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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용서할 수 있을까?

by 언덕에서 2014. 8. 21.

 

 

 

 

 

용서할 수 있을까?

 

 

 

 

군대의 구타 사건을 다룬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의 한 장면

 

 

나는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는 이론 중 성선설(性善說)보다는 성악설(性惡說)이 타당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물론 예수나 석가처럼 인류에게 밝은 빛을 주신 분이 계셨고 슈바이처나 장기려 박사, 이태석 신부처럼 인간에 대한 한없는 사랑으로 살다 간 선한 분이 적지 않으나 7:3 또는 8:2의 비율로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보다 압도적으로 많다고 나는 믿고 있다. 인간의 근본 성정(性情)은  바뀌지 않는다. 그 본성(本性)은 특히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충격적 사건이 반복될 수 있고, 그때마다 인간들은 또 충격을 받는다.

 

 

 “나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지만, 만약 태어나야 한다면 궁벽한 산골에 가서 완벽하게 정직한 삶을 살고 싶다.” 몇 년 전 타계한 작가 고 박완서 선생은 생전에 이런 취지의 말을 남겼는데 그것은 선하지 못한 뭇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에 기인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30여년 전, 훈련소를 마치고 자대 배치 받은 후 처음으로 외곽보초 근무를 나갔을 때였다. 예나 지금이나 선임병과 신병이 2명 1조가 되어 경계 근무를 서는 것이 대부분 부대의 상례다. 그날 신병인 나와 함께 근무를 선 이는 제대를 일년 정도 앞둔 하사였다.

‘池 하사’.

 당시에는 단풍 하사라고 해서 상병에서 시작하여 하사로 제대하는 의무 복무제가 있었다. 

 대뜸 제대가 얼마 남았느냐고 묻기에 남은 개월을 이야기했더니

 "내가 너 같으면 자살하겠다."며 혼자서 웃었다. 

 당시 우리 부대의 내무반은 '하사'파와 '병장'파 사이의 내부 다툼이 치열했다. 하사파는 군대의 위계 질서의 기본은 계급인데 같은 기간의 군대 생활을 하고 있더라도 병장이 하사에게 말을 놓은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병장파는 반대로 군대 생활 2년을 한 상병이 이제 금방 입대한 단기 하사파 상병과 같은 서열이어서야 되겠느냐는 논리였다. 그래서 절충안으로 복무 기간 6개월 범위 내에서 하사파와 병장파간에는 상호 지시나 명령을 않는 등 간섭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었다. 池 하사'는 충남 공주에 있는 국립 사범대학을 다니다 입대한 예비 교사였는데 얼굴이 역삼각형이고 양 미간 사이가 심하게 벌어진데다 눈 바로 아래 검은 점이 있어 서늘한 느낌의 공포를 주던 선임병이었다.

 전입 첫날 아침, 기상 후 점호를 취하게 되었다. 모포를 개고 옷을 입고 구두끈을 맨 후 연병장에 모두 집합했다. 이후 연병장을 열 바퀴 구보하고 내무반으로 도열하여 들어가던 참이었다. 내무반장인 단기 하사가 인적이 드문 탄약 창고 뒤편으로 병력을 이끌고 있었다.

 

 

 

군대의 구타 사건을 다룬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의 한 장면

 

 “전체, 대가리 박아!”

 50명의 병력 중에서 40명이 원산폭력 자세를 취했고 나머지 열 명은 열외 하여 지켜보고 있었다. 이른바 말년 병장과 하사들을 제외한 전원이 폭격 대상이었다. 나와 동기 세 명은 갑자기 몸을 떨면서 잽싸게 머리를 땅에 막았는데 그때 병장 한 명이 옆에 와서 우리 세 명을 일으켜 세웠다.

 “너네 세 명은 일어서!”

 이른바 막 전입한 신병이기에 이번은 열외 되는 특혜를 받은 것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병장 한 명과 하사 한 명이 날아다니듯 몸을 움직였다.

‘펑! 펑! 펑!’

