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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어떤 결혼식 (하)

by 언덕에서 2014. 4. 18.

 

 

 

 

 

 

어떤 결혼식 (하)

 

 

 

 

 

그림 출처 : 글림작가의 세상바라기 ( http://blog.daum.net/e-klim )

 

 

신부 부모님이 술상을 들여왔다. 소불고기, 돼지고기 수육이랑 잡채, 부침개 등의 안주와 동동주를 한상 그득하게 차려 푸짐해보였다. 신랑을 포함해서 함을 들고 온 4명 모두 객기를 부리기 위해 마신 술 때문에 이미 떡실신이 되어있었지만 함잡이에 대한 어른들의 예의를 무시할 수 없어 다들 좌정하고 마시기 시작했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빈속에 소주를 마셔서 엉망이 된 상태에서 동동주까지 마시니 드디어 정신들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들 비실거리며 술을 마시고 있는데 신부 동생 녀석이 친구 2명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고등학교 2학년인데도 서른 살이 다 된 형님들의 술자리에 끼어들었다.

“너네들 고등학생이 술마시도 되나?”

“뭐 어떻습니꺼? 집인데예!”

 "너그들 호적에 잉크는 말랐나?"

 "호적의 잉크도 마르고 머리의 피도 말랐습니더!"

 능글거리며 냉큼 동동주를 마시는 그들을 주시하며 가만히 집안 분위기를 살펴보니 어른들이 아이들 술 마시는 것을 묵인해주는 것 같았다. 하긴 나도 그 나이에 술을 마시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부모님 몰래 숨어서 마셨던 건데 그 집안의 가풍(家風)은 특이하다 싶었다. 세 녀석 모두 밀양의 모 고등학교 씨름부 선수라고 했는데 다들 덩치가 헤비급이었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자꾸만 술을 권하는 통에 따르고 주는 데로 마시다 보니 더욱더 엉망이 되어버렸다. 이 아이들과 계속 마시면 사망하겠다는 판단이 들어 신랑을 포함한 4명은 그만 자리를 뜨기로 했다.

 후배C는 밀양 영남루 근처에 여관을 잡고 근처의 괜찮은 술집에서 한 잔 더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래서 C가 다 떨어진 고물차 포니를 몰고 음주 운전을 한건데 다행히 시골 국도에 운행 중인 차가 없어서 무사히 밀양 중심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촌동네라 그랬는지 1989년 당시 밀양군청(지금의 밀양시청) 근처에는 양주를 파는 근사한 술집은 전무했다. 그래서 허름한 여관 방 2개를 얻어 한 방에 두 명씩 자기로 하고 함값으로 받은 백만 원 수입을 내가 분배했다. 당시 백만 원은 요즘 돈 가치로 따지면 삼백만원 정도 되지 않을까?  4 : 3 : 3. 그러니까 함잡이인 내가 4를 가지고 나머지 두 명이 3씩을 갖는 걸로 합의가 되었다.

 그런데 내일 결혼할 친구 녀석이 방에 들어가자 딴지를 걸었다.

 “이렇게 잠을 청할 수는 없다. 혁아, 오늘이 총각으로서의 마지막 밤 아니냐? 죽을 때까지 마시면 안 되겠니? 부탁이다. 제발 들어주라.”

 하! 뭐 세상에 이런 놈이 다 있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결혼으로 인하여 발생한 함값은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게 정석라는 해괴한 논리로 떠들어댔다. 그래 원하는 게 뭐냐고 물으니 밀양에는 술집이 없으니 밀양의 옆 도시 창녕군에 위치한 관광단지인 부곡하와이에 가서 한잔 더 걸치자는 부탁이었다.  애원에 가까운 부탁이라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하는 수 없어 밤 한 시에 콜택시를 잡아타고 과속 질주하니 창녕군의 부곡하와이에 도착했다. 아무리 관광단지라도 그렇지 밤 2시에 문을 열고 있을 술집이 어디 있겠는가? 관광지 대로변을 대충 살펴보니 영업 중인 술집은 전무해 보였다. 그래서 그냥 자자고 강권하며 허름한 호텔방을 하나 잡아 짐을 풀고 있으려니 또 술타령을 하고 있었다. 부곡하와이를 밤새 샅샅이 뒤져서라도 반드시 양주를 마셔야겠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 되니 나의 짜증은 이미 극에 달하고 있었다. 배분한 내 몫의 함값을 녀석에게 모두 줘버렸다.

