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류시인선집『수정(水晶)과 장미(薔薇) 』
시인 김남조(金南祚,1927 ~)가 편집한 현대여류시인선집으로 B6판. 324면의 시선집이다. 1959년 9월 정양사(正陽社)에서 간행되었으며 이때 장정은 서양화가 박내현(朴崍賢)이 맡았다.
모윤숙(毛允淑)의 서문이 있고, 당시 여류시인 26명의 대표적인 작품들 총 130수가 수록되어 있으며, 편자 김남조가 쓴 편자의 말이 덧붙여져 있다. 대체로 연대순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각 편에는 한 시인의 평전(評傳)과 더불어 대표적인 시를 몇 편씩 싣고 있다.
김명순(金明淳) 5편, 나혜석(羅蕙錫) 1편, 장정심(張貞心) 7편, 모윤숙 7편, 김오남(金午男) 12편, 노천명(盧天命) 7편, 백국희(白菊喜) 4편, 주수원(朱壽元) 5편, 오신혜 9편, 이영도 16편, 이숭자(李崇子) 5편, 홍윤숙(洪允淑) 5편, 조애실(趙愛實) 5편, 노영란(盧映蘭) 5편, 이봉순(李鳳順) 4편, 최귀동(崔貴童) 4편, 석계향(石桂香) 4편, 김지향(金芝鄕) 4편, 추은희(秋恩姬) 4편, 박명성(朴明星) 3편, 김숙자(金淑子) 3편, 김혜숙(金惠淑) 3편, 박정희(朴貞姬) 3편, 최선령(崔鮮玲) 3편, 박영숙(朴英淑) 2편, 김남조 3편 등이다.
만년청(萬年靑) / 김명순
두 잎사귀로 폭 싸서
빨간 열매를 기르는 만년청
영원한 결합이 있다 뿐입니다
서로 그리는 생각은 멀리 멀리
千疋(천필) 明紬(명주)의 길이로 나뉘어도
겹겹히 접어 그네줄을 꼬지요
하물며 한 성 안에 사는 마음과 마음
오다가다 심사 다른 것은
꽃과 잎의 紅(홍)과 靑(청)이지요
노라 / 나혜석
나는 人形(인형)이었네
아버지 딸인 人形(인형)으로
남편의 안핸 人形(인형)으로
그네의 노리개이었네
노라를 놓아라
순순히 놓아 다고
높은 障壁(장벽)을 헐고
깊은 閨門(규문)을 열고
自由(자유)의 大氣中(대기중)에
노라를 놓아라
나는 사람이라네
拘束(구속)이 이미 끊쳤도다
自由(자유)의 길이 열렸도다
天賦(천부)의 힘은 넘치네
아아 少女(소녀)들이여
깨어서 뒤를 따라 오라
일어나 힘을 發(발)하여라
새 날의 光明(광명)이 비쳤네
하수(河水)로 간다 / 모윤숙
고독은 드디어 언어를 잃고
깊은 숲에 잠들다
지나가는 바람도
흘러내리는 달빛도
그 얼굴에 검은 침묵을 깃들일 뿐
수많은 가지 새로
휘뿌리는 별빛도
이 밤엔 오직 한적하여
그림움은 마음에서 숨긴다
베개에 지친 피곤,
갈하여 타오를 때
스며 오는 물 소리 물 소리
멀고 긴- 골짜기로
저 혼자 흘러 가는 물 소리
눈 감으면 이 밤 조용한 품에
안기어 지나가는 듯 가까운 그 소리
나는 문득 깨어
아무도 없는 河水(하수)로 간다
가시덤불 어두운 숲으로
나는 달려 달려 새벽으로 간다
물은 맑은지도 모르고
물은 흐린지도 모르고
슬픈 나의 장미를 살리려
물가로 달리노라 아무도 모르게
자화상(自畵像) / 노천명
대자 한치 오푼 키에 두 치가 모자라는 不滿(불만)이 있다. 부얼부얼한 맛은 전혀 잊어버린 얼굴이다.
몹시 차 보여서 좀체로 가까이 하기를 어려워한다. 그린 듯 숱한 눈썹도 큼직한 눈에는 어울리는 듯도 싶다마는......
전시대 같으면 환영을 받았을 삼단 같은 머리는 「클럽지」한 손에 예술품답지 않게 얹혀져 가냘픈 몸에 무게를 준다.
조그마한 거리낌에도 밤잠을 못 자고 괴로워하는 성미는 살이 머물지 못하게 학대를 했다.
꼭 다문 입은 괴로움을 내뿜기보다는 흔히는 혼자 삼켜버리는 서글픈 버릇이 있다. 세 「온스」의 살만 더 있어도 무척 생색나게 내 얼굴에 쓸 데가 있는 것을 잘 알지만 무디지 못한 성격과는 타협하기가 어렵다.
처신을 하는 데는 산도야지처럼 대담하지 못하고 조그만 유언 비어에도 비겁하게 삼간다.
대처럼 꺾어는 질망정, 구리 모양 휘어지기가 어려운 성격은 가끔 자신을 괴롭힌다.
하루살이 / 김오남
1.
