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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정호승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by 언덕에서 2014. 3. 17.

 

 

 

정호승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우리 시대 대표적 서정시인 정호승(1950 ~  )의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는 저자의 여섯 번째 시집이다. 인간과 자연의 존재 원리로서의 사랑과 외로움의 숙명을 노래한 80편의 시를 수록했다. 이 시집에는 저자가 노래해온 맑고 아름다운 서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특히 섬세한 시적 감수성으로 외로움과 사랑의 본성에 대한 해법의 길을 묻는다.

 

 

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불국사 종루 근처

공중전화 앞을 서성거리다가

너에게 전화를 건다

 

석가탑이 무너져내린다

공중전화카드를 꺼내어 한참 줄을 서서 기다린 뒤

다시 또 전화를 건다

 

다보탑이 무너져내린다

다시 또 공중전화카드를 꺼내어

너에게 전화를 건다

 

청운교가 무너져내린다

대웅전이 무너져내린다

석등의 맑은 불이 꺼진다

 

나는 급히 수화기를 놓고

그대로 종루로 달려가

쇠줄에 매달린 종매가 되어

 

힘껏 종을 울린다

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열림원.1998)

 

 

 

 

 

 그는 많은 시편에서 자연의 감정과 빛깔, 소리를 그려내는 과정을 통해 인간사의 슬픔과 회한을 아름답게 표현했으며, 상처와 고통의 비극적인 역사와 맞서면서도 이 맑고 아름다운 서정성을 일관되게 유지해왔다.

 이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에서도 그는 결 고운 서정으로 사랑과 외로움의 숙명을 노래한다. 끝까지 합일되지 못하는 비극적인 운명의 철도 레일처럼, 서로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과 기다림만이 있을 뿐, 완전한 하나됨은 불가능하다. 사랑이란 이처럼 애초부터 대상과의 합일을 향한 애달픈 기다림과 꿈의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는 이 시집에서 사랑과 외로움에 대한 절창을 들려준다.

 

수선화에게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걷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 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번 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 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열림원.1998)

 

 결국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인간 삶의 숙명에 대한 언명은 모든 내밀한 우주적 존재원리의 속성에도 동시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숙명적인 사랑의 외로움은 걷잡을 수 없는 후회로 치닫는다. 그것은 죽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이다.

 

 

 

 

 

 

 

약현성당 

 

서울역을 떠돌던 부랑자 한 사람이

중림동 약현성당 안으로 기어들어와

커튼에 라이터를 켜대었을 때

성당이 불길에 휩싸였을 때

 

불이야!

봄을 기다리던 제비꽃이

땅 속에서 소리쳤다

 

아무리 소리쳐도 성모님은

가만히 불길을 보고만 있었다

천장이 뚫리고 종탑이 무너져내려도

성모님은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불이 꺼진 뒤

무너진 종탑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성당을 찾아온 부랑자들에게

애초부터 밥을 해주지 말았어야 했다고

미사를 드렸다

 

그때 제비꽃은 들을 수 있었다

무너진 종탑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그들을 미워하지 말자

그들을 돌보지 못한 우리의 책임이 크다고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를

 

-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열림원.1998)

 

 

 

 정호승 시인의 초기시는 자신이 화형식을 거행했던 서정주의 리듬과 소재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초기시에서 그의 생각과 감정은 자연 대상물에 의탁하여 표현되었다. 즉 '객관적 상관물'을 동원하여 생각과 감정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객관적 상관물의 형상화와 더불어 그가 선택한 소재들의 상당 부분이 민담적인 것이고 이야기와 전설을 내포하거나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이런 형상화 방법이나 소재 선택은 그가 부정하려 했던 서정주가 즐겨 쓰던 것이었다.

 그러나 정호승의 시가 서정주의 '자화상'과 달랐던 점은 역사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다. 인간과 인생의 구경적 추구를 꾀했던 생명파 시인이라는 서정주를 추구함에 머물지 않고 현실과 역사의 현장에 눈을 돌린 것이다.  이와 같은 작품 세계는 현실에 눈을 돌렸을 때, 더욱 강렬한 민중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그러나 봉건적인 세계, 민속의 세계, 민담의 세계를 뛰쳐나온 민중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감옥이었다. 정호승의 초기 시세계는 이런 민중의 모습을 보여준다. 단순히 억압받는 민중이 아니라 군사 독재와 이들의 탄압을 꿋꿋하게 견디며 살아가는 모습으로서 해방될 그 날을 기다리는, 봄을 기다리는 '눈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봄이 오면 비록 녹아 없어지겠지만 어둠의 시대, 겨울의 시대에는 끊임없이 살아날, 우리 모두의 희망과 꿈을 갖고 있는 '슬픔'을 극복하는 현실체일 것이다.

 

 

서울의 성자

 

오늘도 내가 남보다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 당장 서울 지하철 교대역으로 가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자기만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든은

서울의 교대역에 모이는 맹인들을 찾아가 보십시오

어둠침침한 지하철 정거장 통로 끝

낡은 비닐가방 속에 손을 넣고 백 원짜리 동전을 헤아리거나

혹시 누가 볼세라 역 기둥에 몸을 숨기고

물도 없이 꾸역꾸역 김밥을 먹고 있거나

손수건을 꺼내 정성들여 하모니카를 닦고 있거나

검은 색안경을 낀 채 흰 지팡이를 짚고 꾸부정하게 서서

열차를 기다리는 서울의 성자

그들을 찾아가 위안을 얻으십시오

찬 먼지바람을 맞으며 김밥을 다 먹고

차례대로 구파발행 전동차에 몸을 싣는

더듬더듬 흰 지팡이를 두드리며 하모니카를 다시 부는

하모니까를 불다가 그대로 외로운 하모니카가 되어버리는

위안의 성자

그들을 찾아가 큰 위안을 얻으십시오

 

-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열림원.1998)

 

 

【시집】<슬픔이 기쁨에게>(창비.1979) <서울의 예수>(민음사.1982) <새벽편지>(민음사.1987) <별들은 따뜻하다>(창비.1990) <사랑하다가 죽어 버려라>(창비.1997)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열림원.1998)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창비.1999)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열림원.2002) <이 짧은 시간 동안>(창비.2004) <새벽편지>(민음사.2007) <포옹>(창비.2007) <밥값>(창비.2010)

【시선집】<흔들리지 않는 갈대>(미래사.1991) <서울의 예수>(민음사.1995) <내가 사랑하는 사람>(현대문학북스.2001)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랜덤하우스중앙.2005) <이 시를 가슴에 품는다>(랜덤하우스중앙.2006)

【장편소설】<내가 켠 촛불>(서울문화사.1992)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민음사.1993)

【수필집】<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제삼기획.1993)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월간에세이.1994) <첫눈 오는 날 만나자>(샘터사.1996) <사랑은 다 그렇다>(해토.2006)

【우화집】<당신의 마음에 창을 달아드립니다>(해냄.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