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타의 추억
<내가 이등병 때의 내무반 단체사진이다.
사진 속에는 매일 후임병을 구타해야만 잠이 온다는 악마같은 선임병들이 상당수 있고 구타에 정신이상을 일으켜 의병제대한 이도 있다>
1984년 가을, 무사히 3년간의 군복무를 마친 나는 이듬해 대학 3학년에 복학하여 사회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아까운 청춘을 배울 것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곳에서 허비한 점은 불만스러웠지만 어차피 치러야할 내 인생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라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여름방학인 어느 날 저녁, 낮선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거기 윤❍❍ 병장 있어요?”
“아, 전데요. 누구십니까?”
“어, 윤병장이야? 나, 기억해요? 김 대위야, 김병노!”
“아니, 김 대위님? 어찌 전화번호를 아시고?”
“하하, 자네 제대하면 만나려고 전화번호를 수첩에 적어두었지.”
김 대위는 내가 복무하던 부대의 보급 장교였는데 그간 대위로 진급한 모양이었다. 육사나 ROTC 출신이 아닌 2년제 육군제3사관 학교 출신의 그는 나보다 3살가량 위였는데 직속상관은 아니었지만 유달리 나를 귀엽게 대해주었던 일들이 조금씩 기억났다.
1982년 여름, 경남 창원에 위치한 예비사단 신병교육대에서 그야말로 혹독한 신병교육을 받고 도착한 ❍❍사단의 말단 대대급 예하부대는 말로만 듣던 1960년대 군대를 경험하는 느낌이었다. 전입한 익일 아침 내무반장이 실시한 아침점호에서는 야전삽과 각목이 날아다녔다. 하사와 병장들은 엎드린 후임병들을 야전삽으로 무식하게 구타하기 시작했는데 이유는 ‘부대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는 막연한 이유였다. 맞다가 쓰러져 신음하는 후임병들에게는 군화발이 가슴과 복부를 십수차례 가격했고 나를 비롯한 신병들은 그날은 열외였지만 공포 속에서 자대에서의 첫날을 맞이했다. 그날 나와 동기들은 제대하는 그날까지 후임병을 절대로 때리지 말자는 약속을 했고 실제로 그 약속을 이행한 점을 지금까지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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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날 그 순간은 공포 자체였다. 앞으로 26개월을 보내야 할 자대가 이런 부대라니……. 하는 생각에 앞날이 캄캄하고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군입대하여 자살하거나 탈영하는 사병들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그런 상태에서 내무반 청소를 하고 있는 우리 앞에 오른편 가슴에 공수 마크를 단 중위가 한 명 나타났다. 훈련소에서 장교는 하늘과 같은 존재였던지라 우리는 지레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너희가 새로 전입온 신병들인 모양이구나.” 우리는 복창소리를 최대로 하여 “예! 이병! ❍❍❍!"식으로 대답을 했는데 그는 조용히 웃으며 ”너무 그럴 거 없다. 군대 별 거 있나? 긴장하지 말라.“ 하면서 소탈하게 다독거려 주었다. 그가 바로 제대한 내게 전화한 김병노 대위이다. 내가 제대할 무렵에 그는 중위에서 대위로 진급했고 마침 우리지방의 부대에서 배치되어 내게 전화를 했던 것이다.
