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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옛날의 금잔디

눈 오던 날 

by 언덕에서 2014. 6. 20.

 

 

 

 

눈 오던 날

 

 

 

 

 

 

 

아내가 임신한 것은 결혼하고 만 2년이 지난 후였다. 어느 날 아내가 자신이 임신한 것 같다고 귓속말하기에 나는 기쁘다기보다는 덤덤한 마음이 되어버렸다.

 ‘드디어 올 게 왔구나.’

 내 한 몸 간수하기도 힘들어 결혼한다는 게 언감생심이었는데 결혼을 하고나니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났다. 나처럼 부족한 사람이 과연 아버지가 될 자격이 있을까 하는 걱정이 더해 갔다. 아내는 틈만 나면 열 달 후 태어날 아기를 위해 아기 옷을 사고 목욕 도구다 뭐다를 장만하는 모양이었지만 나는 엉뚱하게도 태어날 이 아이를 내가 과연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근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우리가 살고 있던 동네 입구에는 작은 슈퍼가 하나 있었는데 아내는 그 집 앞을 지나칠 때마다 그 집 아이를 매일 정성스레 쳐다보았다. 그 집 아이는 유달리 살결이 곱고 눈이 크고 예쁜 아이로 기억하는데 아내는 자신의 그러한 행동이 태중의 아이에게도 전달된다고 믿는 눈치였다. 휴일 아침 어머니는 내게 시내에 있는 재래시장에 함께 갈 것을 명령했다. 임산부가 잉어 다린 즙을 먹으면 태중 아이의 피부가 우유처럼 희게 되고 눈망울이 잉어처럼 크고 맑게 된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나는 파평 윤씨가 잉어를 먹지 않는 전통을 모르시냐고 따졌지만 어머니는 나를 흘겨보시며 등짝을 때리셨다.

 “시끄럽다. 니 아이가 잘 생겨야 할 거 아니냐? 고릿적 이바구 하지마라!”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매우 큰 재래 시장인 부전시장에 가서 어머니와 나는 보디빌더 팔뚝보다 더 큰 잉어를 한 마리 골랐다. 민물 생선전 아주머니는 우리 조상 같은 잉어를 기절시켜주었는데 어머니는 큰 솥에다 들기름 한 병을 넣은 후 그 잉어를 하루 종일 고우셨다.

 아내는 까칠까칠 말라 갔다. 산달이 임박해서는 제법 뱃속의 아기가 꿈틀꿈틀 대고 해서 한번은 나보고 만져보라고 해서 슬쩍 만져보았더니 과연 그 안에 무언가 살아서 맹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사는 것은 바로 이런 평범한 진리, 즉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 만에 나왔다는 진리를 되새김질 하는 것에 불과하구나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을 뿐이지 별다른 감동은 받지 않았다. 단지 오뚝 튀어나와서 저 무거운 몸을 힘들게 움직이는 아내를 위해서라도 뱃속의 저 녀석이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고 걱정할 뿐이었다.

 소를 키우는 사람들로부터 소가 송아지를 낳을 때 임박해서의 그 느린 몸짓, 본능적으로의 경계심을 띤 행동으로 하루를 영위한다는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은 내 아내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출산을 앞두고는 잘 웃지도 않고 야채나 과일을 먹을 때는 열 번 이상 씻었으며 태교를 한답시고 퇴근 후 매일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고 누워만 있었다. 그래야 뱃속에 있는 아기의 성품이 좋아진다는 것이라고 반복해서 내게 말했다. 나는 매일 절간에서 살고 있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그런 집안 분위기가 너무 따분해서 퇴근길에서 이놈저놈 친구 녀석들에게 전화하여 술 한 잔 걸치고 슬그머니 집에 들어와 방구석에서 자는 게 당시의 일과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자정이 다가오는데 아내는 배가 슬슬 아프기 시작한다고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하소연했다. 본능적인 육감이었는지 뭔가가 이상하다며 옷장에서 이것저것을 꺼내더니 보퉁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소위 말하는 진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저녁에 마셨던 술이 덜 깬 채 아내가 만든 보퉁이를 살펴보니 그간 준비해두었던 아기 속옷과 포대기, 기저귀 등을 조심스레 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장면은 참으로 숭고하고 고결하게까지 느껴졌다. 병원 복도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날이 새어 출근을 하려하는데 버스 정류소까지의 길에는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눈이 좀체 오지 않는 지방인데 희안한 일이었다. 출근하여 자리에 앉았으나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당시는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어서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내가 그간 진찰받았고 드디어 출산을 위해 입원까지 한 그 산부인과 의원에 직접 전화를 해야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 다이얼을 돌렸음에도 동네 산부인과 의원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갑자기 입에서 쌍욕이 나왔다. 대형 병원에 가라고 그렇게 당부했건만 저렴한 것을 좋아하는 아내의 생활 습관이 출산에도 이어진 것이다.

 답답해서 머리 뚜껑이 열릴 지경에 왔던 나는 과장에게 조퇴를 청하고 회사 앞에서 택시를 탔다.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제법 쌓여서 길은 거북이길이 되어 있었다. 눈이 오지 않는 지방인데 묘하게도 그날 몇 년 만의 폭설이 온 것이다. 병원에 도착하니 아직 아기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복도의 나무 의자에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다가 밖으로 나가서 담배를 피웠다가 하는 일이 몇 시간 째 계속되었다. 눈은 그치지 않고 폭설로 바뀌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슬슬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아침부터 아무 것도 먹질 않았던 것이다. 병원 앞 슈퍼에 가서 뭔가 먹을 게 없나를 찾던 중인데 갑자기 캔 맥주가 눈에 띄었다. 두 캔을 따서 마시니 추웠던 몸이 좀 풀리는 느낌이었다. 다시 병원 복도를 서성이는데 갑자기 “응애!”하는 아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덜컹 분만실 문이 열리면서 간호사가 가슴에 아기를 안고 나왔다.

