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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남자의 향기와 눈물

by 언덕에서 2014. 6. 5.

 

남자의 향기와 눈물

 

 

 

 

 

 

<이스라엘 '요단강' 상류 지역 - 북요단강>

 

 

돌아오는 7월 11일은 지난 1981년 아버님이 돌아가신지 34주년이 되는 기일(忌日)이다. 서양 속담에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아버님에 대한 슬픔도, 그리움의 감정도 해가 갈수록 퇴색되어 이제는 그저 아련한 느낌만이 남아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몇 년 전이었다. 우리가족이 살던 동네에 아버님 연배의 건달이 한 명 살고 있었다. 그는 하는 일 없이 동네를 배회하며 길가는 사람에게 시비를 거는 것을 하루 일과로 삼는 양아치건달으로, 동네 사람들은 멀리서 그를 발견하면 일부러 가던 길을 돌아갈 정도였다. 우리가 살던 골목의 끝집에 그는 살고 있었다. 하교할 때마다 그네 집앞에 앉아 나를 노려보는 살기어린 눈빛 때문에 나는 항상 오싹함을 느끼곤 했다. 어느 날 낮술을 마신 그가 전문대 교수인 앞집 아저씨에게 시비를 걸어 대판 싸움이 벌어지려던 찰나이었다. 마침 아버님께서는 저녁에 퇴근하여 골목으로 들어오고 계셨다. 늙은 건달이 본업(?)을 벌이려다 멀리서 골목으로 들어오시는 아버님을 보더니 급히 자기네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당시 그 장면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반추해보니 아버님은 비록 노동일을 하셨지만 평생 싸움이라는 걸 모르고 사신, 점잖은 분인데 뭔가 상대방을 압도하는 카리스마 같은 것을 갖고 계셨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판단이 든다. 아마, 한국전쟁에 참전하시어 생과 사를 오가는 전쟁터에서 자연스레 익힌 강인한 남자의 기백 같은 게 아닐까 하는 것이 지금의 생각이다.

 그래서 요즈음엔 어렸을 때 아버님의 품에서 맡을 수 있었던 냄새들을 떠올리곤 한다. 아버님의 품에서는 항상 땀 냄새와 담배 냄새가 뒤섞인, 내 아버지만이 가질 수 있었던, 체취가 있었다. 결코 아름다운 향기는 아니었지만, 내 아버님만이 간직할 수 있었던 그 체취에 대한 기억을 어렴풋이 떠올리곤 한다.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울어야 한다.”

 이 말은 국민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우연히 공부시간에 우리들에게 지나가는 말로 해주신 격언이다. 태어날 때,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나라가 망했을 때 울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전형적인 유교적인 관점이고 마초적인 냄새도 풍기고 있어 내가 그다지 좋아하는 문구는 아니다. 이 말이 왜 어린 내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 오늘날까지 기억되느냐 하면 어릴 때부터 나는 선천적으로 눈물이 많은 소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안 식구들로부터 ‘울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는데, 담임선생님의 그 말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의 한 장면>

 

 

 지금도 기억하는, 아버님이 말년에 가족 앞에서 보이신 흔한, 장면이 있는데 그것은 틈만 나면 눈물을 흘리신 기억들이다. 언젠가 아버님은 KBS 티비의 '주말의 명화'에서 방송한 ‘대제의 밀사’라는 영화를 보면서 계속 눈물을 흘리셨다. 최근에 그 기억이 나서 어렵사리 DVD를 구해서 그 영화를 다시 보았는데 마지막 장면이 좀 짠했긴 하지만 심하게 눈물을 흘리게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

