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길 시선집 『솔개』
김종길(1926 ~ )은 영미(英美)의 흄, 파운드, 엘리어트 등의 주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시인이다. 그의 시 창작의 소재들은 일상생활의 주변에서 얻어지며, 열띤 감정이나 감상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고, 또 혼돈 속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는 것이 특색이다. 따라서 언어가 매우 지적이며 절도 있고 간결한 것이 특색이며, 상징이나 은유보다 단순한 비유, 즉 직유를 아껴 써서 참신한 느낌을 주고 있는 것도 눈에 띤다.
그는 주지시를 쓰면서도 생활과 유리되지 않고 생을 긍정하고 가치화하는 ‘생활의 시’를 쓰고 있는 분이다.
주점일모(酒店日暮)
불빛 노을
이제 쇠처럼 식어가고
황량한 나의 청춘의 일모(日暮)를
어디메 한구석
비가 내리는데
맨드라미마냥 달아오른 입술이
연거퍼 들이키는 서느런 막걸리.
진실로 나의 젊음의 보람이
한잔 막걸리에 다했을 바에
내 또 무엇을
악착하고 회한하고 초조하랴--
무수히 스스로의 이름을 부르며
창연한 노을 속에
내 다시 거리로 나선다.
- 시집 <성탄제>(1969)-
그의 시재(詩材)는 일상생활의 주변에서 얻어지며, 열띤 감정이나 감상, 또는 혼돈에 빠지지 않는 시풍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언어가 매우 지적이며 간결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 절제와 극기의 태도는 그의 시적 감수성 속에 한시(漢詩)적이고 유가(儒家)적인 전통이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유가적 품격과 이미지스트로서의 시어가 조화를 이루어 균형과 절제 속에서 시상이 펼쳐진다. 또한 고전적인 감각과 현대 영미시에 대한 식견을 바탕으로 시 비평에도 기여하였다. 그리고 엄정한 균형과 절제 속에 시상 전개, 시 비평에도 기여하였다.
"현대 영시 중에서도 그 당시 나에게 가장 강렬한 충격을 준 것은 T.S.엘리엇의 시와 시론이었다. 그 충격으로 말미암아 나의 주된 학문적, 지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 때문에 나의 시적 체질은 심한 갈등에 부대끼게 된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김종길)
오용길 작. 봄의 氣韻 - 이화교정 50 x 66.5cm 화선지에 수묵담채 2003
춘니(春泥)
여자대학은 크림빛 건물이었다.
구두창에 붙는 진흙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알맞게 숨이 차는 언덕길 끝은
파릇한 보리밭―
어디서 연식(軟式) 정구(庭球)의 흰 공 퉁기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뻐꾸기가 울기엔 아직 철이 일렀지만
언덕 위에선,
신입생들이 노고지리처럼 재잘거리고 있었다.
- 시집 <성탄제>(삼애사,1969)-
김종길 시인은 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시론>(1965), <진실과 언어>(1974), <시에 대하여>(1986)등을 간행한 문학이론가로서 후학들에게 남다른 영향을 끼쳤다. 시집으로는 <성탄제>(1969), <하회에서>(1977), <황사현상>(1986), <달맞이 꽃>(1998) 등 7권의 시집을 내놓았는데, 60년이 넘는 시력에 비해 매우 드문 과작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1950년대에 <성탄제>연작을 발표하던 그는 1957년부터 1964년까지 시작을 중단하게 된다. 말하자면 1957년 <성탄제 1957> 단 한 편을 발표한 후 1964년까지 8년간 침묵하는 것이다. 이후 다시 쓴 시 <다시 교정의 잔디가 푸르듯>이 4ㆍ19 기념시였다는 사실은 그 침묵의 기간 동안 시인의 내면에 어두운 역사적 상황과 관련된 좌절과 방황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성탄제 1955
가슴에 눈물이 말랐듯이
눈도 오지 않는 하늘
저무는 거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동녘 하늘에 그 별을 찾아본다.
베들레헴은 먼 고장
이미 숱한 이날이 거듭했건만
이제 나직이 귓가에 들리는 것은
지친 낙타(駱駝)의 울음소린가 ?
황금과 유향(乳香)과 몰약(沒藥)이
빈 손가방 속에 들었을 리 없어도
어디메 또 다시 그런 탄생이 있어
추운 먼 길이라도 떠나고 싶은 마음―
나의 마리아는
때묻은 무명옷을 걸치고 있어도 좋다.
호롱불 켠 판잣집이나 대합실 같은 데라도
짚을 깐 오양간보다는 문명되지 않는가 ?
―허나 이런 생각은 부질없는 것
오늘 하룻밤만의 감상을 위해서라도
차라리 잠 오듯 흰 눈이라도 내리렴.
함박꽃처럼 선의의 흰 눈이라도 내리렴 !
- 시집 <성탄제>(1969)-
그 후 그는 자신을 가장 강하게 규정짓는 이미지즘의 시학과 고전적 절제를 완성해간다. 그러나 그는 이미지즘의 시인이면서도 기교에 치우친 경박한 박래품의 모더니즘을 지양하고 그 속에 일종의 정신적 품격을 부여하려 한 시인이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반응 과잉의 감상주의나 강한 현실 개입의 목소리가 말끔히 가셔져 있고 적은 말수와 엄격하게 선택된 이미지만을 가지고 삶의 냉혹한 실재와 그것을 초극할 수 있는 서정적 비전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져 있는 <성탄제>는 성탄절 무렵의 도시에 내리는 ‘눈’을 보며, 어린 시절에 대한 감격적인 회상과 현재의 쓸쓸한 감회를 대조적으로 그린 시로서, 인류 보편의 사랑을 육친애로 전환시켜 보여주고, 서구적 의미의 성탄절을 한국적 의미의 성탄절로 전환시켜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시인 김종길은 엄격하고 지적인 절제와 시의 형식에 매우 철저한 이미지스트로서, 그리고 고고한 선비정신과 투명성을 지닌 시인으로서, 정확한 서구 이론에 대한 이해와 그것의 다채로운 적용을 성취한 이론가로 자신의 위상을 확고히 하였다.
설날 아침에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 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險難)하고 각박(刻薄)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 시집 <성탄제>(1969)-
그는 또한 정평 있는 시 번역가로서 주로 현대영미시를 국역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한시와 현대시를 영역하여 영국과 미국에서 출판하였고 여러 차례 국내외에서 개최된 국제회의 및 쎄미나에 참가하여 한국시에 관한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한국 시문학의 해외 선양에 진력하였다.
이 시집에는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언어에 서정과 주지주의가 함께 용해된 깊은 맛이 우러나는 그의 모든 시들이 대거 수록되어 있다. 어려운 단어와 난해한 이미지를 배제하고 무덤덤하게 서술하는 시들이 우리 속의 깊은 정서를 길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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