 “뭐예요. 뭐?”

 앉아있던 어머님이 대뜸 그것부터 물었다.

 “아들이예요. 아들.”

 “아이고머니나, 어때요, 우리 며느리는?”

 “순산이세요.”

 “어디 좀 보자. 어디 좀 봐.”

 

 

 

 

 나는 우두커니 멀찌감치 서 있었다. 공연히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세상 모든 것이 부끄럽고 죄스러워지는 느낌이었다.

 “막내야, 여기 와서 니 아들과 상면해라.”

 나는 잽싸게 그리로 갔다. 조그만 아기가 아주 작은, 빨간 피부의 아기가 간호사의 팔에 안겨져 있었다. 핏자국까지 여린 얼굴이 묻어있었다.

 “너하고 닮았제?”

 “히히, 그런가요…….”

 나는 가만히 아기를 보았다. 문득 30년 전의 내 모습이 저랬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는 아직 세상이 보기 싫다는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이봐, 인마. 내가 니 아빠라고. 안녕.”

 나는 인사를 했다.

 창밖에는 계속 눈이 내리고 있었다. 동네 산부인과였던 관계로 의사는 빨리 집에 가서 산모 몸조리를 해라고 재촉했다. 그런데 눈으로 인해 택시도 보이질 않고 갓 출신한 산모를 걸어가게 할 수도 없고 난감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갑자기 직장 동료 중에 자가용을 끌고 다니는 입사 후배이며 고교 선배인 C씨가 생각났다.

 “형, 난데. 우리 마눌이 아들 낳았거든.”

 “하하, 그러냐? 축하한다.”

 “그런데 퇴원해라는데 병원 앞에 택시도 없고 눈은 자꾸 쳐내리고 나 지금 돌아버리겠어.”

 “히히, 그렇구나! 그러면 내가 잽싸게 가야겠네. 기둘려라.”

 그날 저녁 어머니는 아내가 몇 달 전 준비한 목욕통에 더운 물을 담아서 손으로 몇 번이나 휘저어보시더니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아기에게 목욕을 시키셨다.

 “어머니, 갓난 아기몸은 마치 통닭처럼 보이네. 하하.”

 “너 언제 철들래!”

 하시며 어머니는 두 대씩이나 세게 등짝을 때리셨다.

 

 

 

 

 

 나는 돌 사진이 없다. 내가 태어날 즈음에 극도로 가계가 가난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유년 시절에는 친구 집에 즐비한 그들의 돌 사진이 마냥 부럽기만 했다. 사진 하나 없이 장난감 하나 없이 자라났던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찍은 사진은 국민학교 1학년 봄 소풍 단체 사진이었으니까. 그리고 기성회비를 내지 못해서 학교 수업을 받지 못하고 집으로 쫓겨갔던 경험 뿐만 아니라 보이스카우트 단복을 입고 다니던 친구들에 대한 동경이나 미술학원에 다니는 친구가 부러워서 몇 시간이고 보이스카우트 실, 미술 학원 앞에 앉아있었던 기억도 났다.

 몇 년 만에 눈이 오는 길일에 태어난 아기를 앞에 두고 나는 몇 번이나 다짐하고 맹세했다. 사진 흔적 남기기. 장난감, 합창단, 미술학원, 피아노, 보이스카우트 등등 내가 못해 본 것들을 해주겠다고 말이다.

 나는 그때의 다소 유치한 맹세처럼 틈만 나면 사진을 찍고 장난감을 사다주었다. 남들처럼 피아노도 사주고 이를 배우게도 했다. 그 피아노가 안방 구석에 아직도 외로이 남아있다. 태어나던 날 맹세했던 대로 나는 아들아이를 궁색하게 키우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과연 그것만이 올바른 아버지의 길이었을까 하는 점에서는 의문이 간다. 나는 아버지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나 자신 모르는 사이 아들에게 행여 많은 상처를 입혔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조선의 세종조에 최한경이란 유생이 있어 자신의 인생을 기록한 <반중일기(泮中日記)>를 남겼는데, 그는 책 속에서 다음과 같은 화원(花園)이라는 연시를 지었다.

 

 

坐中花園 膽彼夭葉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兮兮美色 云何來矣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灼灼其花 何彼(艶)矣

아름다운 꽃이여 그리도 농염한지


斯于吉日 吉日于斯

이렇게 좋은날에 이렇게 좋은날에


君子之來 云何之樂

그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臥彼東山 (觀)望其天

동산에 누워 하늘을 보네


明兮靑兮 云何來矣

청명한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維靑盈昊 何彼藍矣

푸른 하늘이여 풀어놓은 쪽빛이네


吉日于斯 吉日于斯

이렇게 좋은날에 이렇게 좋은날에


美人之歸 云何之喜

그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 그날 답답하게 왔다갔다를 반복했던 그 병원의 복도는 내 마음 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간호사의 품에 안긴 아들아이의 모습을 처음으로 본 후 걸었던 병원 복도. 나는 출구도 없고, 끝도 없는 부자 관계라는 긴 복도를 줄곧 걸어온 듯하다. 병원 복도에서 사랑하는 내 부모님은 내 곁을 떠나 어디론가 먼 곳으로 사라졌으며, 또한 나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지 모르는 미완성의 복도에 나는 아직 그대로 서 있는 지 모른다. 그러나 그날, 눈 오는 좋은 날에 부부의 마음에 꽃밭의 꽃잎처럼 찾아온 부부의 영원한 손님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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