 구둣발로 원산폭격 중인 이들의 배와 가슴을 마구 차는 것이었데 저러다 죽지 않을까 하는 공포심에 떨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다른 병장 하나가 각목과 삽을 들고 왔다. 이번에도 하사 한 명과 병장 한 명이 삽과 각목으로 엉덩이를 쳐대기 시작하였다.

 그 서늘하고도 무서운 얼굴의 교사 예비생 '池 하사'는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구둣발을 날리고 있었다.

 전입 이틀째 날, 일병 계급의 선임병들이 더블 백을 풀어주면서 관물대 정리를 해주었다. 밥 먹기 위해 식당에 줄을 서니 내무반장이 우리들 신병을 열외 시킨 후 의자에 착석시켰는데 선임 일병들이 우리들 신병 앞으로 밥을 갖다 주었다. 뿐만 아니라 구두를 닦아주고 옷을 다려주는 등 여러 부문의 편의를 돌봐주었다. 나를 포함한 세 명의 신병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어느 부대든 신병이 오면 한 달 정도는 열외를 해주다가 이들이 부대 분위기를 파악할 정도의 기간, 즉 한 달 정도가 지나면 본격적인 고된 밑바닥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각오는 했지만 예상한 몇 배의 통증을 느끼며 힘들게 그 밑바닥을 버텼던 기억이 난다.  

 추석날 저녁, 탄약고 보초 근무를 마친 후 취사장에 혼자 밥 먹으러 갔는데 깜깜한 그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혼자서 국통의 고기 건더기를 남 몰래 건져 먹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선임, 자신이 나 같으면 자살하겠다던 池 하사였다. 제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말년 하사가 숨어서 고기국의 건더기를 훔쳐 먹고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화들짝 경례를 하고 취사장을 나왔고 그날 나는 저녁을 굶었다.

 사회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 교수는 이미 40여 년 전 감옥 실험으로 선량한 인간이 악마가 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그는 스탠퍼드대학에 감옥을 만들어 놓고 24명의 학생을 반으로 갈라 간수와 죄수 역할을 맡겼다. 모두 지원자들이었고 간수와 죄수도 제비뽑기로 나눴다. 그런데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시키지도 않았건만 간수들은 이내 죄수들에게 가학적이 됐다. 실험이 진행될수록 간수는 잔인해졌고 죄수는 비굴해졌다. 당초 2주로 예정됐던 실험은 6일 만에 중단됐다. 참가자들의 폭력성과 야만성이 위험수위를 넘어선 탓이다.

 그 시절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후임병을 때리기 시작하다보면 그 행위에 재미를 느껴 습관이 되고 폭행이 계속될 때마다 희열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 고참인 선임병 사이에서는 미친 듯 때리는 동료를 제지하는 이들도 생긴다.

 요즘 신문을 보니 어떤 병사는 맞다가 자살하기도 하고 어떤 병사는 맞다가 죽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병사는 자신이 선임병이 되었음에도 차별을 받다 참지 못하고 총기 난사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음을 보도로 알게 되었다.

 

 

 

 

군대의 구타 사건을 다룬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의 한 장면

 

 

 

 

 그러한 장면들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든 이가 있었다. 모두들 그를 죽일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한 이가 기억에 남는다. ‘김○○ 하사’라는 자다. 

