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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그해, 1986년 4월 전후의 학우들

by 언덕에서 2014. 3. 7.

 

 

 

 

 

그해, 1986년 4월 전후의 학우들

 

 

 

 

 

인간이 언어를 발달시키고 그 결과 운율 형식에 의해 자신의 정의(情意)를 표현한 것을 우리는 시(詩)라고 일컬어 왔다. 운율은 일상세계를 어떤 미묘한 커튼으로 격리시켜서, 독자의 마음을 ‘눈뜬 황홀’의 상태로 유도하기 때문이다. 시인들이 참지 못할 정의(情意)대로 흔히 노래해 온 것처럼 삶이 하나의 긴 여행이라면 그 구비구비에서 만났던 사람들 또한 길동무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그러한 동행자들을 '도반(道伴)'이라 부르는 것 같았다. 내가 인생이라는 길을 걸어오면서 만난 그들 중에는 단 한 번의 마주침으로 스쳐가버리는 사람이 있었고 , 또는 첫 만남의 서먹함이 사라지기도 전에 헤어져 종국에는 기억에서조차 사라져 버린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 갈림길을 빨리 만나 가슴 속의 진심을 전달하지 못하고 잃어버린 풋풋한 기억 속의 친구 역시 마음에 남아있다. 뒤돌아 생각해보면 갑자기 마주한 삶의 어려움과 신산함이라는 고통에 시달릴 때 빛처럼 다가오던 지혜의 스승들이야말로 갚지 못한 오랜 부채처럼 내 마음에 남아있다. 그리고 망각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오랜 시간의 지우개로부터도 살아남아 문득문득 그리워지는, 거칠고 비정한 삶의 길목에서 추억으로 아련하게 기억하게 만드는, 지난 날의 벗들이 있다.

 

 

 그해 3월 신학기에 복학을 하였으나 대부분의 입학 동기들은 졸업을 한 상태였고 그 공간을 3년 후배들이 채우고 있었다. 원래 남학생들이 주류여서 여학생을 구경하기 어려웠던 우리 과(科)는 3년 전 이상 현상으로 여학생들이 대거 입학했던 연유로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많은 여초학과(女超學科)가 되고 말았다. 1학년을 마치고 해병대에 입대하여 제대하여 복학한 동기 한 놈이 노장(老將)티를 내며 학급의 어른, 즉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열다섯 명의 복학생들은 대부분 행정고시나 공기업 및 대기업 입사 공부를 하고 있는 듯했고 나는 방향조차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상태였다. 이유는 해체하지 못한 ‘운동 써클’ 때문이었다. 학생운동의 방향이 주체사상으로 확인됨에 따라 리더인 선배가 모임의 해체를 결정했지만 구성원들의 인간관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틈만 나면 모여서 시국을 걱정했고 그 마무리는 부질없는 술자리로 이어졌다. 자연스레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서 비관적인 토로가 난무했고 공부를 해서는 뭐하겠느냐는 회의론 속에 휩싸였기에 취업에 대한 고민은 뒷전에 밀려있었다.

 이듬해 3월 서울대에서는 공개투쟁기구인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자민투)를 결성하고 그 산하에 ‘반전반핵평화옹호주쟁위원회’를 결성하여 대학 2학년생들의 전방입소 의무군사교육을 ‘양키 용병 교육’이라고 규정하며 전면적 거부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와중에 서울대 학생인 김세진(자연대 학생회장)과 이재호(반전반핵평화옹호투쟁위원장)는 분실 자살하여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전국에 알려지자 학교는 다시 한 번 소용돌이 속에 빠지고 전두환 군사정권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교내에 다시 사복 경찰들이 진을 치기 시작했다.

 총학생회는 김세진­·이재호를 추모하는 의미로 특정일의 모든 수업을 거부한다는 내용의 대자보를 학내 모든 게시판에 붙였다.

 

 

 

 

 문제는 그 다음날에 터졌다. 전날 자신의 수업에 학과 4학년 학생 전원이 수업 거부한 것을 확인한 독신의 40대 여교수는 격분한 채 수업 서두를 열었다.

 “여러분들은 유감스럽게도 전원이 어제 나의 수업을 거부했다! 여러분들은 지성인이 아니라 학생의 기본을 모르는 양아치로 보인다. 이제는 내가 수업을 거부하겠다. 나는 폭력 집단의 똘마니들에게 수업을 할 수 없다!”

 그 말 한 마디를 남기고 그녀는 교실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갑자기 학생들 모두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해병대 출신의 동기가 교단으로 나갔다.

 “여러분! 폭력 집단의 똘마니라니요! 이거 민주주의에 무식한 어용 교수의 폭력 아닙니까? 이젠 더 이상 참지 맙시다!”

 군중심리란 그런 것이다. 모든 이들이 흥분하게 되면 강경파의 뜻에 따라 나머지는 물불을 가리지 않게 되는 법이다. 자크 라강을 흠모한다는 여자 후배 한 명이 불을 붙였다.

 “여러분! 우리의 인격을 짓밟는 ○교수는 또 다른 독재의 상징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많이 당해왔습니다. 이제는 참지 말고 싸웁시다!”

