린 나이부터 누구에겐가 강제 당한다는 애처로운 느낌 같은 심정 때문이었다. 맞벌이 하는 피곤한 샐러리맨 아버지가 아닌 부자집 아들로 태어났다면 저 애는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자괴감도 더해갔다.

 

 

 

 

 아이가 네 살이던 어느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길이었다. 집에서 가까운 유치원 앞길에는 봉고 버스가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가 주기 위해서 대기 중이었다. 갑자기 그 유치원이 아들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이란 생각이 들었다. 먼 거리는 아니었기에 모처럼 아이와 손을 잡고 함께 집으로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스무 명 가량의 어린 아이들과 유치원 선생님들이 뒤섞여 있는 인파 속에 뛰어 들었다. 그 속에서 녀석을 찾아 손을 꼭 잡고 함께 집으로 갈 요량이었다. 그러나 2 ~ 3분 동안 열심히 아들아이를 찾았지만 녀석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그놈이 그놈 같은 조무래기들 속에서 내 아이들 찾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아들을 찾기 못한 나는 집과 유치원까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므로 집에서 만나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 장소를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뭔가가 내 다리를 꼭 붙잡고 있었다. 이게 뭔가 하고 발 아래쪽을 보니 아들 녀석이 말없이 내 다리를 꼭 붙잡으며 서있었던 것이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가 내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는데 그게 뭐던가. 핏줄의 끌림이던가. 하늘의 선물이던가.

 나는 몇 해가 지나서도 그 날의 감격스러운 장면을 잊지 못했다. 내가 다니던 회사가 망하고 새로 전근간 회사의 전입 간부 교육 과정 중에서 '자신을 소개'하라는 교육 담당자의 요청에 나는 강단에서 위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일 주일 간의 교육 과정이 끝나자 많은 이들이 내게 전자 메일을 보내주었다. 내용은 내가 무척 따스한 사람으로 느껴졌으며 그날 내게 표현을 하지 않았지만 많이들 '울컥'했다는 내용들이었다.

 그래서 이후 노트에다 정성스레 그날의 느낌을 적어보기로 했다. 적다보니 한 편의 엉터리 시가 되고 말았다. 이 시는 회사 사보(社報)의 ‘사우(社友)의 시(詩)’ 란에 실리고 말았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아들과의 만남


네 살배기 아들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 앞의

옹기종기 모여 줄을 서서 셔틀버스를 타는 정거장에서

재작년에 머리를 다쳐서 피를 많이 흘려 언제나 얼굴이 창백한

내 아이들 찾느라 두리번거렸다.

“건주야, 아빠가 기다릴 테니 아빠를 찾을 수 있지?”

수십 명의 아이들, 그 얼굴이 그 얼굴인 조무래기들 속에서

나는 내 아이를 찾을 수 없었다.

막막해하며 돌아서는 무릎에 걸리는 작은 무게,

작고 파리한 아이는 내가 모르는 사이

나를 알아보고 내 다리를 꼭 붙잡고 있었다.

아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에서

나의 얼굴에는 눈물이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었다.

아이는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어깨에 맨 가방 양쪽 끈을 꽉 쥐고

“아빠, 왜 울어?”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아, 그것은 어린 아들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첫 마중.

 



 그러나 나의 기우(杞憂)와는 달리 고교 입학 이후론 키도 제법 자라주었고 10권의 이문열 삼국지를 거침 없이 독파하는 독서광 청소년이 되었다. 삼국지에 대한 장단점은 분명하겠지만 한 인간의 사고폭을 넓혀 준다는 점에서는 일독의 권장을 반대하는 편은 아니다. 컴퓨터 게임 하는 것보다야 훨씬 좋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놀란 것은 감성이 매우 풍부하여 평범한 사물이라도 예술적인 감성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발견되는 점이었다. 아들 녀석이 고교 1학년 때 방청소를 하다가 우연히 백지에다 낙서해 둔 것을 본 적이 있다. 내용이 인상적이어서 나는 즉시 노트에 옮겨 적어두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루


2006년

7월 8일

토요일

더운 날

피곤한 날


Lotte Giants

사직야구장

부산진고등학교

매점

모교 중앙중학교

동은학원

한솔독서실

우리집


그리고...

그리운

아, 그리고 ...

돌아가신 

옛날 우리 할머니집



 이건 너무 자의적(恣意的) 해석인 것은 알지만 내갈겨 쓴 낱말들의 배열 속에서 17살 소년의 인생 중 고단한 하루가 고스란히 담겨있을 뿐만 아니라 운율 또한 담겨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러니까 큰 아이가 고등학교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올라가려던 즈음으로 집에 잡지가 몇 권 배달되었다. 故 김재순씨가 만들고 故 법정스님이나 故 최인호 작가가 고정해서 글을 쓰던 ‘샘터’지에서 보낸 해당 월의 ‘샘터’지 6권과 원고료였는데 놀랍게도 녀석의 글이 독자 수필 란에 떡하니 게재되어 있었다.

 내용은 돌아가신 어머니, 그러니까 녀석의 할머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적어 놓은 것이었다. 나와 함께 그 글을 읽던 아내는

 “하느님만 믿다 가신 할머니의 사랑을 이렇게 많이 받으니 우리 건주의 미래는 축복이 넘칠 거예요.”

라며 눈물을 흘렸다.

 

 

 

 

 

 

 날라리 신자이지만 엄격히 말해서 나는 신을 믿으며 위대한 신의 은총에 깊이 감사하고 있지만 천성 게으른 탓에 그리고 죄를 저지르는 쾌감에 나이가 좀더 들면 나가리라, 나가서 죄를 씻으리라, 그때까지는 악과 친하리라 하는 얕은 이기주의로 '냉담자 종결일'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 아이가 맞이했던 작은 시련들은 보다 큰 영광을 열매 맺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을 굳게도 믿고 있다. 

 위대한 조물주가 내려다 본 세상의 인간들이란 먼지보다 가볍고 작은 존재가 아니겠는가. 어릴 때 인간은 자기를 낳아준 부모님의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며, 결혼해서 애를 낳으면 자신의 삶뿐 아니라 자식을 통해서 또 하나의 삶을 경험하는, 결론적으로 신은 다행히도 한 사람의 삶에서 세 가지의 생(生)을 부여하신 사실을 오늘도 나는 느끼고 있다.

 

 

 

  ☞샘터지에 실린 아들아이의 수필이다.  http://blog.daum.net/yoont3/11299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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