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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태준 단편소설 『해방 전후』

by 언덕에서 2014. 8. 13.

 

 

이태준 단편소설 『해방 전후』

 

 

 

월북작가 이태준(李泰俊.1904 ∼?)의 단편소설로 1946년 8월 문학가동맹의 기관지였던 [문학] 창간호에 발표되었다. '한 작가의 수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해방 전후』』는 이태준의 자전적 단편소설이다.

 같은 해 좌익 계열의 조선문학가동맹이 주관하는 해방기념 조선문학상에 지하련의 <도정>과 함께, '구 문단의 지도적 작가의 한 사람'이었던 작가 자신이 새로운 문학 운동과 민주주의 운동에 가담하여 투쟁하는 가운데서 체험한 바 제 사실을 기록한 것'이란 이유로 수상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 작가의 수기'란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이 시기의 작품으로 작가 자신의 가장 인물인 주인공 '현'을 통해 해방 전과 후의 상황을 그렸다. 일제의 탄압이 최고조에 달한 일제강점기 말에 최소한의 자기를 지켜내는 고뇌를 표현한 후, 해방 직후의 혼돈된 상황에서 적절하고 정당한 방향을 찾아 문학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실천하는 문제를 차분하게 서술해나갔다. 특히 주인공 현과 대립적 인물로 김직원 노인을 등장시켜, 양자의 관계를 통해 옛것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태동할 수밖에 없는 해방 직후의 상황을 잘 묘파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끝으로 이태준은 월북하고, 이후 그의 문학은 이전의 작품 경향과는 전혀 다른 생경한 구호만 나열하는 체제선전 문학으로 바뀌고 만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일제 말기, 무슨 사상가도 주의자도, 무슨 전과자도 아니었지만 시국에 대해 소극적이고 가급적 협조를 않던 작가 '현'은 살던 집을 세 놓고 강원도 산읍으로 들어간다. 창씨개명이나 친일작품 혹은 일어 창작을 거부했지만 그렇다고 대동아 전기(傳記)의 번역마저 거절하지는 못하던 그였다. 시국의 혼란을 피하기 위함이었으나 산골 역시 평온하기는커녕 일제의 감시가 더욱 심한 곳이다. 감시의 눈을 피해 낚시로 소일하던 그는 그곳에서 김직원을 만나 교우한다.

 마침 문인 보국회에서 주최하는 문인 궐기대회에 참석하지만, 자신이 연설할 차례가 다가오자 대회장을 빠져 나온다. 일제도 길어야 1년이라는 생각에 갈피를 못 잡는 그는 자신의 문학을 반성한다. 이럴 즈음 주재소에서는 출두를 명령하여 각종 시국 집회에 참석하지 않았음을 경고한다.

 전국 유도(儒道) 대회와 관련해 김직원이 잡혀 들어가고 서울 친구의 전보를 받고 상경하던 '현'은 일제의 패망과 조선의 독립 소식을 듣는다.  8월 17일 새벽에 서울에 도착한 그는 서울의 여러 정황에 불쾌해 한다. '조선 문화 건설 중앙 협의회'를 찾은 그는 마침 쓰고 있던 그들의 선언문을 읽고 발기인으로 서명한다. 울려 퍼지는 '적기가' 속에 고민하던 '현'은 '조선 인민 공화국 절대 지지'라는 현수막 사건을 통해 자기비판과 함께 정세를 판단하고, 그들의 지도자가 되어 '프로 예맹'과의 통합을 계획한다.

 좌익과 우익의 반탁, 찬탁 데모로 어수선한 가운데 김직원이 다시 나타나 서울을 떠난다고 말한다. 그를 보며 '현'은 중국의 문인 왕국유(王國維)를 생각한다.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8ㆍ15 해방을 전후하여 작가 '현'에 대하여 기록한 소설이다. 작가 '현'은 바로 이태준 자신이기도 하다. 작가 '현'의 해방 전 자신의 작품과 삶의 태도에 대한 반성, 그리고 해방 후의 적극적 변화, 즉 좌익 계열의 문학 단체에 관여한 문학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해방 전 그렇게도 존경해 마지않았던 김 직원의 설득에 대해 자신의 방향 전환을 옹호하고 있기도 하다.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태준 자신의 자전 소설이라 할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의 해방을 전후한 행적과 함께 그가 북을 택한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일제 말기, 시국 문제에 협력하지 않고 버티던 작가 '현'은 더 이상의 시달림을 피해 철원으로 낙향한다. 그러나 낚시로 소일하는 그에 대한 감시의 눈초리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한 가지 낙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김 직원'과의 만남이다. 그는 '현'의 가슴에 지사적 용모와 행동으로 뚜렷하게 각인된다. '현'은 그를 우러러 보기까지 하게 된다.