 마치 사전 연습이라도 한 듯 ‘○○학과 ○교수 타도 비상 임시 위원회’라는 것이 금방 만들어졌다. 당시 우리 학년 학생은 50명이었는데 '○교수를 응징하기 위한 임시 대책 위원'으로 남학생 4명, 여학생 4명이 추대되었다. 누가 추천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우습게도 어떨결에 이 멤버 중에 내 이름이 올려지고 말았다.

 8명이 자리를 옮긴 학교 앞 중국집 골방에서 ‘○교수의 사과를 요구하는 성명서’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여학생들은 ○교수의 평소 독선적이고 비민주적인 사례들을 열거하기 시작했고 각각 사법고시와 행정고시를 준비하던 동기 두 녀석은 법률적이고 학구적인 측면에서 교수를 비난하는 논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자료들을 취합해서 최종 성명서를 만드는 일은 학과의 문사(文士)로 알려진 내 몫으로 정해져 버렸다. 

 여학생들은 ○교수의 문제점을 낱낱이 적은 대자보를 교내의 모든 게시판에 올려 그녀를 학교에서 완전히 매장시키자는 의견이었지만 군대를 갔다 온 나름대로 인생의 산전수전을 맛본 복학생들의 견해는 달랐다.

 “매장시키자고? 그래도 스승인데 지나치지 않은가?”

 투쟁 이념의 세례를 받은 냄새가 풀풀 풍기는 후배 여학생들은 ○교수에게 그간 받은 감정의 상처가 컸는지 이 날을 기다렸다는듯 강경 일변도였다.

 “선배님들이 어떻게 하든 우리는 싸웁니다! 저는 협박 전화라도 해야겠어요!”

 팽팽한 의견이 대립될 경우에는 강경파가 항상 승리하는 법이다. 그런 와중에서 내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고수(高手)들이 바둑을 둘 때는 단 한 집이라도 승리가 확인되면 굳이 대마(大馬)를 잡지 않는다. 상대방의 자존심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사를 충분히 밝혔으니 ○교수에게도 출구(出口)를 만들어주어야 하겠지. 서로 일방적인 평행선만 주장할 때의 결과를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르봉이 지적한 것처럼 ‘군중(群衆)은 군중 속에서 자기를 잃고 익명화되면 무책임한 행동을 서슴지 않아왔다. 비이성적인 광기에 빠지기 쉬우며, 거짓인 줄 알면서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군중이란 원래가 이상한 정열에 휘말리면 성난 파도처럼 휩쓸어 갈 수도 있으나, 일단 각자의 얄팍한 타산과 실리(實利)가 그 정열을 제어하게 되면 가을 벌판의 가랑잎처럼 흩어져 가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각자가 요구했던 내용들이 앞으로 전개될 득실 계산과 맞물리기 시작하자 강경파 여학생들 모두 꼬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우습게도 취업 공부에 불붙어 있어야 할 대학 4학년 학생들이 성명서 한 장을 만들기 위해 대여섯 차례나 학교 앞 중국집의 담배 연기 자욱한 골방에서 회동해야만 했고 그때마다 전원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만취된 상태로 귀가행 버스를 타야만 했다는 점이다. 내가 작성한 '○교수의 폭언에 대한 ○○학과 학생들의 입장(立場)'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성명서가 인쇄소에서 복사되었고 그 전단이 학과 전 학년에게 배포되었다. 얼마 후 고교 선배인 학과 조교 선생의 부름에 따라 학과 사무실에 갔더니 그는 자신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겠노라고 하면서 해결해 볼 테니 며칠간의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다. 학교 총장에게 이 사건이 보고된 상태라고 했다.

 이후 ○교수는 슬그머니 수업에 들어와서 학생들을 자극하는 발언을 삼갔고 학생들은 나름대로 예의를 표하기 시작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니까 말이다.

 

 

 세상살이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반드시 일장일단이 있기 마련이다. 좋은 일은 이 사건 덕분에 학과의 모든 후배 여학생들과 매우 친한 사이가 되었다는 점이고, 나쁜 일은 그때 모였던 우수한 성적의 우등생 6명 모두 졸업하는 날까지 장학금을 한 푼도 못 받는 신세가 되어 집안의 생계를 어렵게 만든 점이다. 그리고 그 모임의 동기 한 명과 여학생 한 명, 두 남녀의 불미스런 애정행각 스캔들로 인해 졸업 후 모두가 상종하기를 거부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정도일 것이다. 그렇지만 가끔씩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눈이 오는 날 좋아하는 사람이 그리워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연출하는 순백(純白)의, 그리고 거의 완전한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그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즐기고 싶은 마음이 그리움으로 솟고, 또 그 아름다움이 이내 스러질 것이란 것 때문에 그 그리움은 더 강렬해지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기대라든가 희망이란 말들과의 까닭 모를 혼동 때문에 환상을 품는다는 것은 종종 낙관적인 삶의 태도로 오인되는 수가 있었다. 무엇이든 아름답고 완전한 것, 가장 귀한 것은 기대했던 현실 속에 있지 않았다. 그 시간이 지난 후 반추해 볼 때 그 귀함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은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가끔씩 생각나는 그리운 얼굴들. 모두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