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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뇌물을 돌려주기 위해 편지를 쓰다

by 언덕에서 2014. 5. 16.

 

 

뇌물을 돌려주기 위해 편지를 쓰다

 

 

 

 

 

 

 

남이 지운 짐은 부당하면 벗어던질 수가 있다. 그러나 스스로 원해서 진 짐은 설령 그것이 부당하더라도 던져버릴 수가 없는 법이다. 우리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의 생각이란 언제나 순간적이었다. 명상이라든가 묵상 또는 산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구체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부분은 그저 좋은 생각을 얻기 위한 환경의 조성일 뿐 실제로 우리가 원했던 결론을 얻어내는 것은 결국 어떤 결정적인 계기가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순간적인 달콤함에 빠져 앞으로의 기나긴 길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은 도처에 복병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설 연휴 직후 아파트 단지 내 재활용품을 버리는 곳에 스티로폼과 종이상자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얼추 잡아 평소의 2~3배는 족히 넘고도 남았다. 종이상자 속에는 고급술과 육류, 과일 등이 담겨 있었을 터이다. 아니면 본래의 상품이 아닌 5만 원권 뭉치가 들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누군가에게는 진정으로 고마운 선물이겠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속이 찔리는 뇌물일 수도 있다. 뇌물과 선물의 차이는 무엇일까? 뇌를 굴리면서 받았으면 '뇌물' 이고 선뜻 받았으면 '선물'이라는 말도 있다.

 선물은 남에게 어떤 물건 따위를 조건 없이 선사함에 반해 뇌물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직위에 있는 사람을 매수하여 사사로운 일에 이용하기 위하여 넌지시 건네는 부정한 돈이나 물건’을 일컬음이다.

 뇌물은 고대부터도 골칫덩이였던 듯싶다. 미국의 존 누난 원로교수는 ‘뇌물’이라는 책에서 뇌물의 기원을 기원전 3000년쯤으로 추정했다. 인류 문명의 태동과 함께 뇌물수수 행위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특히 고대 이집트 왕조는 뇌물을 ‘공정한 재판을 왜곡하는 선물’로 규정하고, 처벌을 면할 목적으로 선물을 살포하는 행위를 집중 단속했다고 한다. 뇌물과 선물을 구별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다. 법률과 관습, 도덕률 사이에는 미묘하고도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공무원 행동강령은 3만 원 이상의 식사 접대를 받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고, 공무원윤리법에는 10만 원 이상의 선물은 지체 없이 신고하게 되어 있다. 대체로 3만~10만원을 경계선으로 삼고 있다는 얘기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발간한 ‘기업윤리 Q&A’에서 뇌물과 선물의 차이점을 대가성으로 제시했다. 암묵적으로라도 대가를 매개로 전달됐다면 뇌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대가성은 법적인 잣대라는 점에서 전경련의 판단은 다분히 교과서적으로 읽혔다. 현찰이나 차명계좌 등 뒤를 염려한 듯하다. 수수 행태는 뇌물, 대중들 앞에서 떳떳하게 주고받는 것은 선물로 규정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뇌물인지, 선물인지는 주고받는 사람들이 가장 잘 알 것이다.

 

 초급 사원의 때를 막 벗고 있던 그 시절의 명절에 내가 가장 많이 받았던 스트레스는 ‘명절 선물’이었다. 협력회사에다 외주를 주고 있는 부서의 주무사원이었던 탓에 그들이 주는 명절 선물의 처리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기 때문이다. 추석, 설만 되면 대부분 은밀하게 상품권 봉투를 들고 왔지만 어떤 쪽은 아예 차를 한 대 대절해서 전기 밥통이나 양주 세트, 하다못해 참치세트 등 덩치 큰 선물을 버젓하게 들고 오는 바람에 내가 근무하는 '과'는 주위 부서의 눈총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과원(課員) 모두가 회의를 열어 머리를 짜내어 만든 아이디어가 선물을 보내는 업체에 '그러지 말라'는 공문(公文)을 보내자는 것이었다. 내가 기안하여 공문을 작성했다.

 

‘귀사의 일익번창함을 기원합니다. (중략) 향후에는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선물을 받지 않을 테니 절대 보내시지 말기를 당부드립니다.’

 

 그러나 효과는 없었다. 대신 나는 며칠 동안 업무가 마비될 정도의 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아니, 선물을 보내란 말이요? 보내지 말란 말이요? 공문까지 보낸 것을 보니 보내지 말라는 말인 것 같은데 외려 반드시 보내야 한다는 말로 들리네.”

 “윤 대리!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소? 미풍양속(美風良俗)과 인지상정(人之常情)을 무시하는 거요? 이런 걸 대기업의 횡포(橫暴)하라고 하는 걸 알고는 계시겠지?”

 과장에게 물어보니 어제 마신 술이 깨지 않았는지 그는 묵묵부답(黙黙不答)이었다. 용기를 내어 부장에게 다가가서 물어보았다.

“그건 자네들이 알아서 해야지. 나한테 물어보면 어떻게 해?”