 “너 알아서 해라! 나는 이렇게 마시다가는 사망할 것 같다. 내일 아침 11시가 결혼식이니 8시까지 호텔에 돌아오너라.”

 나는 그 자리에서 꼬꾸라져 곧장 잠에 빠져 들었고 녀석은 룰루랄라 쾌재를 부르면서 호텔방을 나갔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디서 마셨는지 므흣한 표정에다 홍시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녀석은 돌아왔다.

 어떻게 아침을 먹고 곧장 택시를 타고 결혼식장인 부산으로 향했다. 결혼식 사회를 내가 보기로 했기 때문에 신경이 많이 쓰였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미리 진행 시나리오를 만들어 몇 번씩이나 머릿속으로 연습을 했다. 그런데 결혼식 시작 직전 사회자 석에 서있는 내게 녀석이 다가와서 다른 건 몰라도 이 멘트만을 넣어달라고 주문을 해왔다.

 

 

 보통의 경우 ‘지금부터 서○○군과 김○○양의 결혼식을 거행하겠습니다.’라는 사회자의 진행사를 사용하는데 녀석은  “지금부터 정의와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서○○군과 김○○양의 결혼식을 거행하겠습니다.”로 진행해달라는 것이었다.

 결혼 당사자가 해달라는데 어쩌겠는가? 실제로 그렇게 개식사(開式辭)를 하니 하객으로 온 수많은 경상도 밀양 양반 어른들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웅성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하하,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기가 차는 멘트였다. 노동 투쟁이나 대통령 후보 출정식 개회사도 아니고 말이다. 

 그날 결혼식의 하이라이트는 피로연이 아닌가 한다. 광안리 바닷가의 횟집 하나를 통째로 빌려서 점심 식사를 했는데, 전날 새벽까지 그렇게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이 사람 저 사람이 주는 족족 계속 꿀꺽꿀꺽 마셔댔다. 신혼여행은 제주도로 가기로 했는데 저녁 5시에 김해공항을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야하는 것은 안중에 없는 듯했다. 광안리에서 김해공항까지는 승용차로 한 시간 이상 거리임을 감안할 때 적어도 오후 3시 반에는 술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것으로 보였다. 더 마시겠다는 녀석을 후배C와 내가 협박하다시피 하여 간신히 차에다 태웠다. 술 때문에 떡실신이 된 그는 횟집 실내에서 마당의 주차장까지의 10미터도 안되는 거리를 걷다가 네 번이나 자빠졌다. 중학교 교사인 신부는 손거울로 자신의 치마 속을 훔쳐보던 철부지들을 10분 동안이나 회초리로 때린 강골(强骨)이었다. 인생의 한 번 뿐인 결혼식 날, 술 때문에 혼절한 신랑을 본 신부는 화가 났는지 한심했는지 분을 참지 못해 울고 있었다.

 

 

 그로부터 세월이 십수 년 흘러 아들아이의 중학교 졸업식에 참석한 날이었다. 교문 앞에서 교사들이 졸업생을 일일이 배웅하는데 김태희 급의 미모를 한 여선생님과 내가 눈이 마주쳤다.

 “어머, ○○ 선배님 아니세요?”

 “아! 후배  ○○씨, 이 학교에 근무하시네. 우리 아들 졸업식이예요. 오랜 만이예요! 하하.”

 갑자기 몇 년간 만나지 못한 친구 녀석이 생각나서 안부를 물어보았다.

 “그간 술을 너무 많이 마시가지고……. 지금 간경화로 병원에 입원해있답니다.”

 다음날 휴대폰 액정에 모르는 번호가 뜨면서 전화가 걸려왔다.

 “혁아, 나야! 나, 내일 퇴원하는데 오랜만에 찐하게 한 잔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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