부유가 저리 많이 떠돌아 노닐어도
오늘 해 못다 가서 죽을 게 아니겠오
살았단 이 한나절을 즐겨보나 보외다.
2.
靑春(청춘)이 어제런 듯 白髮(백발)이 희었고나
얼마만 지난다면 白骨(백골)만 남을 人生(인생)
한나절 살고서 죽는 뷰유에다 비기리.
오해 / 오신혜
오해는 오만한 오색 가지 안경인가
고운 것도 밉게 보고 흰 것도 검다 하네
그 안경 벗겨내기는 겸손한 이 손길이네
오해는 가슴 속에 얼어붙은 얼음인가
그 입김 싸늘하여 삼복에도 서리치네
그 얼음 녹여내기는 참사랑의 햇빛 뿐
오해는 가슴 속에 돋아나는 가시인가
그 말끝 말끝마다 가시인양 찌르네
그 가시 태울 불길은 참사랑의 불꽃 뿐
무제(無題) / 이영도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인가 귀 기울여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한결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머언 窓(창)만 바라다가
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다
하나의 약속(約束)을 / 홍윤숙
뜨거운 것은 아니올시다
불붙는 것은 더욱 아니올시다
높고 맑은 것 겨울날 두터운 얼음장 밑에 고이는
파란 옹달샘 같은
그러한 것이 나의 태양太陽이었습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미움 바치지 않고
잊히워버린 작은 수목樹木처럼 살아온 세월歲月
나는 마음 착한 소녀少女처럼 인내忍耐라는 험준한
연인戀人을 섬겨 왔습니다
계절季節의 환가換期 - 빗발이 창문窓門을 두드리는 밤엔
눈먼 여인女人처럼 지척거리는 마음의 고삐를 채찍질 하며
아, 진정 그리워 한다는 것이 사슴처럼 겨운 밤
당신의 무거운 책벌責罰 앞에 나 엎드려 생각합니다
어쩌면 당신은 풀을길 없는 하나의 약속約束을
어찌할 수 없이 지켜야만 되는 무서운 약속約束을 주셨습니다
<잊어버려서는 안된다>는
<죽어도 잊어버려서는 안된다>는
그러한 오뇌스러운 약속約束을......
막간 풍경(幕間 風景) / 김지향
불꽃이 튀는, 불꽃이 튀는 窓門(창문)에 느리운 버들 가지처럼 흔들려 뼈 없이 쫓기운 戰爭(전쟁)과 모두가 한 가지로 짤리운 발목 사이 피가 運河(운하)를 메우는 車(차)바퀴, 車(차)바퀴에 깔리운 거의 찢긴 歐羅巴(구라파)와 亞細亞(아세아)와 그것들을 쓸고 가는 바람과 연기와 板子(판자)와...... 休息(휴식). 休息(휴식)의 모양으로 看板(간판)들이 일제히 일어서 듯이 결국은 내 안에서 나고 죽는, 그실 나의 內部(내부)에서 죽기도 나기도 하는 모든 그것들의 形象(형상)을, 나와 나의 이웃들은 혹은, 말라 붙은 피딱지 모양으로 자잘한 얼굴 얼굴에 그려 붙여 놓고, 진종일 마주 서서 덤덤히 바라보며 돌고 있는 것이다.
세월은 갔어도 / 김남조
옛날의 마음이 돌아온다
아주 믿을 수 없는 일이언마는
하늘 기울고
궂은비 밤 새워 따르누나
하필이면 별그림자 하나 없는 이러한 때
옛날의...... 어인 일 그 마음은 다시 오는고
검은 강물에 밀려 왔는가
명부冥府의 들불처럼 얹혀 왔는가
벌거숭이 아이라고 울며 왔는가
불쌍한 우리들......
불쌍한 우리들
사람은 돌아올 기약도 끊쳤는데
마음만 깃을 접고 돌아왔구나
검은 밤바다
굽이굽이 물굽이를 몰려 왔는가
하늘 구만리九萬里
목이 추운 학鶴처럼 날라 왔는가
너무 외로워
내 이름 불러 주며 울고 왔는가
불쌍한 우리들......
원키도 원했어라
빌기도 빌었음을
그 사람 함께 함께 날 살게 하소서
하늘 쨍쨍 백주白晝와
부엉이 우는 달밤
그 사람 함께 함께 날 살게 하소서
어인 일
그 마음은 다시 오는고
낙화洛花의 뜰에
성그런 이슬처럼 참는 법도 있으련만
어인 일 그 슬픔 다시 오는고
불쌍한 우리들......
이 시집은 ‘편자의 말’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 수록조건의 기준을 ‘처음은 문학사적으로 공적을 끼쳤다고 보는 작고시인이요, 다음은 현역의 노장 및 중견 시인이며, 다시 여기에다 문학지의 추천을 완료, 등단한 신진 여류’로 들고 있다.
우리나라 현대시가 형성, 정착된 50여 년 동안에 활동하였던, 또는 활동 중인 여성 시인들의 작품을 모아 놓았다는 데 의의가 있다. 각 편마다 시인의 평전을 실었다는 점도 특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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