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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어떤 결혼식 (상)

by 언덕에서 2014. 4. 11.

 

 

어떤 결혼식 (상)

 

 

 

 

 

성적(性的)인 것에의 의지는 인간의 의지 중 가장 치열한 것 중에 하나이며, 그것에 대한 보상 또한 인간을 가장 크게 격려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여자에게 결혼이란 사랑의 무덤이라고 한 말은 어디까지가 맞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정의 무덤인 것은 확실해보였다. 성 개방이란 우리가 힘들여 버리고 온 동물의 길을 그 방면에서만은 되돌리려는 것과 같아 보였다. 왜냐하면 그 주장을 가장 완벽하게 실천하고 있는 것은 동물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자주 연락하지 않지만 대학 시절 서클에서 사귄 S라는 친구가 기억난다.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한 몸을 바치겠노라고 버릇처럼 떠들던 그는 깡마른 체구에 말술을 마시는 술꾼이었다.  군대에 입대하기 전 눈인사로만 알고 지냈던 그와 나는 복학 후 본격적으로 친해졌다. 딱히 분명한 이유는 없었지만 그와 내가 친하게 된 계기는 서로가 술을 좋아한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술을 마실 때마다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처럼 그 술자리에 찾아왔다. 한 번 마셨다하면 밤을 새야하는 그를 두려워하는 서클 동지들은 그를 빼고 모임을 가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서클이 아닌 개인적인 용무 때문에 학교 앞에서 술을 마실 일도 있었다. 예를 들면 학과 급우들과의 모임이라든지 아니면 고교 동창들과의 오랜만의 해후인 경우가 그것이다. 복학 후에는 취직 공부를 해야 하기에 간단하게 한 잔하고 귀가하려고 하면 길목을 지키고 있는 이가 바로 S였다. 2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복작거리는 캠퍼스 앞 시장통의 여러 대폿집은 저녁이면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볐으나 그는 귀신처럼 나나 동료들이 있는 술자리를 찾아왔다. 그는 술을 조금이라도 마시면 얼굴 특히 코가 빨개지는 특징이 있었는데 예의 그 빨간 코를 번들거리며 환희에 찬 얼굴로 한 잔 더 마실 것을 '악마처럼' 강요하는 것이 상례였다.

 소문에 의하면 학생운동의 이력 때문에 입대 전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붙잡혀서 고초를 꽤나 당한 모양이었다. 대공분실 이런 곳에서 자신이 속한 모임의 멤버를 불어라는 취조를 당한 모양인데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멤버들의 이름을 모두 누설하는 탓에 피해를 본 친구들이 많았다는 소문이었다. 그런 탓에 그 바닥의 학생들에게는 기피 인물이 되고 있었다. 내가 복학한 후 우리 서클은 해체되었지만 상호간의 친분만은 유지하기 위해 더러 만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그가 참석하여 나와도 친하게 되었다. 그와 나는 서로가 개인적인 취향이라든지 정서적인 면에서는 맞질 않았다. 단지 그리고 오로지 술을 좋아하는 탓에 친해졌다고 하는 표현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나는 그가 취했을 때마다 두 눈을 이글거리며 내게 습관처럼 떠들던

 “윤형! 나는 싸울 겁니다! 온 몸을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불태우고야 말겠습니다!”

라던 모습이 당시에는 웬지 좋았다.

 그리고 미문화원이 타 대학 학생들에게 점거 되던 날, 온 몸을 떨면서 미제의 이중대인 일본 대사관을 점거하자고 하던 날도 기억한다. 세월이 흘러서 알게 된 거지만 운동권에 민폐만 끼쳤던 자신에 대한 자책감의 표현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저녁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손이 덜덜 떨리면서 눈을 빤짝이게 만드는 술의 유혹을 그는 이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확실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복학하고 처음으로 중간고사를 치루고 맞이하는 휴강 기간이었다. 그날따라 4월의 봄빛은 따사로웠고 모처럼 맞이하는 휴식이 감미로운 오후였다. 서클 멤버들과 연락이 되어 학교 뒷편 인적 드문 잔디밭에 앉아 있는데 커다란 가방을 든 그가 우리를 찾아왔다. 함께 모인 우리는 며칠 전 민주화를 외치며 분신자살한 서울대생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그를 발견한 선배가 물었다.

