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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김남조 종교시집 『영혼과 빵』

by 언덕에서 2014. 3. 31.

 

 

 

김남조 종교시집 『영혼과 빵

 

 

 

 

 

김남조(1927 ~ ) 시인은 일본 규슈[九州]에서 여학교를 마치고, 195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마산고등학교·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성균관대학교 강사를 거쳐 1954년부터 1993년까지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사범대학 재학 때인 1950년 [연합신문]에 <성수><잔상(殘像)>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첫 시집 <목숨>(1953)에서는 인간성의 긍정과 생명의 연소(燃燒)를 바탕으로 한 정열을 읊었으며, 제2시집 <나아드의 향유>(1955)에서부터 종교적 사랑과 윤리를 읊었다.

 오늘 소개하는 이 시집은 1973년 성 바오로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내가 이 시집을 구입한 것은 고교 1학년인 1977년 천주교 부산교구의 주교좌 성당인 중앙성당 성물판매소에서였다. 신심이 가득한 이 시집을 읽을 때마다 축복에 가까운 은성스런 느낌으로 감사했던 기억이 난다. 

 

 

 

 


그대 있음에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내 마음에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의 외롭고 고단함

그대 있음에

삶의 뜻을 배우니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 시집 <영혼과 빵> (성바오로서원) 1973)


 이 분의 시에 있어서 가장 중심을 이루는 것은 가톨릭의 박애정신과 윤리라고 할 수 있다. 인간 내면의 목소리로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노래했고, 언어의 조탁을 통한 유연한 리듬과 잘 짜인 시형의 아름다움은 읽는 이에게 친숙한 느낌을 준다.

 1958년 시집 <나무와 바람>으로 자유문협문학상, 1963년 시집 <풍림의 음악>으로 오월문예상, 1975년 시집 <사랑의 초서>로 한국시인협회상을 받았고, 1984년 서울특별시문화상을 받았다.

 

 

 

 


겨울바다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고


허무의

물 이랑 위에 불 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시집 <겨울 바다>(1967)-


 

 


 


 김남조 시인은 1950년대에 등장하여 전세대인 모윤숙ㆍ노천명과 후세대인 1960년대 시인들을 잇는 교량적 역할을 담당한 대표적 시인이다. 그의 시의 정신적 지주는 가톨릭의 사랑과 인내와 계율이다. 때문에 모든 작품은 짙은 인간적인 목소리에 젖어 있으면서도 언제나 긍정과 윤리가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배경으로 인해 종교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종교적인 배경은 인간적인 목소리를 더욱 짙고 깊이 있는 것으로 만드는 구실을 한다. 한편 기법상으로 보아 관심을 끄는 것은 리듬이 대부분 시행의 자유로운 배열로 형성되는데 그 형상이 우아하고 유연한 리듬으로 정밀하게 계산되어 있다. 이미지보다는 의미가 강한 그의 언어가 생생한 생명력을 지니는 것도 언어를 꿰뚫는 이러한 리듬 때문이다.



설일(雪日)


겨울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로써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 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 시집 <영혼과 빵> (성바오로서원) 1973)

 

 

 


 시인은 1953년 첫 시집 <목숨>을 간행하였다. 그래서인지 6ㆍ25 전쟁을 통한 죽음의 체험은 시인으로 하여금 생명과 구원에 대한 강한 갈구를 갖게 했으며, 그것은 이후 김남조의 시 세계를 관류하는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를 절감한 영혼이 절망의 폐쇄적인 회로에 갇히지 않고 그것을 초극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것은 기독교적 신앙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58년에 발표된 시집 <나무와 바람>은 전쟁 체험에서 오는 절망과 비탄을 넘어서 역사적, 시대적인 불운에 휩쓸리지 않는 견고한 개인으로서의 조재확립을 지향하고 있고 1974년 <사랑초서>에서는 사랑이 시적 주제를 이루고 있는데, 초기시에서 보이던 들끓는 열정, 열병과 같은 그리움, 비탄과 절망 등의 감정적 차원이 아니라, 종교적, 정신적, 정서적 의미를 모두 포괄하는 보다 근본적이고 광범위한 영역으로 표현된다. 종교적 귀의와 함께 사랑의 문제도 인간에 대한 신의 본원적인 사랑, 즉 아가페에서 출발한다.

 

 

 



나직한 송가(頌歌)


 - 金樞機卿 着座式典에


한국의 흰 꽃에선

순교하신 분들의 피내음이 납니다

차마 눈도 못 뜰 피범벅의 형장(刑場)에서

소름끼치며 불 붙이던

영혼의 햇불

그 순교

주의 말씀으로는 사랑이옵는 그것


하긴 그만큼은

아프고 못견딜 열이었기에

땅에 뿌리면 몇 갑절로 솟아오르는 나무가 되고

신령한, 살아있는 바람으로 불어

세게의 뭇 변방에

청청한 고함으로 번지었거니


초록이 흐르는 오월

주의 형관(荊冠)을 짜는 가시나무조차

함께 유성(油性)의 햇살을 쬐는

생명과 관용의 절기

또 이 날에

소박한 축연, 나직한 송가들이 울리며

한 어른을 앞세우고

당신 앞에 더 한결 간망(懇望)의 눈을 적시옵니다

주여


신앙을 위해선

이미 목숨을 바칠 까닭도 없어졌는데

무엇으로 저 넋을 건지리까


소리없는 주악(奏樂)

눈감아 가슴 더욱 깊이에 울리옵거니

한국의 흰 꽃에선

순교하신 분의 피내음이 납니다


- 시집 <영혼과 빵> (성바오로서원) 1973)



 1976년 <동행>에 오면 나무들을 노래한 시가 많이 나타난다. 김남조의 시에서 자연의 생명력이 지닌 놀라운 신비에 대한 환희는 일종의 범신론적인 세계로까지 확산된다. 김남조가 일관되게 추구해 온 사랑의 시학은 이 시기에 오면 성숙한 ‘연민’으로 나타난다. 연민은 가톨릭에서 말하는 정신적, 인격적 사랑의 최고 경지이다. 김남조의 시에서 연민의 시선은 인간과 인간의 사랑을 넘어 신과 인간, 신과 자연, 인간과 자연의 관계로서까지 확장된다.

 

 

오용길 작. 盛夏 54 x 73.5cm 화선지에 수묵담채 2002

 


 산에게 나무에게


 산은 내게 올 수 없어

 내가 산을 찾아 갔네

 나무도 내게 올 수 없어

 내가 나무 곁에 섰었네

 산과 나무들과 내가

 친해진 이야기


 산은 거기에 두고

 내가 산을 내려 왔네

 내가 나무를 떠나 왔네

 그들은 주인 자리에

 나는 바람 같은 몸

 산과 나무들과 내가

 이별한 이야기


- 시집 <영혼과 빵> (성바오로서원) 1973)


 이후의 시집, <바람세례>나 1995년의 <평안을 위하여>는 작가 스스로 <동행>과 더불어 ‘화해와 쉼과 위로를, 그리하여 총체적으로 평안을 나누고자 제안하는 나 나름의 일관된 목소리를 담았다’라고 밝힌 바 있듯 안식과 평안에 대한 추구가 중요한 시적 주제가 되고 있다. 김남조는 특히 현대 자본주의 문명의 숨 막힐 듯한 속도감 속에서 쉴 틈 없이 뛰어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고요와 평안의 경지를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