얼마 후 시내에서 만난 김대위와 나는 맥주집에서 회포를 풀었다. 그는 명문대학에 다니는 옛 부하가 자랑스럽다며 박봉임에도 여러 차례 술을 샀다(나는 학생인 관계로 당연히 돈이 없었다). 술이 상당량 들어가자 서로 주고받던 대화 중에서 구타에 관한 불편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를 비롯한 후임병들이 당시 선임병들로부터 당했던 구타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이었는지를 이야기하자 그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는 모습이었다. 특히 김병노 중위가 일직사령인 날, 그의 일석점호가 끝나고 당직실로 돌아가는 순간부터는 지옥과 진배없는 가혹한 얼차려와 구타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지휘관인 대대장, 중대장, 장교들 모두 쉬쉬했지만 구타에 시달리다 못한 내 선임 한 명은 정신분열증을 일으켜 국군통합병원 정신과에 입원했다가 결국 의병 제대를 했다. 그는 내 이야기를 쭉 들으면서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 구타가 있을 줄은 알고 있었다. 필요악과 같은 것이니까. 그러나 윤병장이 이야기하는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 그걸 이제야 알게 되다니 미안하고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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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군대에서 발생하는 가혹행위로 인한 사건들은 어느덧 국가를 흔드는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해병의 총기난사사건, 휴가길 육군병사의 잦은 자살사건 등의 중심에는 인격을 무시하고 짓밟는 ‘구타’가 주원인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어제 조간신문에는 전방부대의 모사단장이 갓 전입해온 육군 소위들을 이등병으로 위장시켜 예하부대에 잠입시켜 병사들의 실태와 애환을 파악한 내용이 실려 있었다.
‘소대장 이등병 체험’을 마친 신임 장교 6명이 함께 포즈를 취했다. 이들은 15일부터 나흘간 이등병 계급을 달고 경기도 양평의 20사단 신병교육대에서 훈련을 받았다. [연합뉴스]
(전략) 사병으로 위장한 이들 초급장교들이 증언한 내용에는 "선임병 앞에서 담배를 피울 때는 왼손으로 피워야 한다. 오른손은 언제든지 선임병에게 경례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무반(생활관)에서 과자 파티를 마치고 나면 이등병은 남은 과자를 모두 먹어야 했다" "화장실 청소는 무조건 이등병 몫이다"는 등 군(軍)에서 원칙적으로 금지한 병 상호 간 명령·지시·간섭에 대한 내용이 많았다. 결국 "계급에 따라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이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등병으로 위장해 병사들과 함께 내무반에서 생활한 이재형 소위(앞줄 왼쪽)가 분대원들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다. ' 위장 입대'한 장교들은 "병사들의 고충을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고 입을 모았다. /육군 제공>
실제 군 인권센터(mhrk.org)에 들어온 상담 사례만 보더라도 ▲회식 때 짜파게티를 잔뜩 끓여놓고 남는 걸 이등병이 다 먹으라고 강요한다 ▲이등병은 생활관 PC를 마음대로 쓸 수 없다 ▲옷을 다려라, 라면을 끓여오라는 등 잔심부름을 시킨다 ▲잘못을 하면 잠을 재우지 않으며 괴롭힌다는 등 비슷한 하소연이 줄을 이었다.
박종훈(25) 소위는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나니 긴장감과 두려움, 설렘을 느꼈다"면서 "이전에는 간부가 되는 방법만 교육을 받았는데, 이후로 병사들을 유심히 관찰하게 됐다"고 전했다. 정필조(25) 소위는 "간부들이 세세한 걸 챙겨줄 때 병사들이 감동을 받았다"며 "앞으로 소대장이 되면 병사들과 친해져서 진짜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도록 만들겠다"고 했다.
위장 잠입한 소위 중의 한명인 박 모 소위는 “신병 체험 후 병사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됐고, 그들의 행동도 유심히 보게 됐다”며 “일주일 먼저 입대한 이등병이 먹을 것도 챙겨주면서 잘해줬는데 마지막까지 사실을 털어놓지 못해 미안했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7/22자)
위의 기사를 읽으니 이십 몇 년 전에 재회했던 김병노 대위가 생각났다. 선량한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지휘관, 장교는 자신이 사병들의 병영생활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판단해도 사실은 그것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기사의 신임장교들이 파악한 문제점들이 불씨가 되어 전군에 퍼져나가 곪디 곪은 병영의 문제점들이 조속히 해결되기를 바란다. 내가 제대한지 30년이 가까워지는데 우리 아들들이 복무하고 있는 군대에서는 획기적인 변화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아 답답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김병노 대위님, 이 포스팅을 보시거던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는 제가 술을 사야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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