 “그렇게 큰 가방은 왜 들고 왔니?”

 “아, 이거요? 집에 댓병 소주가 있길래 들고 왔지요. 하하 ~~”

 맙소사! 녀석은 커다란 스포츠 가방에 무거운 댓병 소주를 두 병이나 넣고 등교를 한 것이었다. 그것을 본 후배 한 명이 학교 앞 시장통에 내려가 튀김과 부침개 한 뭉텅이와 초고추장, 새우깡 등속을 사왔고 어두워지는 숲 속에서 술파티가 열렸다. 네 명이 댓병 소주를 두 병이나 마시려니 시간이 무척이나 오래 걸렸다. 녀석은 댓병에 술이 남아있는 것을 확인하더니 쪼르르 도서관으로 향했는데 잠시 후 여학생 한 명을 데리고 왔다. 김태희 급의 눈부신 미모를 한 예비 교사인 4학년 여학생이었다. 사범대 다니는 미모의 재원을 사물놀이패 서클에서 만났다고 했는데 특유의 입심으로 꼬신 모양이었다.  

 이후 학교를 졸업하고 각자 취업했지만 나와 녀석과의 인연은 계속되고 있었다. 공과대학 기계설계학과에 다니던 S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고 말하던 기업인이 만든 회사에 엔지니어로 취직했다.

 졸업 후 1년이 지나 다들 결혼을 생각할 무렵 녀석에게서 연락이 왔다. 전에 만났던 그 여학생 후배와 다음달에 결혼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한데 결혼식 사회자와 함잡이가 필요한데 내가 그 역할을 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 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래서 토요일 오후, 주 함잡이인 나, 후배 C(군 입대 전 진하해수욕장에서 맥주 2상자를 함께 마셨던 이로, 전에 썼던 ‘우기(雨氣)’라는 이야기에서 주인공으로 나왔던 친구다), 녀석의 직장 동료 해서 3명이 함(혼인 때 신랑 쪽에서 채단(采緞)과 혼서지(婚書紙)를 넣어서 신부 쪽에 보내는 나무 상자)을 들고 다 떨어진 포니차를 한 대 몰며 양반 동네로 유명한 경남 밀양의 신부 댁으로 향했다.

 

 

 

 옛날부터 함은 다복한 사람이 지고 왔고, 신부 집에서는 함잡이(함진아비)를 술상과 떡을 차려 성대히 접대하고 노자(路資)까지 주는 풍습이 있었다. 허나 언제부터인가 풍습 본래의 뜻과 예를 벗어나 함 받는 날, 짓궂은 신랑 친구들이 신부집 밖에서 계속 돈을 요구하며 신부 가족들과 실랑이를 벌여 싸움까지 이르게 되기도 했다. 나를 비롯한 3명은 신부 댁에서 함값을 확실하게 받고야 말겠노라고 벼루고 있었다. 신부집이 동네의 유명한 부잣집인 만큼 모처럼 큰돈을 얻어서 근사한 곳에서 한잔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계획도 세워둔 상태였다.

 마을 입구에 도달하기 전, 면사무소 근처의 슈퍼에서 소주 중간 병짜리를 네 병과 오징어 두 마리, 새우깡 등속을 구입했다.  오징어에 구멍을 뚫어 얼굴에 맞게 눈과 코, 입을 만들어 고무줄을 귀에 걸리게 만든 다음 신부집이 100미터 정도 보이는 길 앞에서 우리는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맨 정신으로는 객기(客氣)를 부리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함잡이가 마을에 들어섰다는 소문이 전해졌는지 다정한 표정의 신부 고모님이 내 손을 잡으며 ,

 “하이고, 오느라꼬 고생 많았데이, 언능 들어오소!”하며 이끌었다.

