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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이상화 시집 『상화시집』

by 언덕에서 2014. 3. 3.

 

 

 

 

이상화 시집 『상화시집

 

 

 

 


시인 이상화(1901 ~ 1943)는 경북 대구에서 시우(時雨)의 둘째 아들로 출생, 보통학교 교육은 사숙(私塾)에서 받았다. 1919년 경성 중앙고보 3년을 수료,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학생운동의 봉기에 참여, 백기만과 함께 사전 계획을 하다가 발각되어 잠시 서울로 피신했다. 1921년 현진건의 추천으로 [백조] 동인에 참여, [백조] 1∼3호에 <말세의 희탄(欷嘆)><단조(單調)><가을의 풍경><나의 침실로><이중의 사망> 등을 발표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끄을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찐 젖가슴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팔목이 시도록 매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서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잡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개벽](1926. 6)-


 

 이듬해인 1922년 도쿄로 건너가 아테네프랑세에서 불어 및 불문학을 공부, 관동대지진으로 1924년 봄에 귀국했다. 2년 동안은 작품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로 그가 경향파 집단에 가담하게 된 석도 이 무렵으로 <구루마꾼><엿장수><거러지> 등 ‘가상(街相)’의 시편과 평론 <무산 작가와 무산 작품><문예의 시대적 변이와 작가의 의식적 태도> 등을 발표했다.

 1927년 대구에 돌아왔으나 일본 관헌의 감시를 받고 수차례에 걸쳐서 가택수색을 당했고, 마침내 의열단 이종암)사건에 연루되어 피검, 그 후 1937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백씨(伯氏) 이상정 장군을 만나러 중국에 다녀와 투옥되기까지 수차의 옥고를 겪었다.

 1937년 [조선일보] 경북총국을 경영하였으나, 이재에 어두워 실패, 이후 교남학교에서 무보수 교원으로 영어와 작문을 지도, ‘피압박 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권투를 교남학교의 교정경기(校定競技) 종목으로 채택시켜 그것이 대구 권투의 시발이 되었다. 1940년 동직을 사임, 필생의 사업으로 <춘향전> 영역(英譯), <국문학사><불란서시평석(佛蘭西詩評釋)> 등을 기획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1943년 위암으로 사망했다.

 

 

 

이별을 하느니


 어쩌면 너와 나 떠나야겠으며 아무래도 우리는 나눠야겠느냐.

 남몰래 사랑하는 우리 사이에 남몰래 이별이 올 줄은 몰랐어라.


 꼭두로 오르는 정열에 가슴과 입설이 떨어 말보다 숨결조차 못 쉬노라.

 오늘 밤 우리 둘의 목숨이 꿈결같이 보일 애타는 네 맘 속을 내 어이 모르랴.


 애인아, 하늘을 보아라, 하늘이 까라졌고 땅을 보아라, 땅이 꺼졌도다.

 애인아, 내 몸이 어제같이 보이고 네 몸도 아직 살아서 내 곁에 앉았느냐.


 어쩌면 너와 나 떠나야겠으며 아무래도 우리는 나눠야겠느냐.

 우리 둘이 나뉘어 생각하며 사는니 차라리 바라보며 우는 별이나 되자.


 사랑은 흘러가는 마음 위에서 웃고 있는 가비어운 갈대꽃인가.

 때가 오면 꽃송이는 곯아지고 때가 가면 떨어졌다 썩고 마는가?


 님의 기림에서만 믿음을 얻고 님의 미움에서는 외롬만 받을 너이었더냐?

 행복을 찾아선 비웃음도 모르는 인간이면서 이 고행을 싫어할 나이었더냐?


 애인아, 물에다 물탄 듯 서로의 사이에 경계가 없던 우리 마음 위로

 애인아, 검은 그림자가 오르락내리락 소리도 없이 얼른 거리도다.


 남몰래 사랑하는 우리 사이에 우리 몰래 이별이 올 줄은 몰랐어라.

 우리 둘이 나뉘어 사람이 되느니 차라리 피울음 우는 두견이 되자.


 오려무나, 더 가까이 내 가슴을 안아라, 두 마음 한 가락으로 얼어 보고 싶다.

 자그마한 부끄럼과 서로 아는 믿븜 사이로 눈 감고 오는 방임을 맞이하자.


 아, 주름잡힌 네 얼굴 이별이 주는 애통이냐? 이별은 쫓고 내게로 오너라.

 상아의 십자가 같은 네 허리만 더우잡는 내 팔 안으로 달려오너라.


 애인아, 손을 다고, 어둠 속에도 보이는 납색의 손을 내 손에 쥐어다고.

 애인아, 말해다고, 벙어리 입이 말하는 침묵의 말을 내 눈에 일러다고.


 어쩌면 너와 나 떠나야겠으며 아무래도 우리는 나눠야겠느냐?

 우리 둘이 나뉘어 미치고 마느니 차라리 바다에 빠져 두 마리 인어로나 되어서 살자.


