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구 단편소설 『안개는 아직도』
박용구(朴容九. 1923 ∼ 1999)의 단편소설로 1953년 [수도문화사]에서 발간된 소설집 <안개는 아직도>의 표제작이다. 박용구는 서울 출생으로 1941년 경복중학교 졸업 후, 1942년 [니혼시단(日本詩壇)] 동인으로 일문시(日文詩)를 쓰다가 1944년 연희전문 수물과(數物科)를 졸업, 학병으로 일본군에 강제 동원되었다가 해방 후 귀국하였다. 1945년 [예술부락]에 단편 <언덕 위에서>를 발표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안개는 아직도」<지폐견학(紙幣見學)><풍경>을 계속 발표, 신감각적인 심리 묘사로 각광을 받았다.
1950년 [문예]의 편집을 담당했으며, 잠시 여고에서 수학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으나, 얼마 후 직장을 그만두고 줄곧 집필생활로 일관해 왔다. 틈틈이 단편을 발표하는 동안 역사에 관심을 기울여, 주로 고려시대에서 취재한 역사소설을 발표하는 한편, 신흥종교의 퇴폐적인 풍토를 폭로 고발하거나, 일제의 침략사를 더듬어 왔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안개는 아직도」는 1950년대의 서울 뒷골목에 무대를 갖는다.
전쟁의 상흔을 안고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불안과 허무, 기존의 모럴에 대한 반항 등이 흔히 취급되는 제재들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전후 문학은 서구 전후 문학과는 약간 성격을 달리한다. 서구 전후 문학이 생명에 대한 탐구, 기존 윤리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항정신에 근거하고 있다면, 우리나라의 전후 문학은 이 땅에서 겪은 전쟁의 폐허 위에서 잃어버린 모든 것에 대한 향수와 자아상실의 허탈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서구에서의 전후 문학은 기성 사회 계급에 대한 저항이라든가, 퇴폐적이며 향락적이고 감각적인 데카당스의 병적인 경향에 대한 반성을 담고 있다. 그러나 우리 문학에서는 6.25 이후 사회의 부정적 상황과 불의에 대한 고발정신이 선행되었고, 자아에 대한 생존 양상의 번뇌가 중심이 되었다.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해방 후의 혼란과 6ㆍ25라는 민족사의 비극 속에서 불구적인 육체와 비정상적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을 등장시켜 전쟁이 가져온 인간삶의 비참함과 동시에 인간에 대한 부정과 야유의 시선을 던지고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경애’는 지방 소도시에서 편모슬하의 외로운 처지에서 자라 겨우 여학교를 나온 평범한 여인이었다. 아버지와 서모가 모녀를 버리는 바람에 힘겹게 인생을 살아왔으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다. 첫사랑의 ‘길수’에게는 공연히 빼다가 헤어지게 되고, K광업이라는 직장에서 사귄 ‘철마’는 기혼 남성으로서 우정이 있는 관계다.
그런 와중에 6ㆍ25 전쟁이 터진다. 공산군이 몰려오자 경애는 굶을 판이었다. 그녀가 아버지에게 옭아낸 돈을 빌려주었던 상인의 밀고로 그녀는 반동분자로 몰렸다. 어느 친구의 도움으로 공산당의 기관에 이름을 거는 것으로써 그 봉변은 면했지만 공산군이 밀려가자 경애에게는 부역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그 후 폭격으로 인한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동무 ‘희숙’의 고향인 광주로 함께 내려갔다가 그곳에서 만난 ‘문식’과 결혼했으나 그는 이미 처자가 있는 몸이었다. 좌절과 허탈에 경애는 초토가 된 서울에 돌아와 여관의 콜걸로 몸을 팔아 연명한다. 어느 날 밤 자신이 S광업이라는 직장에 다니는데 부산에서 출장 왔다고 이야기하는 남자에게 몸을 판다. 그녀는 그 남자를 통해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철마를 만났던 K광업은 남자가 다니는 S광업처럼 부산에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상처 입은 여인은 우정과 애정의 분별이 어렵던 관계의 남자 철마를 찾아 떠나려 한다. 물론 그를 만나더라도 삶의 대안이 없음은 물론이다. 폐허의 도시, 서울에는 아직도 안개가 자욱하다. 산발하는 허탈한 혼의 흐름 외에 드러나 뵈는 것이 없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내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 '한국단편문학전집'이라고 하는 10권짜리 전집이 유행했다. 1편은 이광수의 단편소설 '가실', '소년의 비애' 김동인의 '감자', '수정 비둘기' 등에서 시작하여 10권에는 최인훈의 '웃음소리'에서 끝나는 전집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그 단편 전집은 지금 갖고 있질 않다. 헌책방 거리로 유명한 보수동 책방 거리에서도 찾기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지금도 신문 문화 란에서 '과거' 한국 소설 운운하면 대부분 다 읽었다고 자부하는 것이 그때의 독서 기억에 연유한다.
그런데 그때 읽었던 단편 소설 중에 박용구 작가의 「안개는 아직도」라는 작품이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다. 자세한 스토리를 이야기하라고 하면 가물가물하지만 전쟁 후의 피폐하고 비참한 분위기만은 아주 선명해서 그 소설이 주는 처연한 이미지가 어린 나의 뇌리에 깊이 박힌 듯하다. 그래서 해당 소설을 헌책방이나 도서관에서 찾아보았지만 오래된 단편 소설이어서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인터넷에서 중고책 사이트를 하나 발견했는데 그곳에서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다행히 소장자가 흔쾌히 판매를 허락해서 손에 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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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 기억이 인간을 과거의 노예이게 한다면 과잉의 망각은 인간을 현재의 노예이게 만든다'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는 "역사를 망각하는 자는 같은 역사를 되풀이한다"는 말을 남기고 있다. 산타야나의 충고는 나치에 희생된 600만 유대인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진 미국 워싱턴 시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에 걸려 있다. 사실 산타야나의 충고는 그보다 훨씬 앞서 로마 철학자 세네카의 입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산타야나는 세네카의 말을 기억하고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은 산타야나의 말을 기억함으로써 망각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한국전쟁은 같은 민족끼리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150만 명의 사망자와 360만 명의 부상자를 만들었고 국토의 피폐화를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남북의 적대감이 극도로 심화되어 민족분단 체제가 더욱 굳어졌으며 남한의 경우 반공 이데올로기가 초법적 권위를 지니고 전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동서 냉전을 격화시키는 고비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전 민족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이 소설 속의 시간과 공간의 빈번한 교체로 짜인 파괴의 분위기는 안갯속과 같은 우수와 허탈로 전쟁으로 인한 세기말의 풍경을 보는 느낌이다. 젊은 세대들은 전쟁 이후의 참혹함과 비참함을 상상조차 못 하는 듯하다. 우리 세대는 전쟁을 직접 겪진 않았지만 전쟁의 후유증으로 극심한 가난과 궁핍함, 독재를 경험한 세대이다. 문학 작품이 그러한 흔적의 기억이므로 반면교사가 되겠다는 생각에 포스팅을 만들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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