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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by 언덕에서 2014. 2. 28.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3년 만에 복학한 나는 한동안 정신적인 공황 상태를 겪어야만 했다. 많은 이유를 필설(筆舌)로 다 할 수 없을 만치 사고(思考)가 정체되어 도무지 앞길이 보이지 않는 패닉 상태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해 전두환 정부의 간선제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는 날로 격해져 갔고 4층 이상의 캠퍼스 건물에는 연일 '군사정권'을 반대하는 삐라가 날아 다녔다. 삐라가 날릴 때마다 숨어있던 사복 경찰들이 그곳을 향해 뛰어갔다. 봄날 하늘을 날아다니는 하얀 전단지들을 보며 그 모습이 흡사 떨어지는 하얀 꽃잎 같다고 생각했다.  그해 봄, 서울대의 김세진·이재호 두 학생이 분신자살을 했다.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

 

 나는 마종기 시인의 시를 읊으며 하늘을 향한 학교 뒷산을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복학한 학과에는 여학생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말없이 수업에 들어갔다 나가곤 하는 내게 말붙이는 이는 없었다.

 입대 전, 내가 속했던 비밀 스터디 그룹은 중정(中情)의 사찰로 와해된 지 오래되었고 강제 징집되었던 리더인 선배(지금은 S신문사 논설위원으로 근무 중이다)는 제대하여 힘겹게 학교로 돌아왔다. 그는 나를 비롯한 후배들에게 선언했다.

 “그간 민주주의를 위해 함께 공부했지만 내가 파악한 투쟁 방향의 본질은 주체사상이었다. 김일성의 주체사상은 전두환의 군사독재와 다를 게 뭐가 있을까? 그들의 세습 독재는 남한에 비해 훨씬 퇴행적이고 악랄하며 반민주적이다. 그들과 달리 남한의 지성들은 스스로 민주주의를 쟁취할 역량이 충분하다. 그간 우리가 추구했던 평등한 세상과 민주주의는 주체사상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자율적으로 공부한 민주주의에 관한 내용들은 앞으로 맞을 군사정권이 사라진 민주 사회를 위해 사용하도록 하자. 우리 모임도 이 즈음해서 해체토록 하겠다. 그러나 우리들 사이의 인간관계는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친구 녀석이 잔을 던지며 반발했다.

 “선배! 그간 당신을 믿고 싸우다 감옥에 가고 퇴학당한 후배 동지애들에게 부끄럽지도 않소!” 

 녀석과 대립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선배의 판단에 공감하고 있었다. 반미 자주화의 일환으로 주체사상이라니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었지만, 일부에서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냉엄한 현실이기도 했다.

 

 

 

 

 

 어용 교수로 지탄받던 군 미필자인 30대 중반의 지도교수는 눈을 부라리며 “쓸데없는 짓을 하면 용납하지 않겠다.”는 말로 매일 엄포를 놓고 있었다. 군사 정권에 기생하며 살아가는 기생충,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다름 아니었다.

 장학금을 받아서 집안의 생계를 도우려는 복학생들 중 일부는 그에게 홍등가(紅燈街)의 술과 성접대를 제공하여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다는 소문도 돌고 있었다. 취업 준비를 위해 도서관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으면 핸드마이크를 들고 도서관 열람실에 뛰어든 학생회 후배들의 흥분된 목소리가 조용한 공간의 적막을 깨뜨리곤 했다.

 “민주 학우 여러분! 전국 곳곳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외침들이 가열찹니다. 도서관에 숨어 있는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피 흘리는 민중들과 동지들에게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니 고교 후배 녀석이 빨간 띠를 머리에 두르고 절규하듯 외치고 있었다. 학교 정문 앞에는 학교 밖으로 진출하는 학생 시위대를 막기 위해 경찰의 장갑차가 매 시간 최루탄을 쏘아 올리고 있었다.

