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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결혼식 전후에 있었던 일들

by 언덕에서 2014. 5. 2.

 

 

 

결혼식 전후에 있었던 일들

 

 

 

 

 

 

결혼은 어떤 삶에 대한 다른 삶의 개입이다. 따라서 그 결합은 어슷비슷한 두 개의 원이 만나는 것보다는 들쭉날쭉한 두 개의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것이 더 단단할 것이다. 나의 단점과 그의 장점이 맞물리고, 또 그의 능력과 나의 무능이 맞물리고……. 사랑이니 뭐니 서로의 감성을 강조하지만 기실 그것들은 딱 일 년이면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가족의 강권으로 결혼을 결정하고 결혼식 날짜를 잡았지만 결정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신혼여행은 어디로 갈 것인 지부터 결혼식은 어떤 장소에서 할 것이며 주례는 누가 설 것인가, 혼수와 예물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 까지 말이다. 큰형이 나서서 그런 사항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신혼여행은 제주도로 가는 것이 좋겠다, 사람들 이야길 들어보니 신혼부부 단체 상품이라는 게 있는 모양인데 그게 재미있다고 하더라, 그리고 결혼식장은 사람 붐비는 예식장 보다는 조용한 호텔 예식부가 좋을 것 같다, 주례는 같은 학과(學科) 출신이니 나이 지긋한 학과 교수님에게 부탁하도록 해라, 혼수와 예단은 상대방에게 묻지 말고 알아서 하도록 하는 게 좋겠다, 과다하게 혼수비를 들이지 말고 그 돈으로 빨리 일어서는 게 중요하다…….

 이것저것 준비하다보니 결혼식날이 한 주일 남았는데 주례를 구할 수 없었다. 모교에 가서 세 명의 교수에게 각각 주례를 부탁했더니 입대한 아들 면회 때문에, 자신이 산행 가는 날이라서 등등의 이유로 거절했다. 갑자기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몇 달 전 학과 조교로부터 학과 발전 기금을 요청받았는데 거절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주례로 생각하고 있던 분은 고 3때의 담임선생님이었다. 매사 열정적이시고 정직하셨으며 제자들을 친 자식처럼 사랑하는 분이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등학교 은사님 댁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주례를 요청하는 내 이야기를 듣자말자 단칼에 거절하셨다. 이유를 여쭈어보니 모교에서 20년 이상 고3 학생들만 가르치시다 그해부터 같은 사학 재단의 여중 1학년 국어교사로 전근되신 것 같았다. 선생님께서는 당신이 좌천되었다고 생각하시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중이셨다.

 “이렇게 잘 자란 제자에게 중학교 국어 교사 따위가 주례를 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정녕 주례를 구할 수 없으면 지금 내가 근무하는 여중 교감 선생님에게 부탁해 볼 테니 그렇게 하도록 해라.”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결혼은 일생에 한번 있는 일이기에 신랑 신부가 존경하는 분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알지도 못하는 교감 선생님이 주례를 서시는 게 제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다른 곳에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선생님 댁을 나왔는데 주례 구할 일이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대학 선배, 그러니까 학과의 선배 중 친한 분에게 고민을 이야기하니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 어용교수들 돈 생기는 것 아니면 일부러 시간 낼 사람들이 아니지. 그리고 자신들 비위에 맞지 않으면 제자고 뭐고 병적으로 싫어하는 인간들이잖아. 내가 어디 한번 알아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게.”

하며 안심(?)시켜 주셨다. 