 - [조선문단](1925) -

 

 

이상화 고택

 

 이상화가 쓴 산문시로서는 <그날이 그립다><몽환병)><금강송가)>의 세 편이 있다. 이들은 모두가 발표 연대보다는 훨씬 앞서 쓰인 것으로, 상화의 시작활동)은 산문시로 출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금강송가>는 중앙고보를 졸업하던 1918년 여름 금강산 일대를 주유(周遊)할 때 착상된 것으로, 자연을 대하는 데 있어 청정하고 엄숙한 면을 보여준다. 금강산의 ‘정위(淨偉)로운 가슴’과 ‘관미(寬美)로운 미소’를 통하여 그의 개아(個我)의 자각은 물론, 나아가서는 민족적인 자아까지도 발견하게 된다. 한편, <그날이 그립다><몽환병>은 초기시에서 보여준 감상과 낭만, 그리고 병적 경향으로 특정 지워지는 ‘비음(緋音)’의 세계를 위한 전초적 작품이 되고 있다.

 그의 시집은 따로 없고, 다만 1951년 5월에 간행된 백기만 편의 <상화와 고월>에 시 16편을 모아 ‘새벽의 빛’이라 하였다. 이후 1973년 정음사에서 <상화 시집>을 간행하였는데 이상화의 시 작품 대부분이 실려있고 이것이 그의 공식적인 마지막 시집이 된다. 이후 출판사에서 이상화 관련 시집을 출간한 적은 없다.

 그는 민족주의 일념으로 피압박 민족의 비애와 그에 대한 항거로 살아온 시인이다. 때로는 나라를 잃은 망국의 비애를 잊어보려고 관능의 도취에 빠져들기도 했으나, 그것이 그의 본령은 아니었다. 자족과 굴종만을 일삼는 무리들을 맹렬히 비난하고, 오직 민족의 선구자로서 민족주의 시인으로 서게 된 것이다.

 

 

나의 침실로


 ― 가장 아름답고 오랜 것은 오직 꿈 속에만 있어라-(내 말)


 ‘마돈나’ 지금은 밤도 모든 목거지에 다니노라. 피곤하여 돌아가련도다.

 아, 너도 먼동이 트기 전으로 수밀도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오너라.


 ‘마돈나’ 오려무나, 네 집에서 눈으로 유전(遺傳)하던 진주는 다 두고 몸만 오너라.

 빨리 가자,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딘지 모르게 숨는 두 별이어라.


 ‘마돈나' 구석지고도 어둔 마음의 거리에서 나는 두려워 떨며 기다리노라.

 아, 어느덧 첫닭이 울고―뭇 개가 짖도다. 나의 아씨여, 너도 듣느냐.


 ‘마돈나' 지난 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 둔 침실로 가자, 침실로―

 낡은 달은 빠지려는데, 내 귀가 듣는 발자욱―오, 너의 것이냐?


 ‘마돈나' 짧은 심지를 더우잡고 눈물도 없이 하소연하는 내 맘의 촉(燭)불을 봐라.

 양털 같은 바람결에도 질식이 되어 얕푸른 연기로 꺼지려는도다.


 ‘마돈나' 오너라, 가자, 앞산 그리메가 도깨비처럼 발도 없이 이곳 가까이 오도다.

 아, 행여나 누가 볼는지―가슴이 뛰누나,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마돈나' 날이 새련다, 빨리 오려무나, 사원의 쇠북이 우리를 비웃기 전에.

 네 손이 내 목을 안아라. 우리도 이 밤과 함께 오랜 나라로 가고 말자.


 ‘마돈나' 뉘우침과 두려움의 외나무다리 건너 있는 내 침실 열 이도 없으니.

 아, 바람이 불도다. 그와 같이 가볍게 오려무나. 나의 아씨여, 네가 오느냐?


 ‘마돈나' 가엾어라, 나는 미치고 말았는가. 없는 소리를 내 귀가 들음은―,

 내 몸에 파란 피―가슴의 샘이 말라 버린 듯 마음과 목이 타려는도다.


 ‘마돈나' 언젠들 안 갈 수 있으랴. 갈 테면 우리가 가자, 끄을려가지 말고!

 너는 내 말을 믿는 `마리아'―내 침실이 부활의 동굴임을 네야 알련만……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엮는 꿈, 사람이 안고 뒹구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으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마돈나' 별들의 웃음도 흐려지려 하고 어둔 밤 물결도 잦아지려는도다.

 아, 안개가 사라지기 전으로 네가 와야지.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 [백조] 3호(1923년 9월호)


 그가 이와 같이 민족주의 일념으로 일관하게 된 것은 그를 둘러싼 생활환경과 피압박 민족의 일원으로서 직접 체험한 대소사건, 즉 백부의 엄한 훈도와 독립투사인 백형(伯兄) 이상정과 같은 그의 남다른 가정환경의 영향과 그 자신 직접 참여하여 학생운동을 조종한 것이라든지, 의열단 이종암 사건에 연루되어 피검된 것을 위시하여 수차에 걸쳐 옥고를 치른 사실과 같은 영향의 작용도 있다. 요컨대 그는 그 시대 어느 누구도 쉽게 걸을 수 없는 시역(詩歷)을 더듬어간 시인으로 식민지 치하의 비애와 일제에 항거하는 저항의식을 기조로 하여 시를 쓴 것이다. 

 그의 시의 본령은 민족의식을 배경으로 한 토착적인 서정시라고 할 수 있으며, 초기시의 분방한 시상은 탐미적 신비적 매력이 있다. 신경향파가 등장한 직후인 1926년 [개벽]에 발표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시대에 대한 고민과 일제에 저항하는 한편 주체적 민족의식을 보여준 그의 대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