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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김관식 시선집 『다시 광야에』

by 언덕에서 2014. 2. 24.

 

 

김관식 시선집 『다시 광야에』

 

스스로를 '대한민국 김관식'이라 칭했던 시인 김관식(1934 ~ 1970)의 본관은 사천(泗川)이며 . 호는 추수(秋水)ㆍ만오(晩悟)ㆍ우현(又玄) 등이다. 충청남도 논산 출생으로 한약방을 경영하면서 서원의 전교와 향교의 제관을 하던 아버지 낙희와 어머니 정성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시인 서정주와 동서간이다. 4세 때부터 부친으로부터 한문 경서를 배우고 제자백가를 익혔다.

 1952년 강경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충남대학교에 입학하였다가 고려대학교로 적을 옮기고, 1953년 다시 동국대학교 농과대학으로 전학하여 4년에 중퇴하였다. 강경상업고등학교를 다니던 도중에도 최병심ㆍ정인보ㆍ최남선ㆍ오세창 등 당대의 한학 대가들을 찾아가 성리학ㆍ동양학을 공부하였다. 문단의 친우로는 같이 [현대문학]에 추천된 시인 박재삼을 비롯하여 천상병ㆍ신경림ㆍ고은 등이 있다.

 

 

 

호피(虎皮) 위에서

 

해 진 뒤, 몸 둘 데 있음을 신에게 감사한다!

나 또한 나의 집을 사랑하노니

자조근로사업장에서 들여온 밀가루 죽이나마 연명을 하고

호랑이표 시멘트 크라프트 종이로 바른 방바닥이라

자연 호피를 깔고

기호지세로 오연(傲然)히 앉아

한미합동(韓美合同)! 우정과 신뢰의 악수표 밀가루 포대로

호청을 한 이불일망정

행(行). 주(住). 좌(坐). 와(臥)가 이에서 더 편안함이 없으니

왕. 후. 장. 상이 부럽지 않고

백악관 청와대 주어도 싫다.

G.N.P가 어떻고,

그런 신화 같은 얘기는 당분간 나에겐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 시집 <다시 광야(曠野)에서> (창작과비평사 1976)

 

 

 

 

 

 그는 경기도 여주농업고등학교 교사로 출발하여, 1954년 서울공업고등학교·서울상업고등학교의 교사와 세계일보 논설위원으로 재직하였다. 1960년 4·19 직후 서울 용산 갑구 민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거물 정치인이었던 장면(張勉)을 상대로 맞아 선거를 치렀다. 주변 사람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고향 재산을 모두 털어서 선거에 뛰어들었지만, 예상대로 낙선했다. 이듬해 세검정의 과수원을 처분하고 지금의 홍은동 산1번지로 이사하여 부근 산비탈 국유지를 무단 점거해 무허가 블록크 집을 지어 팔기도 했다.‘육모정’이란 집을 짓고 살면서 가난한 문인들을 불러와 살게 하고, 고아, 부랑자들을 모아 문학을 가르쳤다. 시와 술로 지내다가 가난과 육체적 고통이라는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1970년에 서른여섯 젊은 나이로 간염과 위궤양으로 생을 마감했다. 호방한 성격과 희귀한 동양적 예지, 한시적 소양, 그리고 남다른 기행으로 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병상록(病床錄)

 

병명도 모르는 채 시름시름 앓으며

몸져 누운 지 이제 10년

고속도로는 뚫려도 내가 살 길은 없는 것이냐

肝, 心, 脾, 肺, 腎.......

오장(五臟)이 어디 한 군데 성한 데 없어

생물학 교실의 골격표본처럼

뼈만 앙상한 이 극한상황에서......

어두운 밤 턴넬을 지내는

디이젤의 엔진 소리

나는 또 숨이 가쁘다 열이 오른다

기침이 난다

머리맡을 뒤져도 물 한 모금 없다

하는 수 없이 일어나 등잔에 불을 붙인다

방안 하나 가득찬 철모르는 어린것들

제멋대로 그저 아무렇게나 가로세로 드러누워

고단한 숨결은 한창 얼크러졌는데

문득 둘째의 登錄金과 발가락 나온 운동화가 어른거린다.

내가 막상 가는 날은 너희는 누구에게 손을 벌리냐

가여운 내 아들딸들아,

가난함에 행여 주눅들지 말라

사람은 우환에서 살고 안락에서 죽는 것,

백금(白金) 도가니에 넣어 단련할수록 훌륭한 보검이 된다

아하, 새벽은 아직 멀었나 보다.