 우리는 계획을 세운 바대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고모님이 만원 지폐 열 장 해서 십만 원이 든 봉투을 건네기에 받고 열 걸음을 움직였다가 멈춰버렸다. 이번에는 신부의 고모부가 나오셔서 십만 원 봉투를 주셔서 또 열 걸음을 움직였다. 이렇게 계속하다보니 어떤 분은 이만 원도 주고 어떤 분은 오만 원……. 해서 집이 30미터 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우리가 모금(?)한 액수는 50만원이 채 되지 못했다. 우리는 당초에 백만 원을 목표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예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들고 온 오징어를 안주로 소주의 두 병째 뚜껑을 열어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네가 떠들석 하게 외쳤다.

 "함 사세요! 함 안삽니까!"

 신부집에서는 화가 났는지 해보려면 해라는 식으로 무관심을 보이면서 대문을 닫아버렸다. 우리는 봄밤이 춥긴 했지만 끝장을 보자는 식으로 계속 빈속에 소주를 부어넣었다. 2시간이 지났을까, 후덕한 인상을 하신 신부의 백부(伯父)가 나오셨다. 이번에는 제법 두툼한 봉투를 들고 오셨는데 일단 받아서 후배 C에게 맡겼다. 유명 은행에 입사하여 객장에서 수납 업무를 하고 있던 후배C는 돈 세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것 같았다.   

 "형, 지금까지 받은 돈이 구십만 원이야! 조금만 더 버텨서 백만원을 만들어야 목표 완수인 것 알고 있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최후의 일전을 맞이할 요령으로 성큼 발길을 앞으로 당겨서 대문 앞까지 도달했다. 그곳에서 임전무퇴(臨戰無退)의 기상으로 비장한 성전(?)을 치를 예정이었다. 그 자리에서 30분을 버텼으나 신부집에서 도통 반응이 없었다. 술이 엉망이 된 우리는 큰 소리로 외쳤다.

 “아, 함값도 변변찮은데 돌아가야겠슴다!”

 그때 대문이 ‘쿵!’하고 열리며 집안의 큰 어른으로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나오셨다. 대노(大怒)한 표정의 할머니는 우리를 향해 마을이 떠들썩하도록  큰 목소리로 고함을 치셨다.

 “아니! 이런 갱우(경우)가 어디 있노? 함진아비질을 재미로 해야지! 젊은 사람들이 해도 너무 하는 거 아이가? 시골에서 무슨 돈이 있다꼬? 젊은 사람들이 어른들한테 예의도 없이 이게 뭐꼬? 이런 갱우가 세상에 어데 있노 말이다! 봉투 하나 더 줄 테니 들어오려면 들어오고 싫으면 돌아가뿌라! 요딴 갤혼 안해도 된다 마!”

 우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이래도 되는 줄 알았는데 신부댁 어른들이 대노할 지경까지 만들었기 때문이다. C후배가 내게 귓속말을 했다.

 “형, 방금 받은 것까지 하면 딱 백만 원이네. 이제 목표를 달성했으니 무조건 들어갑시다.”

 안절부절 하던 우리는 잽싸게 대문 안으로 들어가서 신부 아버님께 함을 전해드렸다. 그런데…….

 서른 명 정도 되었을까. 집안에 가득 모인 신부 측 친척들은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큰 어른으로 보이는 아까 그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하이고, 신부가 함잡이들이 보통내기들이 아니라고 해서 삼백만 원을 준비했는데 해보니 별거 아니네……. 좀 잘 하지, 히히…….”

 이런! 판단 미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소주 네 병을 빈속에다 마시는 바람에 인사불성이 된 탓이었다.

 

   -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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