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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김지하 시선집『타는 목마름으로』

by 언덕에서 2014. 4. 14.

 

 

 

 

김지하 시선집『타는 목마름으로  

 

 

 

 

 

시인 김지하(1943 ~ )의 본명은 김영일(金英一)이며 필명 김형(金瀅), 호는 노겸(勞謙)이다. 전남 목포 출생으로 중동고등학교 졸업 후, 1959년 서울대 문리대 미학과 입학하여 1966년 졸업했다. 1964년 대일(對日) 굴욕 외교 반대 투쟁에 가담, 첫 투옥 후 1980년 출옥 때까지 투옥, 재투옥을 거듭하여 장장 8년여 동안 영어(囹圄)의 세월을 보냈다.

 1982년 창작과비평사에서 발간한 김지하 시 선집으로 1부는 [타는 목마름으로] 등 24편, 2부 「황톳길」 등 20편, 3부 「산정리 일기」 등 12편을 싣고, 4부에는 「명륜동 일기」 등 산문 5편을 수록하고 있다. 이 시 선집은 발간 당시까지의 시를 대충 망라한 것으로서, 시인 자신의 감옥 생활을 바탕으로 한 고통의 기록을 담고 있다.

 

 

어둠속에서


저 어둠 속에서

누가 나를 부른다

건너편 옥사(獄舍) 철장 너머에 녹슬은

시뻘건 어둠

어둠 속에 웅크린 부릅뜬 두 눈

아 저 침묵이 부른다

가래 끓는 숨소리가 나를 부른다


잿빛 하늘 나직이 비 뿌리는 날

지붕 위 비둘기 울음에 몇번이고 끊기며

몇번이고 몇번이고

열쇠소리 나팔소리 발자욱소리에 끊기며

끝없이 부른다

창에 걸린 피 묻은 낡은 속옷이

숱한 밤 지하실의 몸부림치던 붉은 넋

찢어진 육신의 모든 외침이

고개를 저어



아아 고개를 저어

저 잔잔한 침묵이 나를 부른다

내 피를 부른다

거절하라고

그 어떤 거짓도 거절하라고


어둠속에서

잿빛하늘 나직이 비 뿌리는 날

저 씨뻘건 씨뻘건 육신의 어둠 속에서

부릅뜬 저 두 눈이

 

-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 비평사 1982)

 

 

 1969년 <비>, <황톳길>, <가벼움>, <녹두꽃>, <들녘> 등을 [시인]에 발표하며 등단했다. 1975년 아시아ㆍ아프리카 작가회의(로터스-LOTUS) 특별상, 1981년 국제시인회의(Poetry International)의 <위대한 시인상>을 수상, 1985년 미국 명예인권실천박사, 1993년 서강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5년 9월 17일자 일간지에 김지하 시인은 고통과 수난, 압박의 상징이었던 과거의 '지하'란 이름을 버리고 '김형'이라는 필명(筆名)을 사용한다고 하며, 새롭게 태어난 모습으로 활동하고 싶다고 밝혔다. 1999년 이후 명지대 인문대 문예창작학과 석좌교수로 재임했다.

 노벨문학상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으며, AA 작가회의 로터스(Lotus) 특별상(1975), 위대한시인상(세계시인회)(1981), 오스트리아 브루노크라이스키 인권상(1981), 이산문학상(1993), 제14회 정지용문학상(2002), 제10회 대산문학상 시부문(2002), 제17회 만해문학상(2002), 대산문학상(2002), 제11회 공초문학상(2003), 국제저작권관리단체연맹(CISAC) 골드메달(2004), 제10회 ‘시와 시학상’ 작품상부문 <유목과 은둔>(2005), 제10회 만해대상 평화부문(2006), 영랑시문학상(2010) 등 수상했다.

 

 

타는 목마름으로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 소리 호루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 비평사 1982)

 

 

 폭압적 정치상황 속에서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고대하겠다는 신앙적 기다림은 표제시인 [타는 목마름으로]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 이 시집은 [황토]에서의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 자유에 대한 갈망을 신앙적인 확신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이 시는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시위현장에서 자주 불려지던 노랫말이 되었다. 그 때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어깨를 걸고 같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비장한 결의를 다지곤 했다. 독재와 억압의 어둠을 몰아내고 민주주의의 신새벽을 여는 대열에 동참한다는 그 가슴 떨리는 경험을 이 노래를 통해 공유했다.

 

 

서울 길 

 

 

간다

울지 마라 간다

흰 고개 검은 고개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 길

몸 팔러 간다

 

언제야 돌아오리란

언제야 웃음으로 화안히

꽃 피어 돌아오리란

댕기 풀 안쓰러운 약속도 없이

간다

울지 마라 간다

 

모질고 모진 세상에 살아도

분꽃이 잊힐까 밀 냄새가 잊힐까

사뭇사뭇 못 잊을 것을

꿈꾸다 눈물 젖어 돌아올 것을

밤이면 별빛 따라 돌아올 것을

 

간다 울지 마라 간다

하늘도 시름겨운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 길

몸 팔러 간다.

