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학 중편소설 『가사자(假死者)의 꿈』
최창학(崔昌學. 1942 ~ )의 중편소설로 1970년 계간지 [창작과 비평]지에 「적(敵)」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가사상태(假死狀態)의 삶에 대한 구원 문제를 한국의 대표적인 신흥종교이며 사이비 종교의 표본인 ○○교와 관련시켜 발표한 작품이다. 이후 제목을 바꾸어 1994년 <가사자의 꿈>(술래.1994)이라는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최창학은 의식적인 흐름의 수법을 즐겨 이용하며, 자아의 문제에서 점차 사회적인 문제로 눈을 돌리고 있다. 작품마다 문장, 수법, 구성 등을 달리하려 애쓰고 있고, 실험적인 수법과 정통적인 수법을 병용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병든 사회 속에서의 개인은 한없이 무력하고 허탈과 절망에 빠져 있다. 결국 사회의 일부분일 수밖에 없는 개인은 산업사회의 급격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오늘을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어쩌면 사회의 그늘 밑에서 앙상한 가지만을 움켜진 채 비틀거리고 있는, 결국은 공해와 도시 미화정책으로 쓰러질 운명인 한없이 가녀린 한 그루의 나무일지도 모른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김괄은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사적 연구’라는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대학원생이다. 그러나 괄은 논문 작성은 뒤로 밀어둔 채, 술과 여자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그야말로 가사자(假死者)의 생활인 것이다. 괄이 만나는 여자만 해도 영미, 신애, 혜원, 지희, 오 부인 등 다섯 명이나 되지만, 괄은 그 중 누구에게도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괄의 성적인 파트너일 뿐이다. 여자들이 임신과 낙태를 되풀이해도 괄에게는 아무런 죄의식이 없다.
그 자신 가벼운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괄은 가끔 신경정신과 병원에 입원해 있는 형 김국을 면회하러 가기도 한다. 게다가 시골에 살고 있는 어머니 신 여사는 실어증에 걸려 있다. 그런데 괄의 가족이 이처럼 파멸에 이른 것은 괄의 아버지인 김문산 씨가 모 수사기관에 끌려간 지 10년이 넘도록 시체조차 돌아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1958년에 있었던 민의원 선거에서 야당 후보를 지원하여 당선시켰고, 그의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공산당에 부역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비극적 민족사가 빚어낸 부당한 정치적 폭력이 한 가족을 ‘가사(假死)’의 상태로 몰아넣었다.
병든 사회 속에서 개인의 이 같은 파멸이 괄의 가족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대학 교수와 유명 잡지 주필을 지낸 신상철은 어느 날 간첩으로 몰려 체포되었고, 술로 세월을 보내는 혜원의 오빠 윤 목사의 부인은 데모 구경을 하다가 눈을 다쳐 입원 중이며, 괄과 간통 중인 오 부인의 남편은 월남전에서 한쪽 팔 한쪽 귀를 잃고 얼굴에 화상을 입고 귀국하게 된다.
괄은 이유 없이 ‘GG신령협회’라는 예수교 변방의 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치밀하고 과학적인 교리에 흥미를 느낀다. 그 종교를 열렬히 믿는 혜원을 좋아하는 것도 이유이다. 괄은 자신과 사귀는 여자 중 유일하게 혜원과는 육체적 관계를 갖지 못한 상태이다. 혜원의 뒤에는 GG신령협회로부터 쫓겨난 전직 목사 출신의 알코올 중독자 오빠가 있다. 그는 여동생에게서 술값을 얻어먹고 사는 잉여인간이다. GG신령협회에 관심을 가지며 열심히 교리를 듣던 괄은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성경을 개고기 뜯어먹듯 하는 ‘GG신령협회’에서도 구원의 빛을 발견하지 못한 채 방황한다. 어느날 우연히 술에 취한 혜원의 오빠에게 이유없이 얻어맞다가 시멘트벽에 튀어나온 철근에 뒤통수를 찧고 가사((假死) 상태인 식물인간이 되고 만다.