 

 - 시집 <다시 광야(曠野)에서> (창작과비평사 1976)

 

 고향 유택과 모교인 강경상고 교정, 대전 보문산 공원에 그를 기리는 시비(詩碑)가 있다.

 

 

시인 김관식(1934 ~ 1970)

 

 

 

 

 김관식은 1955년 [현대문학]에 동서 서정주의 추천으로 시 <연(蓮)><계곡에서><자하문 근처>로 문단에 등단하였다. 그러나 문단 활동 전에 이미 처녀시집 <낙화집>(1952)을 조지훈의 서문을 받아 출간한 바 있다. 이형기ㆍ이응로와 같이 펴낸 <해 넘어가기 전의 기도>(1955)와 <김관식 시선>(1956)에서 나타나는 시 경향은 일찍이 한학을 익힌 탓으로 동양적 정서에 바탕을 두고 자연과 인생을 폭넓게 읊어내려 가는 웅혼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임원생활지(林園生活志)

 

 집안이 간구하면 어진 안해를 생각하게 된다더라 어진 안해를.

 

 무너진 성(城) 너머로 아침 햇살이 필락말락 동천홍(東天紅)의 한때를

 

 나의 게으름을 이름 모를 산새들이

 깨워 줄 무렵, 런닝사쓰 바람으로

 조로에 물을 담뿍 퍼 들고

 상치 쑥갓 아욱 들과

 갈증(渴症)이 있을 듯한 나의 정원수목(庭園樹木)들에게

 나는 친절(親切)한 급수부(給水夫)가 된다.

 

 안해여, 나의 안해와, 나와 같이 가난한 모든 시인(詩人)의 안해들이여

 남의 집 텔레비 안테나 키가

 높고 큰 것을

 너의 지아비에게 뇌까리지 말라.

 나는 이런 때 오릉중자(於陵仲子)의 어진 안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재상(宰相)이 되면

 화려한 집에서 고량진미(珍味)를 먹게 된다고 말하는 남편에게 베를 짜면 영감이 신 삼고,

 하루에 세 때 끼니를 잇는데

 

 집이 좋았자 한 몸뚱이를

 용납할 뿐

 맛이 있었자 배를 채울 뿐.

 

 - 시집 <다시 광야(曠野)에서> (창작과비평사 1976)

 

 

김관식의 손위 동서 미당 서정주

 

 

 1960년대 후반의 시세계는 이 시대의 사회적 부조리와 정치적 모순에 대한 꾸밈없이 생각한 바의 매도를 시로 표현하였고, 가난하게 사는 자신과 이웃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의 정이 융합된 시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때의 시로 <강동(降冬)의 서(書)><자다가 일어나 보니 배추밭에서>(1967) <가난 예찬>(1968) <호피(虎皮) 위에서>(1970) <폐가(廢家)에 부쳐>(1970) 등이 있다. 


 

폐가(廢家)에 부쳐

 

 길을 가다 보니

 외딴 집 한 채가 비어 있었다.

 무슨 이 집의 연척(緣戚)이라도 되는 양

 앞뒤를 한 바퀴 휘둘러보다.

 구렁난 지붕에는

 풀 버섯이 같이 자라고

 썩은새 추녀 끝엔 박쥐도 와서 달릴 듯하다.

 먼지 낀 툇마루엔 진흙 자국만 인(印) 찍혔는데

 떨어진 문(門)짝 찢어진 벽지(壁紙) 틈에서

 퀴퀴한 냄새가 훅 끼치고

 물이끼 퍼런 바가지 샘에

 무당(巫堂)개구리 몇 놈이 얼른 숨는다.

 

 이걸 가지곤

 마른 강변(江邊)에 덴소 냅뛰듯

 암만 바시대도

 필경 먹고 살 도리가 없어

 별똥지기 천수답(天水畓)과 골아실 텃논이며

 논배미 밭다랑이 다 버려둔 채

 지게품을 팔고

 막벌이를 하더라도 도회지(都會地)라야 한다고…

 오쟁이 톡톡 털어 이른 아침을 지었을 게고

 게다가 차(車) 안에서 먹을 보리개떡도 쪘을 테지만

 한번 떠난 뒤 소식(消息)이 없고

 

 장독대 옆에

 씨 떨어져 자라난 맨드라미 봉숭아꽃도 피었네.

 돌각담 한모퉁이 대추나무에

 참새 한 마리 포르르 날아들어

 심심파적(破寂)으로 주인(主人)의 후일담(後日譚)을 말해 주는 양

 저 혼자 재재거리다 말고 간다.