 때 마침 담당 임원인 전무이사와 각 부서 사원 대표와의 면담 기회가 있었다. 전무는 자신과 독대하는 시간에 어떤 내용이든 기탄 없이 경청하여 수용하겠노라고 선언한 상태였다. 지금은 모 재벌 그룹사의 월급 회장으로 근무 중인 당시 전무는 내 이야기를 곰곰이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우리와 같이 제조(製造) 공장이 없이 장사만 하는 회사에서 자네와 같이 '선물 = 부정'으로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은 자칫 영업력의 저하를 불러올 수도 있다. 너무 과한 선물은 돌려보내도록 하고 상식적인 가격의 선물은 받도록 하되 리스트를 만들어서 내게 보고하도록 하게.”

 그래서 지시받은대로 리스트를 만들어서 전무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그 다음날 전무의 비서가 내가 올린 메모 보고를 내 책상에 다시 갖다 놓았다. 전무는 내가 작성한 '높은 가격 -> 낮은 가격으로 정리된 50줄의 선물 리스트'에다 만년필로 상위 부분 4개 선에다 붉은 색 싸인펜으로 선을 그어 놓으셨다. 말하자면 자신이 선을 그은 부분은 본인에게 가져오도록 하고 나머지는 니들이 알아서 해라는 것이었다. 이걸 부장에게 또 들고 갔더니 부장은 5번째부터 8번까지 선을 그어 놀고 그 자리에 사인을 해두었다. 그 다음은 과장……. 나머지는 부서원 숫자대로 1/n의 공식으로 나누어 해결할 수 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업무 협의를 위해 협력업체를 방문하고 사무실 문을 나서는데 그 회사 회장으로부터 차를 한 잔하자는 요청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특이한 회사였다. 과거 왜정시대 때 일본에서 고철 수집을 해서 부자가 되었다는 재일교포 출신의 입지전적인 70줄의 영감님이 운영하는 회사였는데 회장 방은 비서실이란 방을 거쳐서 들어가게 되어있었다. 그 방은 회의실 탁자 같은 긴 책상에 아주 짧은 초미니 스커트를 입은 어린 비서 아가씨들이 무려 열 명씩이나 앉아 있었다. 회장의 책상 위를 자세히 보니 금으로 된 거북선과 임진왜란 때 일본 장수들이 쓰던 황금 투구가 유리 상자 안에 모셔져 책상 모퉁이를 현란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과 일본 무사의 투구가 나란히 있다니? 전혀 양립할 수 없는 가치를 보유하고 있는 인물일거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 영감님은 내게 요즘 정치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물었다. YS가 JP와 함께 3당 합당을 감행했을 시기인데 거래처에게 정치적인 견해를 표하지 않는 것이 회사의 룰이어서 ‘관심 없습니다’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이후 나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던 영감님은 내 얼굴이 말년에 명예를 얻게 되며, 또 술을 좋아하는 상이라며 비서를 부르더니 와인을 가져오라고 명했다. 주는 대로 두 잔을 받아 마셨는데 안주는 아몬드와 호두 등 견과류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날 받아 마신 술은 한 병에 삼백만원 이상 호가하는 '사또 무똥 로칠드'라는 술이었다. 대낮에 영감님이랑 독대하여 술 마신다는 점이 부담스러워 바쁘다는 이유로 양해를 구하고 일어섰는데 회장은 내게 악수를 청하며 양복 상의 주머니에 봉투를 하나 넣어주면서 한 마디 했다.

 “이유는 없소. 귀여운 손자처럼 느껴져서 내 이러는 것이니 필요할 때 요긴하게 사용하게!”

 순간 그게 무엇인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알았더라도 아주 연세 많은 분과 실랑이를 벌이거나 내 스타일대로 정면으로 면박을 주는 것은 연장자에 대한 큰 결례였을 것이다. 그 방을 나와 봉투를 열어보니 놀랍게도 오백만원짜리 당좌수표가 한 장 들어 있었다. 당시 2000cc 승용차 한 대 가격이 오백만원이었으니 요즘 가치로 치면 삼천만 원 정도일 것이라 생각된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그 날 오후 내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고민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게 되었다. YS가 대통령이 되기 전이었으니 ‘금융 실명제’라는 제도가 있기 전의 시대였다. 이런 저런 생각에 깊은 시름에 빠져있는데 갑자기 임신한 아내의 뱃속에 있는 아이 생각이 났다. 내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더라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이 세상에서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그 이상의 생각은 사치이며 언어의 유희일 뿐이다는 확신 또한 더해졌다.

 

 

 

 그날 저녁 자수성가했다는 그 영감님에게 장문의 편지를 써서 직접 우체국에서 등기로 보냈다. 그 회사 직원을 불러 수표 봉투를 전했음은 물론이다.

 

 “(전략) 인생은 아무 때나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제 인생의 목표는 후일, 장성한 자식들에게 훌륭한 아버지로 그들의 기억에 남는 것입니다. 회장님의 후의에 감사드립니다. 봉투를 돌려드림에 외람(猥濫)되다고 생각 마시기 바랍니다.”

 

 다음날 아침, 출근하는데 햇살은 맑고 실록은 푸르기 짝이 없었다.

 햇빛은 쨍쨍, 나뭇잎은 푸릇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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