최창학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특징을 이루는 것은 끝없는 무력감이다. 그들은 대부분이 정신질환자이거나 냉소주의자이거나 하릴없는 소시민들로서, 아무런 희망도 의욕도 없이 타락하고 허망한 나날을 영위한다. 그건데 심각한 것은 우리 자신의 무력감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그들의 무력감이 소설 작품 속에서 하나의 질병으로 굳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최창학의 작품을 읽는 것은 깊이 모를 절망감과 만나는 일이다.
그러면 이 절망과도 같은 이 무력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정치적 폭력과 윤리적 타락으로 가득 찬 병든 사회로부터 온다는 것이 작가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말하자면 병든 사회가 병든 개인을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최창학의 소설을 읽는 것은 개인의 질병 속에 숨어있는 사회의 질병을 엿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 틈을 이용해 사이비 종교는 병든 개인에게 다가온다.
이 소설을 열심히 읽다보면 ‘가사자(假死者)’는 비단 괄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가사자의 꿈은 무엇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병든 사회에서의 무력한 삶을 극복하여, 건강한 사회에서 힘차고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하는 일이다. 이 소설의 어느 부분에서도 이 같은 희망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미래에의 전망의 결여가 소설에서 그리 큰 흠결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깊이 모를 절망감 자체가 건강한 사회와 희망찬 삶을 지향하는 근원적인 힘으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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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종교집단은 두목 격인 교주를 신격화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교리를 주입시킨다는 점에서 그 위험성과 반사회성이 조직폭력배들보다 심각하다. 기독교를 빙자한 사이비 종교집단의 경우 교주를 재림예수나 보혜사, 사도바울과 같은 존재로 떠받든다. 이 때문에 교주의 명령이라면 모든 재산을 헌납하고 가족도 버리고 죽음까지 불사하는 광신도들이 생겨난다.
어떤 불만과 위기감 때문에 가슴에 구멍이 난 사람들, 자기 분열을 경험하면서도 그 분열을 봉합할 마땅한 방도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 - 이런 현대인일수록 '구원의 메시지' 앞에 허약하고, 모종의 구원 공식을 내세우는 유사 종교 집단, 사이비 신앙단체들에 쉽게 유혹된다.
사이비 종교 집단이 일으키는 문제는 한두 개인의 신앙 문제가 아니라, 이미 우리가 나라 안팍에서 수없이 목격하듯, 한 사회에 집단적 고통을 발생시키고 사회적 대가를 요구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전통 종교와 유사 종교 집단을 구분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고 판정의 기준을 설정하는 일도 그리 힘들지 않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인문학자 도정일 교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첫째 기준은 우선 어떤 구원의 공식이 제시하는가에 주목하는 일이다. 특정한 날짜에 구원자가 강림한다든가, 휴거가 온다든가, 교주 또는 집단의 지도자가 스스로를 '메시아' 또는 '구원자'로 내세우는 것 등이다.
둘째 기준은 문제의 집단이 구원 자체를 '상품화'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따져보는 일이다. 그들은 예외없이 추종자들에게 금품과 재산의 헌납을 강요하거나 유도한다.
셋째, 박해의 위협이 강조되고 있는지 어떤지를 보는 일이다. 그들은 자기 집단을 위협하는 사탄, 마귀, 또는 모종의 세력이 있다고 주장하고, 그 위협세력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세 가지 기준으로 본다면 , 사이비 종교 집단은 물질문명의 모순으로 부터 발생하는 정신의 위기, 의미의 위기, 가치의 위기를 역이용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사이비 종교집단의 발호를 막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의 인식 전환이 시급하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이들을 이단이라 비판하면서도 반사회적 행태를 고발하고 규율하려는 노력은 소홀히 했다. 국가 권력의 종교에 대한 개입이나 관여는 최소화하는 게 바람직하다며 사이비 종교에 대한 법적 제도적 규제에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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