 '김 직원'과의 갈등은 8․15 해방이 되고부터이다. 8월 16일 서울의 친구 전보를 받고 급히 상경하면서 '현'은 해방의 소식을 듣는다. 17일 아침에야 서울에 온 그는 재빨리 문단의 주도권을 쥐려는 여러 문인 친구들의 계획에 참여하게 되고, 그들이 좌익 계열이라는 것을 알고도 주도적으로 나선다. 비록 소련에 대한 거부감이 있고 대세에 밀려가는 자신의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영친왕을 모셔다 왕으로 섬겨야 한다는 '김 직원'의 논리에는 정면으로 맞서 자신의 소신과 주장을 편다. '현'은 자신의 해방 전 문학적 성향을 반성하기도 하고, 친일 분자들의 소행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김 직원'과의 결별이다. 강원도 산읍에서 그를 만났을 때, 시골 향교를 지키며 시국에 대해 자신보다 한층 저항적인 '김 직원'에 대해서 '현'은 '상종한다기보다 모시어 볼수록 깨끗한 노인이요, 이 고을에선 엄격히 존경을 받아야 옳은 유일한 인격자요, 지사'로 인식했다. 그러나 해방 후 좌익 문인 단체에서 활동하면서부터 '현'은 '김 직원'을 ‘돌과 같이 완강한 머리’ 혹은 ‘이 세계사의 큰 물결 속에 한 조각 티끌처럼 아득히 가라앉아 가는 모습’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 소설 속에서는 김직원으로 대표되는 보수적 민주주의 경향과 사회주의 편에 서는 현의 입장이 화해를 이루지 못함으로써 해방공간의 혼돈과 대립을 반영하고 있다. 그가 갖고 있는 순수열정이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민족적 단결과 통합을 계속 기대한다는 점에서 철저한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또한 조직적이고 의도적 단체의 구성을 강행하려는 공산주의 젊은 문필가들을 오히려 나무라고 민주진영과의 통합을 역설한다는 점에서 중도와 화합을 추구했던 인사들의 비극을 읽어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 소설은 해방공간에서 빚어지고 있었던 문필가들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며, 작가의 지향이 소극적이고 불분명한 채 순수열정만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러나 냉전체제가 고착화되고 한국전쟁 이후의 정세가 대립으로 굳어지면서 작가의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어느 쪽에서도 쉽게 용납되지 않았다. 그의 고뇌가 오히려 북한에서는 회색적 태도나 부르주아적 사고로 지탄받아 숙청의 빌미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삶 자체도 소설적이다.

 이태준은 명문장가이지만 월북 작가였던 탓에 한동안 우리 소설사에서 지워져왔던 작가다. 근대 단편소설의 완성자로 불린다. 그는 우리 단편소설의 모범을 완성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1933년 박태원·이효석 등과 함께 ‘구인회’를 조직하였고 해방 후에는 문학가동맹, 남조선민전등 조직에 참여하다가 1946년 월북하였다. 이후 ‘구인회’ 활동 과거와 사상성을 이유로 임화, 김남천과 함께 가혹한 비판을 받고 숙청되어 함흥노동신문사 교정원, 콘크리트 블록 공장의 파고철 수집 노동자로 전락하였다.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960년대 초 산간 협동농장에서 병사하였다는 설이 있다. 

 

 

 


 

 

☞왕궈웨이(王國維.왕국유.1877∼1927) 중국 청나라 말기 학자. 저장성 하이닝 출생. 자 정안(靜安). 호 관당(觀堂). 시호 충의(忠懿). 나진옥이 설립한 동문학사에 입사, 일본 유학에서 물리학교를 다니다가 중도에 귀국, 강소사범학교 교수가 되어 문학에 뜻을 두고 니체ㆍ쇼팬하우어를 탐독, 종래 사람들이 잘 돌보지 않던 송원 시대 이래의 속문학을 연구, <홍루몽평론><인간사화><곡록><희곡고원><송원희곡사> 등 획기적인 노작을 썼다.  1911년 신해혁명 때 나씨와 함께 망명, 일본에서 살았다. 만년에는 선통제의 사부가 되고, 겸하여 청화연구원 교수로 있었으나, 1927년 시세에 느낀 바 있어 이화원의 곤명호에 투신 자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