 또 하나 기억나는 영화가 있다.  아버님은‘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영화를 보시면서 거의 한 시간 이상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그때는 내가 중학교 다닐 때였는데 아버님의 눈물은 영화가 던진 서러운 내 감정을 더 서럽게 만들어 나는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끝없이 울었다. 그때부터 심해진 나의 우는 버릇은 어른이 되어도 마찬가지가 되었다. 2002년 월드컵 4강이 확정되는 순간 가장인 나를 비롯해 아내와 두 아이 모두 눈물을 흘렸는데 나는 30분 동안이나 유독 심하게 울었다. 슬픈 영화나 슬픈 장면만이 나를 울리는 것이 아니라 마라톤에서 죽을 힘을 다하여 달려가는 선수의 모습, 부상 후 몇 년만에 힘들게 시합에 복귀한 야구선수 박정태가 연속 안타를 친 후 눈물을 흘리는  장면, 어릴 적 가난을 이겨낸 가수의 눈물, 올림픽게양대에 올라가는 태극기, 친구 부모님의 장례 미사에 울러퍼지는 위령 성가 520번 '오늘 이 세상 떠난', 사찰의 다비식에서 목탁 소리와 함께 들리는 "지장보살, 지장보살!" 하는 염불 소리 등에서도 공연히 찔끔찔끔 눈물을 흘리다가는 어느 순간 나 자신도 제어 못할 정도로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좀 주책바가지의 중년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팔 년 전에 지병을 앓으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나이가 들면 인간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지만 생애의 반 이상을 병마에 시달리시다 고통스럽게 돌아가시니 견딜 수없이 가슴이 아팠다. 어머니는 몇 십 년 동안을 당뇨병에 시달리셨고 그 후유증으로 앞을 제대로 보지를 못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꿈에 조상이 보이면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보인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나는 믿지 않았는데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날 꿈에서 약 이십 오 년 전에 돌아가셨던 아버님을 뵈었던 것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한 번도 꿈속에서 만난 적이 없었는데 꿈속에서도 돌아가신 아버님을 다시 뵙는 사건은 의외였기 때문이다. 나는 옛날처럼 눈물로 다가갈 뿐이었다. 나는 아버님의 가슴에 아이처럼 머리를 묻고 아버님만의 체취를 맡으며 '아버님 없이 살아온 나의 25년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기나 하시냐'고 눈물로 하소연했다. 그런데 아버님의 눈동자는 흰자위가 없는 온통 검은색이었다. 그것이 문제였을까? 눈물을 흘리다 잠이 깬 나는 병원으로부터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았고 어머니는 그날 세상을 떠나셨다. 장례식이 끝나고 꿈에서 아버님을 뵈었던 이야기를 대학 교수인 손위 동서에게 했더니, 그건 아버님이 어머님을 데리러 온 메시지라고 그는 단언했다.

 세월은 끊임없이 흘러, 지금의 내 나이는 돌아가실 때의 아버님 나이가 되었다. 당시 갓 스물이 된 아들을 두고 저 세상으로 떠나셨던 아버님의 마음은 오죽했으랴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아버님은 그렇게 많이 갖고 계시던 눈물이 다 흘려버려서 눈자위가 검게 되신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요즘도 나는 틈만 나면 눈물을 흘린다. (지금은 대학생이 된) 딸아이의 초등학교 졸업식 교정을 나서며 그곳 스피커에서 울러 퍼지던 ‘마법의 성’ 노래 가사를 음미하다 슬픈 곡조에 마음이 아파서 눈물을 흘렸고, 홍콩 영화‘첨밀밀'을 보다가 마지막 장면에 감격스러워 30분 동안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매주 화요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집에 일찍 들어가려고 애쓰는 편이다. 일곱 시 반부터 KBS - 1 티비에서 방송하는 ‘러브 인 아시아’라는 프로를 보기 위해서다. 이 프로의 스토리는 대부분 판에 박은 듯 비슷하다. 동남아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장녀는 뭔가 가계의 돌파구를 얻기 위해 잘사는 나라 한국에 시집을 간다.

 그러나 남편은 아버지뻘인 40대 중반이고 그 역시 가난한 농촌 노총각이다. 시집 온지 5년 만에 혹은 10년 만에 아이를 안고 남편과 함께 홍삼정이나 영양제, 라면, 옷가지 등을 선물로 들고 동남아 밀림의 친정집을 잃어버린 기억을 찿듯 방문한다. 멀리 집이 보이자 그녀는 차에서 내려 미친 듯 뛰어간다. 그리고 친정 엄마 또는 아버지를 짐승처럼 부둥켜안고 끝없이 끝없이 소리 내어 운다. 공식과 같은 이 장면이 오면 나는 매주 빠짐없이 눈물을 흘린다, 어떨 때는 대성통곡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이를 지켜보는 아내와 딸, 두 모녀는 한 마디씩 거든다.

 "너네 아빠, 오늘이 그날이네!" 

 "맞아. 아빠, 또 시작하시는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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