 충청북도의 모 도시에 위치한 사립 사범대의 체육교육과를 다니다 입대했다고 했는데, 말대가리와 같은 얼굴에 쭉 째진 눈매, 늘 핏발이 가시지 않은 눈자위 등이 지금도 그 얼굴과 말씨까지 기억에 남는다. 내가 일병이 되었을 때  내무반장을 하던 자로, '池 하사'와는 동기였다. 그해, 나는 그에게서 악마의 원형을 보았다. 당시 중령이 지휘하던 대대급의 후방 부대는 현역 사병이 50명가량이었는데, 그 중 20명은 정보. 작전, 예비군 교육계획, 인사. 군수 등의 행정업무를 맡고 있었고 나머지는 예비군 조교 업무를 맡았다. 문제는 행정병들이었다. 이들은 주간에는 행정병이고 야간에는 내무반 청소, 식기 닦기, 보초, 중대장 지시사항, 사역 이행 등을 했는데 야간이 문제였다. 각자가 모시는 참모 장교의 지시사항을 이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보면 내무반에 늦게 들어가는게 다반사인데 그것을 빌미로 매일 구타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어떤 날은 그에게 열 번이나 뺨을 맞은 적이 있었다. 자, 상상해보시라. 한 번 맞을 때 열 대 정도를 맞는다면 열 번이면 그날은 뺨을 백 대 맞았던 거다. 아마 혼자였으면 나는 자살을 하고 말았으리라는 생각을 지금도 하곤 한다. 요즘처럼 SNS가 발달하고 휴대폰이 있었다면 제대 후 어떻게든 찾아서 그에게 복수하러 무슨 짓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다행히 비슷한 처지의 동기와 함께 매일 수십 대의 뺨을 맞았기에 서로 위로를 하며 야만과 폭력의 그 힘든 고비를 넘겼던 것이다. 나보다 5개월 빠른 선임은 야간에 잠자는 시간을 쪼개어 영어 공부를 한 탓에 미움을 받아 거의 매일 각목으로 3~40대의 매를 맞으며 앙버티고 있었다.  내 동기는 내게 모포 속에서 속삭이곤 했다.

“내가 제대하면 저 새끼를 찾아가서 죽여 버리고 말거야!”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려보겠다. 池 하사. 내가 일병이 된지 몇 달 후 그가 제대를 하는데, 부대원들이 모두 모여 내무반에서 위병소까지 도열해서 환송했다. 후임병들과 악수하며 지나치던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내 손을 잡으며

 "너 ○○대학교 다니다 왔다고 했지? 언제 내게 한 번 찾아와라!"

하는 것이었다.

 

 

 

 

 

 그는 나름 국립 사범대 다니다 입대한 관계로 나를 자신과 비슷한 부류로 보는 듯했다. 요즘 신문과 방송을 달구는 기사를 읽으니 갑자기 그 시절 그 장면이 생각났다. 벌써 30년이 지났다. 그는 교사로서 성공했을까?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가 속한 조직 내에서 계속 폭력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박노자*는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는 책에서 지적했다. 한국에서는 군대에서 배운 폭력이 사회의 제 부분이 퍼져있다고. 정치, 종교, 교육, 문화……. 그는 이렇게 말했다.

 

 타인에 대한 적극적인 폭력을 가르치는 군사문화, 굴종과 타협을 강요하는 대학 사회의 현실, 외국인 노동자들을 '우리'의 선 밖으로 내몰고 있는 인종주의적 편견 등은 나의 눈에 비친 대한민국 사회의 보이지 않는 폭력이다…….

 

 군대 폭력을 지적하는 일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런 지적이 수없이 되풀이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폭력적인 병영 문화는 변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군에 자식을 보낸 부모와 복무자가 절망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 이것도 마비 사회의 한 단면이다. 이 마비를 뚫을 방법이 정말로 없는 것일까?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바꿀 의지가 없는 곳에서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군대 폭력 그 자체는 정치적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청년들을 죽이는 군대를 어찌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정치 이상의 문제다. 군대 폭력은 군대의 현안임과 동시에 사회적 문제고 정치적 문제다. 청년들을 어떻게 키우는가에 한 사회의 미래가 달려있다. 어떤 인간을 길러내는가에 한 나라의 명운이 걸려 있다. 청년들이 어떤 사회에서 어떤 인간으로 자라는가에 따라 개인의 운명이 달라지고 사회 공동체의 삶의 품질과 행복이 좌우된다. 제대로 된 사회라면 반인간적, 반사회적, 반문명적 행위를 방치할 수 없고 조장할 수도 없다.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하는가, 어떤 변화가 강구되어야 하는가 - 정치권은 이런 문제를 숙고하고 정책의 차원에서 그 해법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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