 

 

 이흥록 변호사님

 

 

 며칠 후 선배의 연락을 받고 만난 분이 이흥록 변호사님이시다. 금년에 송강호가 출연하여 크게 흥행에 성공한 ‘변호인’이라는 영화가 나올 때 ‘부림 사건’에 대해서 내역을 알고 있는 분들은 영화 속 송강호 역 주인공의 실제 인물이 故 노무현 대통령이 아니라 이흥록 변호사였다고 증언했다. 그 부림 사건 변호인단 대표 변호사가 이흥록. 김광일 변호사였고 노무현 변호사는 변호인단 중의 일원이긴 했지만 서열상 말석에 있어서 실제 그 사건의 법정에서 발언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이흥록 변호사님은 당시 선배와 내가 다니던 성당의 사목회장이었고 동시에 DJ가 이끌던 평화민주당의 지역구 위원장이기도 했다. 만나서 인사를 하자 이 변호사님은 내게 명함을 주셨다. 명함은 앞뒷면이 작은 글자로 빼꼭하게 적혀있었는데 변호사 경력, 평화민주당 중앙상임위원장, 평화민주당 지역구 위원장, 민주 변호사회 부산 지부 ……. 등 선거용 명함임을 알 수 있었다.

“야고보 형제, 약속을 해놓고 내가 결혼식 주례에 안간 적은 한 번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시며 흔쾌히 수락해주셨다.

 선거철도 다가오고 해서 이 변호사님이 결혼식 당일 안오시면 어떡하나 걱정을 한 것도 사실이다. 이 변호사님은 DJ가 만든 정당 소속 지역 위원장으로 반 DJ 정서가 뿌리 깊은 부산지역 중심부에 출마하여 누가 봐도 승산이 없는 싸움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국회의원 선거 유세 일정으로 매일 분주했기 때문이다. DJ는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YS에게 패배한 후 '정계에서 영원히 은퇴하겠다'는 발표를 하여 외유(外遊)했다. 이후, 그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번복한 후에 다시 대통령에 출마했기에 '거짓말쟁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다행히 결혼식 당일 이 변호사님은 아슬아슬하게 도착하시어 주례석에 서셨다.

 사회자인 친구 A가 결혼식을 진행하면서 "오늘 결혼식의 주례는 이흥록 변호사이십니다."라고 소개하자 이 변호사님은 주례석에서 사회자석으로 가더니 줄 그은 명함을 주면서 "다시 해요. 줄친 부분을 꼭 읽으세요." 라며 귓속말을 했다.

 주례의 엄명(嚴命)에 친구 녀석은 다시 '주례 소개'를 했다.

 "오늘 주례는 인권 변호사이며, 민주 변호사이시며, 평화민주당 중앙상임위원장, 평화민주당 부산시당 위원장, 평화민주당 부산진구 지역구 위원장, 천주교 부산교구 당감성당 평신도회 회장, 민주 변호사회 부산지부……. 이신 이흥록 변호사이십니다!"

 결혼 후 직장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시골에서 결혼식에 참석차 오신 양가의 나이 지긋한 친척들은 "저 양반, 거짓말쟁이 김대중(金大中)이의 똘마니구만!" 하면서 우르르 밖으로 나가버린 분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 변호사님은 그간 선거 유세 일정이 과했는지 주례사 중 실수를 연발하셨다. 예를 들면 내 이름을 부르면서 신부 윤○○양이라 하시더니 아내 이름을 신랑 김○○군이라고 부르기도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해소시켜 보려고 나름 분투하는 살인적인 유세 일정에 피로가 쌓였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아내와 나는 둘 다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자인데 시골의 어른들이 많은 관계로 불가피하게도 성당에서 결혼식을 갖지 못했다.

 로마교회법에 따르면, 가톨릭 신자는 가톨릭 신자와 혼인을 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원칙인데,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리더라도, 반드시 성당에서 증인을 대동하고 사제(司祭) 앞에서 혼배를 보아야 한다. 이 혼배를 통해서 상호간의 종교생활을 자유롭게 보장할 것과 자녀가 태어나면 가톨릭에 입교하는 것을 막지 않겠다는 것 등을 서약하며 그 혼인을 로마교회법상 유효한 혼인으로 인정해 준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해서 성당에 신청하여 관면혼배성사(寬免婚配聖事)를 받기로 했다. 증인인 대부(代父)와 대모(代母)는 이흥록 변호사님을 소개해준 선배 형과 어머니 두 분이 서기로 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일 주일 후에 관면혼배성사가 이루어졌다. 결혼 예물로 우리 집에서는 다이어반지를 준비했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막내 딸이었던 아내는 귀금속 반지를 준비할 형편이 되지 못해 아주 저렴한 손목시계 하나를 준비했다. 성사 전 수녀님에게 예물을 제출했는데 수녀님은 은빛 쟁반에 예물을 담아서 제대(祭臺)에 올려 성사가 시작되었다. 

