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영 시집『사이』
1996년 간행된 이 시집은 짧은 시행에 서늘하고 인상적인 서정 시편들을 선보여온 이시영(1949 ~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이다. 세간의 구속과 얽매임에서 벗어난 정밀(靜謐)한 마음이 자연의 정신과 만나 우주와 인생, 인간과 자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교감을 아름답게 포착한 89편의 시가 실려 있다. * 제8회 정지용문학상 수상작 「마음의 고향 6」 이 수록되어 있다.
마음의 고향.6
-初雪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참새떼 왁자히 내려앉는 대숲마을의
노오란 초가을의 초가지붕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토란 잎에 후두둑 빗방울 스치고 가는
여름날의 고요 적막한 뒤란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추수 끝난 빈 들판을 쿵쿵 울리며 가는
서늘한 뜨거운 기적소리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빈 들길을 걸어 걸어 흰옷자락 날리며
서울로 가는 순이 누나의 파르라한 옷고름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아늑한 상큼한 짚벼늘에 파묻혀
나를 부르는 소리도 잊어버린 채
까닭 모를 굵은 눈물 흘리던 그 어린 저녁 무렵에도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마음의 고향은
싸락눈 홀로 이마에 받으며
내가 그 어둑한 신작로 길로 나섰을 때 끝났다
눈 위로 막 얼어붙기 시작한
작디작은 수레바퀴 자국을 뒤에 남기며
- 시집 <사이>(창비.1996)
(『제8회 정지용문학상』.1996)
-시선집 박영근의 시 읽기『오는,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실천문예사. 2004)
이시영은 전라남도 구례 출생으로 영생고등학교를 거쳐 1972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에서 석사과정 수료했다.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수(繡)>가 당선되었고, 같은 해 [월간문학] 제3회 신인작품 모집에 시 <채탄> 외 1편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무지개
그 옛날 제가 어렸을 적
웃냇가 노둣돌 틈서리에서 물장구치다
느닷없는 천둥 소나기에 놀라 벌거숭이로
들가운뎃길을 향해 냅다 뛰었을 때
바로 옆 밭에서 김 매다 갑자기 없어진 나를 찾아
어머니는 가름젱이 온 들판을 호미 들고 헤매셨다면서요?
들판 가득 무지개 곱게 피어오르던 그 훈훈한 여름날 저녁
- 시집 <사이>(창비.1996)
이후 서라벌고교 교사를 거쳐 1980∼1984년 창작과비평사 편집장, 1984∼1995년 창작과비평사 주간, 1995∼1999년 창작과비평사 부사장을 거쳐 1999년 창작과비평사 상임고문이 되었다. 1987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에 참여한 이후 계속 이곳에서 활동하였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 객원교수,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로 재직했다.
문화공보부 예술상(1969), 제4회 서라벌문학상(1994), 제8회 정지용문학상(1996),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창비.2012)로 제1회 박재삼문학상(2012) 수상.
어느 聖所
겨울이 다가오는 어느 일요일
미사가 막 시작된 용산성당 앞 나무둥치에
외롭고 지친 할머니 한분이 기대어 있었다.
다가가 자세히 물으니
일년 전 자기를 여기에 내다버린 아들네 부부를 기다리고 있노라며,
이제는 그들에게 아무런 원망도 없으며
다만 해맑은 손주 얼굴을 한번만 보고 싶다며,
- 시집 <사이>(창비.1996)
이시영의 시에서는 아름다운 표현과 자연에 대한 따뜻한 마음씨가 엿보인다. 사물에 대한 섬세한 관찰력을 가지고 맑은 서정이 넘치는 자연 서정시를 많이 썼다. 시조의 수련에서 얻어진 언어적 절제력을 통해 전통적인 시적 감성을 새롭게 변용시켜 신선한 시각으로 절실한 삶을 노래하고 있다. 그의 시에서는 시대와 사회 현실을 경직화된 도식으로 파악하지 않는 70년대 한국시의 감동적인 일면을 볼 수 있다.
죽 음
죽은 명식이형이랑 후식이형이랑 명자누나랑 그리고 아주 어렸을 적 죽어 이름도 없는 동생이랑 아기 두루마기짜리들이 마구 몰려와 엄마 이제는 고생 그만하고 눈비 없는 자기들 나라로 가지고 뽀얀 볼로 칭얼대며 보채는 것을 간신히 달래다가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며,
병실의 햇볕 잘 드는 창가에서 어머니는
마치 남의 얘기 하듯 조용조용히 말하는 것이었어요.
- 시집 <사이>(창비.1996)
【시집】<만월(滿月)>(창작과비평사.1976) <바람 속으로>(창작사.1986) <길은 멀다 친구여>(실천문학.1988) <이슬 맺힌 사랑 노래>(1991) <무늬>(문학과지성사.1994) <바람 속으로>(창비.1995) <사이>(창비.1996) <조용한 푸른 하늘>(솔.1997) <무늬>(문학과지성사.2001) <은빛 호각>(창비.2003) <바다호수>(문학동네.2004) <아르갈의 향기>(시와시학사.2005)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창비.2007)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창비.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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