 찌는 말복(末伏)철 저녁 샛때

 귀창 터지거라

 쓰르라미만 쓰라리게 울고 있더라.

 

- 시집 <다시 광야(曠野)에서> (창작과비평사 1976)

 

 

 

 

 

 김관식의 시 세계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전후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 신세대적 전통주의 범주에서 이루어졌다. 첫 시집인 ≪낙화집≫에 시조와 형태가 거의 유사한 단행시들이나, 심지어 한시를 다수 포함한 사실로 김관식의 시 창작이 전통 추구에 대한 당시 보편적인 분위기의 연장선상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시인은 향교 제관이었던 아버지에게 영향을 받아 여러 유학서나 한시를 번역하는 등 어린 시절부터 습득한 한학과 유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이처럼 동양 고전에 두루 능통했던 그는 특히 노장사상을 기반으로 한 서정적 세계관을 작품에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가난예찬

 

귀를 씻고 세상 일 듣지를 말자.

피에 젖은 아우성

저마다 기쁜 호흡을 지키기 위해

사나이는 모름지기 곡괭이 들고

녀자여, 너는......

세리도 배고파 오지 않는 곳.

낮거미 집을 짓는 바람벽에는

썩은 새끼에 시래기 두어 타래......

가난! 가난! 가난 아니면

고생! 고생! 고생이랬다.

단정학은 야위어 천 년을 사네,

성인에게 가는 길은 과욕의 길.

밭고랑에서 제 땀방울을 거둬들이는

지나의 한 꾸리(고력)와 같이

세월을 목에 감고 견디어 보자.

가만히 내 화상을 들여다본즉

이렇게 - 언구렁창에 내던져 마땅하리라.

눈으로 눈이 들어가니

요지경 같은 세상을 떠나

오늘도 나는, 누더기 한 벌에 바리때 하나.

눈포래 윙윙 기승부리고

사람 자국이 놓인 적 없이

흰곰만 아프게 소리쳐 우는 저,

천산북로를 넘는다.

 

 - 시집 <다시 광야(曠野)에서> (창작과비평사 1976)

 

 

공초 오상순과 김관식

 

 

 어려서 한학과 서예를 익히고 성리학과 동양학을 배웠기 때문에 동양인의 서정세계를 동양적인 감성으로 노래하는 특이한 시풍을 이룩하였다. 심한 주벽(酒癖)과 기행(奇行)으로 많은 화제를 낳기도 하였으나, 동양인으로서 투철하려고 한 몸부림은 시와 인간에 특유의 체취를 풍기게 하였다. 

 그는 지나치게 술을 좋아하고 세속적 굴레에 얽매이지 않는 호방한 기질 탓에 문단사(文壇史)에 몇 안 되는 기인(奇人)으로 손꼽힐 만큼 여러 기행(奇行)과 일화를 남기며. 문단에서 ‘미친 아이’로 불렸다. 그는 타인의 시에 가식이 있다거나 바르지 못하다는 판단이 서면, 사람을 가리지 않고 곧바로 독설을 내뱉었으며, 나이 많은 문단의 중진들을 부를 때도 격식과 예의를 차리지 않고 ‘군(君)’자를 붙여 제자 다루듯 대했다.  4ㆍ19혁명에 감격해 국가의 민주화와 발전에 기여한다며 국회의원에 출마하고, 가난한 시인들을 위해 집을 지어준다며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산동네에 무허가 판잣집을 지어 파는 등 기행을 펼쳤다.

 

 

 

 

 

 

 

'남승원이 엮은 ≪초판본 김관식 시선≫'에서 발췌한 내용을 소개한다.

 

 

●김관식 시인이 ‘산을 향하여 앉은 뜻’은 무엇인가?

김관식 시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거산호(居山好)> 두 편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산’은 일종의 이상향이다. 이해관계에 얽매이는 세속 공간인 ‘장거리’를 등지고 앉아 ‘산’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산’이 현실과 대립하는 공간임을 알 수 있다.

 

전통 가치를 탐색하고 형상한 김관식의 태도는 어디서 비롯되었나?

향교 제관이었던 아버지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한학과 유학을 배웠다. 민족 얼을 강조한 정인보에게 배우면서 큰 깨달음을 얻는다. 해방 이후에는 오세창에게 서(書)를, 최남선에게 동양학을 배웠다.

 

김관식의 산은 서정주나 김영랑의 산과 무엇이 다른가?