 군종 신부(軍宗神父)로 오랜 기간 사목하다가 지역 교구로 처음 부임했다는 주임 신부님은 ‘예물이 반지여야 하는데 왜 시계가 있느냐’며 와락 역정을 내면서 예물 접시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성당에서 결혼식을 하지 못한 죄인들이 예물(禮物)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는구먼! 혼배성사의 예물은 반지여야 하는 건 상식 아니오? 기본적인 자세가 되어있지 않아!”

 하며 다시 화를 버럭내시더니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축복 받아야 할 성당에서의 혼배성사가 엉망이 된 것이다. 옆에서 지켜보던 수녀님은 자신이 미리 챙기지 못한 불찰이 크다며 자책하며

“군대에서 오래 계셨기에 저러신 거니 이해하셔요.”

라고 하시며 안절부절 힘들어 하셨다.

 문제는 아내였다. 친정이 극도로 가난한 관계로 다이어반지나 금반지를 준비할 형편이 되지 못했고 ‘혼수나 예물은 조선시대의 전근대적인 유물에 불과하다’는 나의 의견에 감동한 것도 사실이었는데 친정의 곤궁함이 적나라하게 들춰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혼부부에게 처음으로 닥친 세상의 제도와의 만남이기도 했다. 관면 성사를 받기 위해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려온 나도 짜증과 화가 났다. 과연 당일 그 자리의 사제가 다른 신부님이었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의로 그런 것도 아니었는데 ‘사랑’을 전파하는 베드로 사도의 후예가 보인 행동은 누가 봐도 과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성경에는 원수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어주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로부터 3년 후, 새로 부임한 젊은 보좌 신부님이 내게 면담을 청하셨다. 그 사건의 소문이 성당 교우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져있었던 모양이다.

 성당 뒤편에 자리한 일식집에서 보좌 신부님은 소주를 한 잔 입에 털어놓으시더니 내게 말했다.

 “그 신부님, 군종신부를 오래해서 권위 의식이 쎈 분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벌어졌지요. 형제님, 제가 대신 사과하면 안 되겠습니까?”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나는 답했다.

 “하하, 안됩니다. 그 신부님이 직접 제게 사과하셔야 됩니다…….”

 그로부터 신자로서 성당에 다시 돌아오는데는 10년이 걸렸다. 10년 동안 냉담자(冷淡者)로 살았던 셈이다. 그런데 천주교 교리의 세밀한 규정에 의하면 지금도 나는 여전히 날라리 신자로 살아가고 있다.

 교회라는 제도권 내에서만 인간의 구원이 가능한 것일까?  진정한 크리스챤이란 소속 교회의 유무(有無), 세례의 유무 등의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할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을 한다면 현대의 거대한 공룡과 같은 성당, 교회에 오실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형식이나 제도라는 테두리를 타파하기 위해서 온몸을 바쳐 싸우셨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빈곤한 곳, 가장 소외되고 비참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 오셔서 그들의 눈물을 닦으실 것이다. 자신을 믿지 않지만 선량하게 사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그곳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축복을 내릴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날이 계기가 되어 '참 그리스도교'는 교회 없이도 가능하며, 그리스도교의 궁극적 소망인 구원 또한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를 깊게 생각케 했다. 또한 불교와 이슬람교 등 타종교를 편견 없이 광범위하게 공부하게 만들어 준 좋은 계기이기도 했다. 늦었지만 25년 전 그날 관면 성사를 거부한 신부님께 감사의 말씀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