 

-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 비평사 1982)

 

 

 이 시집은 우리 시대가 낳은 세계적인 시인 김지하의 자선 서정시 모음이다. 1961년에 씌어진 「산정리 일기」에서부터 1970년대 중반의 「빈산」 「1974년 1월」 「불귀」 등 시 56편과 「풍자냐 자살이냐」 등 산문 5편을 수록한 이 시집을 통해 비로소 빼어난 서정시인으로서의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내가 요구하고 내가 쟁취하려고 싸우는 것은 철저한 민주주의, 철저한 말의 자유,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백성을 사랑하는 위정자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피와 시민의 칼을 두려워하는 권력을 바란다.“ - <양심선언>(1975년) 중에서 -

 이 글은 정부가 그를 공산주의자로 매도했을 때 이에 맞서 그가 직접 쓴 글이다. 이처럼 그는 독재 권력을 철저히 부정하고 그에 맞서 싸우며 민중의 혼을 담고 있는 시를 창작했다.

 

 

성자동 언덕의 눈

 

                              

지금도 너는 반짝이느냐

성자동 언덕의 눈

아득한 뱃길 푸른 물굽이 굽이 위에

하얗게 날카롭게

너는 타느냐

 

산 채로

산 채로 묻힌 붉은 흙을 헤치고

등에 칼을 꽂은 채 바다로 열린 푸른 눈

썩은 보리와 갈라진 논바닥에 거기서 외치고

거기서 나의 비탄은 새파란

불꽃으로 변한다 너는 타느냐

 

마주한 저 월출산 아래 내리는

저 용당리 들녘에 내리는 은빛

비행기의 은빛 비늘의 눈부심, 독한 눈부심 위에 아아 푸른 눈

침묵한 아우성의 번뜩임이 거기서 타느냐

지금도 너는 반짝이느냐

성자동 언덕의 눈

하얗게 날카롭게 너는 타느냐

 

 

-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 비평사 1982)

 

 

 

 크게 보면 저항시인 혁명가에서 생명운동가로, 다시 예술과 문화의 율려(律呂)운동가로 그는 두 번의 사상적 전환을 거쳤다. 그러나 그를 진정한 이 시대의 사상가로 만든 건 전환의 결말이 아닌 전환의 내용일 것이다. 그 전환의 내용은 하나를 버림으로써 하나를 얻는 선택적 전환이 아닌 포괄적 전환이고, 그 속에는 생명사상, 특히 민중에 대한 사랑과 시대에 대한 책임감이 관통하고 있다.

‘저항에서 생명으로'라고 요약할 수 있을 그 변모가 표나게 드러난 계기는 지난 1991년의 이른바 ‘분신정국'이었다. 젊은이들의 잇따른 분신을 거칠게 질타한 시인의 글이 어떤 신문에 실렸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지하의 변절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생명운동가 김지하와, 투사 김지하를 사랑했던 이들 사이의 오해와 갈등은 양쪽 모두를 상처입혔다. 그 어느쪽이 의도한 바도 아니었다. 그때로부터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른 지금 한가지 분명해 보이는 것은 시인의 의도가 생때 같은 목숨들의 스러짐에 대한 안타까움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 무렵 시인이 발표한 시 `척분(滌焚)'을 다시 읽어보자.

 "스물이면/혹/나 또한 잘못 갔으리/가 뉘우쳤으리/품안에 와 있으라/옛 휘파람 불어주리니/모란 위 사경(四更)/첫이슬 받으라/수이/삼도천(三途川) 건너라."

 

 

황톳길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두 손엔 철삿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밤마다 오포산에 불이 오를 때

울타리 탱자도 서슬 푸른 속이파리

뻗시디뻗신 성장처럼 억세인

황토에 대낮 빛나던 그날

그날의 만세라도 부르랴

노래라도 부르랴


대숲에 대가 성긴 동그만 화당골

우물마다 십 년마다 피가 솟아도

아아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

총칼 아래 쓰러져 간 나의 애비야

어이 죽순에 괴는 물방울

수정처럼 맑은 오월을 모르리 모르리마는


작은 꼬막마저 아사하는

길고 잔인한 여름

하늘도 없는 폭정의 뜨거운 여름이었다

끝끝내

조국의 모든 세월은 황톳길은

우리들의 희망은


낡은 짝배들 햇볕에 바스라진

뻘길을 지나면 다시 모밀밭

희디흰 고랑 너머

청천 드높은 하늘에 갈리든

아아 그날의 만세는 십 년을 지나

철삿줄 파고드는 살결에 숨결 속에

너의 목소리를 느끼며 흐느끼며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 비평사 1982)

 

 민주라는 말이 ‘불온’이라는 말과 거의 같은 뜻으로 해석되던 시절이 있었다. 또한 예속과 굴종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그 속에 안주하면서 행복해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사실 스스로 주인됨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어찌 그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 있겠는가. 하지만 시인은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으로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쓴다고 한다. 기실 민주주의는 특정 이념이나 사상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타는 목마름”의 갈증을 풀기 위해 떨리는 손과 가슴으로, 치떨리는 분노로 쓸 수밖에 없었던 그 이름. 하지만 당시로서는 “남 몰래” 써야 하는 이름, 그나마도 서툴게 쓸 수밖에 없는 이름이 바로 민주주의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림 출처 : 글림작가의 세상바라기 ( http://blog.daum.net/e-klim )

 

 

 요즘의 김지하 시인은 이 사이버와 디지털시대, 그러면서 고대적인 신화의 판타지가 쏟아지고 넘치는 시대 상호모순의 시대에 혼돈에 휩싸인 사회와 지구의 현실을 변혁하고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은 정치와 경제가 아니라, 참다운 상상력과 미적 교육, 미학적 창의력이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