“山에서도 오히려 山을 그리며” 산다는 김관식에게 ‘산’은 현실 모순을 지양하는 수행 공간이다. 초월해 존재하지 않고 현실에 바탕한 공간으로서 ‘산’을 바라본다.

 

전통 가치와 현실 모순은 김관식의 내부에서 어떤 방식으로 통일되는가?

유례없는 비극이 진행되던 1950년대에 김관식은 비극이 없는 이상향을 꿈꾸면서도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이상 공간이 얼마나 무용한지를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 결과 전통적인 이상향의 모습을 수용하면서도 이를 구체적인 현실과 결부하는 자기만의 방식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김관식은 왜 시를 썼는가?

≪김관식 시선≫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동양인이다. (…) 우리가 솔선해서 서양인이 핥아 버리고 지내간 사재조박(渣滓糟粕)을 다시 씹을 맛이야 없지 않겠는가. (…) 그리하여 나의 시적 실존의 세계가 마침내 형이상적 종교의 경지에까지 비상하기를 스스로 기대한다.”

 

김관식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가?

시 창작의 근원을 서양의 것과는 구별되는 지점에서 찾고자 노력한다는 뜻이다. 이와 함께 동양인이 공유하는 정신에 대한 ‘심각한 반성과 고민’이 바로 시를 창작하는 이유이자 목표라는 말이다.

 

김관식은 시를 김영랑에게 배웠나?

강경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해 교사이던 영랑에게 현대시를 배웠다. 이때 시 창작의 뜻을 세웠다.

 

김관식의 첫 시집 ≪낙화집≫은 1952년에 출간됐다. 고등학생 때 아닌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52년에 첫 시집 ≪낙화집≫을 출간했다. 등단도 하기 전에 시집을 발간한 셈인데, 스승인 김영랑 시인을 기리기 위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김영랑의 권두시와 조지훈의 서문을 실었는데, 전쟁 중에도 서문을 얻어서까지 시집을 간행한 사실이 시 창작에 대한 의지가 컸던 것을 방증한다.

 

김관식의 등단은 손위 동서인 서정주의 추천이었나?

첫 시집을 출간하고 3년 만인 1955년, 서정주 추천으로 시 세 편을 ≪현대문학≫에 발표하며 등단했다. 대학을 그만두고 서정주를 찾아다니며 시 창작에 몰두하던 1953년 무렵에 김관식은 서정주의 처제를 만나 한눈에 반했다.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음독자살까지 시도한 끝에 1954년 최남선 주례로 결혼식을 올려 서정주와는 동서지간이 된다. 하지만 서정주의 면전에서 ‘친일파 악질 시인’이라고 비난한 이후로 연을 끊어 버렸다.

 

천상병 시인은 <김관식의 入棺>에서 그를 어떻게 평했나?

“한다는 일이/ 가슴에서는 숱한 구슬./ 입에서는 독한 먼지./ 터지게 吐해” 놓았다고 김관식을 회상했다. 천상병은 ‘점잖은 친구들’에게 “이제는 당하지 않을 것이니/ 되려 기뻐해 다오./ 김관식의 가을바람 이는 이 入棺을”이라고 당부하며 시를 마친다.

 

김관식은 정치도 했나?

‘나라가 위급할 때 시인이라고 별유천지에서 희희낙락할 수 없다’고 출마의 변을 내놓았다. 1960년 4·19 직후였다. 서울 용산 갑구 민의원 선거에서 총리였던 장면(張勉)을 상대했다. 고향 재산을 모두 털어 선거에 뛰어들었지만 예상대로 낙선했다.

 

김관식이 국회의원에 낙선한 뒤 짓고 살았던 ‘육모정’은 어떤 곳인가?

지금의 홍은동 부근 산비탈 국유지를 무단 점거한 뒤, 시청 철거반에 맞서 판자촌을 만들고 ‘육모정’이라 이름 지었다. 그곳에 거주하면서 가난한 문인들을 불러와 살게 하고, 고아, 부랑자들을 모아 문학을 가르쳤다. 세상에 절망해 시를 접고 고향에서 영어 강사를 하던 신경림을 불러들여 다시 시를 쓰게 한 일화는 유명하다. 황명걸, 조태일 등 많은 문인들이 이곳에 살았다고 한다.

 

김관식의 삶은 어떻게 마감했나?

꼿꼿한 선비 정신, 오만과 기행, 가난과 육체의 고통을 세상에 남기고 1970년에 서른여섯에 간염으로 돌아갔다. 고향 유택과 모교인 강경상고 교정, 대전 보문산 공원에 그를 기리는 시비(詩碑)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