 복잡한 심경에서 고골리의 <외투>를 다시 읽었다. 여전한 감동이었다. 아까끼아까끼예비치의 보잘 것 없는 생애를 이 거장은 무한한 연민과 공감으로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우리들은 모두 <외투>에서 나왔다’라고 말한 도스토예프스키의 격찬은 과장이 아님이 분명했다. 자만에 빠진 주지주의, 허영에 찬 의식의 흐름, 호들갑을 떠는 실존, 그들은 모두 헛된 바벨탑을 쌓아가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식자들은 현대라는 세기가 마치 인류사의 한 이변이라도 되는 것처럼 과장하면서, 오직 그들만이 선택된 인간인 것처럼 선량한 민중으로부터, 대지와 생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허공에다 탑을 쌓고 있지만 알고 보면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얄팍한 생존술일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이크를 들고 외치는 그 친구나 그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자, 모두 민주주의라는 미명 하에 자신의 유익을 구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자신의 기발한 상상력이나 엉뚱한 속단, 또는 온전히 허풍으로만 이루어진 그들만의 상형문자를 평범한 학생, 그리고 민중들이 해독하지 못한다고 온갖 조롱과 아유를 퍼붓고 있었다. 하지만, 기실 내부적으로 민주적이지 못한 그들이야말로 자신이 그토록 비판한 부조리나 소외감 ㆍ 독선 ㆍ 독재 같은 것에 미쳐 죽거나 이윽고는 무너져 내릴 그 바벨탑과 더불어 땅에 떨어져 묻히지 않으면 안 될 것임은 필연적이었다.

 그런 혼돈스런 심경을 정리하기 위해 틈만 나면 시를 적기 시작했다. 당시(1985년) 군사 정권에 대한 분노,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에 대한 의문 등이 주된 내용이었다. 내가 쓴 '엉터리 시'를 누군가가 많이 잃어주었으면 좋겠다는 객기(客氣)에서 몇 편의 시를 완성하여 학교 신문사에 투고를 했다. 그 '엉터리 시'의 내용은 군부대의 바리케이드와 철문을 형상화하여 그것이 자신의 사고(思考)를 억압하는 '벽'으로 상정하고 그리운 '누군가'를 '당신'이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 푸른 제복을 입은 청년의 좌절된 의지를 나름대로의 서정적인 운문으로 정리한 것이었다.

 

 

그림 출처 : 글림작가의 세상바라기 ( http://blog.daum.net/e-klim

 )

 

 그런데 학보사에 기고(寄稿)한 지가 한 달이 지났지만 학교 신문에 내 시는 실리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나는 대학신문사를 찾아가서 원고를 회수하기로 했다. 그런데 학보사에서 만난 담당 기자는 같은 학과(學科) 같은 학년의 후배 여학생이었다. 수업시간마다 만나는 사이였으므로 통성명을 할 필요는 없었다. 학교 뒷쪽의 하숙촌으로 통하는 방향에 '개구멍'이라고 불리는 작은 문이 있었고 그 문 옆의 남루한 쓰레트 집에서 그 후배가 자취하고 있었는데, 저녁 무렵 그곳을 지나치면서 그녀가 근처의 구멍가게에서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한번은 그 구멍가게에서 친구와 막걸리를 마시다가 마침 부식(副食)을 사러온 그녀와 합석한 적이 있었다. 김세진·이재호 두 학생이 분신자살한 다음날이었다. 막걸리가 두 잔 정도 들어가자 그녀는 내게 탄식하듯 말했다.

 “선배님, 우리나라에서 이젠 최소한의 민주주의 마저 죽었어요!”

 한 시간 째 소주에 막걸리를 탄 ‘막소’를 마시던 나는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대답했다.

 “후배님, 막소 때문에 나도 죽었소!”

 그 말이 끝나자 말자 그녀가  ‘푸핫!!’하고 웃음을 터트리는 바람에 입속의 막걸리가 사방으로 튀어 단벌이던 내 양복 상의가 엉망이 되었던 기억도 있다.

 그 후배에게 학보에 나의 시가 실리지 않은 이유를 물으며 원고를 되돌려 줄 것을 요구했다. 후배가 찾아온 나의 원고는 이리저리 빨간 색연필로 난도질이 되어있었다. 학교 신문사를 총괄하는, 문학평론가로도 유명한 국문과 교수가 당시 군사 정부의 검열을 감안해 이곳저곳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표현들을 지적하다 보니 일어난 결과였다. 원고를 되돌려 받고 돌아서는 나에게 후배는 '개인적으로 너무 마음에 드는 시였다……. 안타깝다……. 기자로서 미안한 마음뿐이다……. 황지우의 시를 읽는 기분이었다……. 대단한 실험시라고 생각한다……. ' 그런 위로의 변을 들려주었다. 틈만 나면 학과 공부와는 별도로 치열하게 문학 공부를 했다고 자부해왔지만 나의 과문(寡聞)함 탓이었는지 처음으로 황지우라는 시인의 이름을 들은 날이었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에 모 티비 방송사의 사회부 여기자가 고속도로변에서 취재 중 교통사고로 즉사한 사건이 있었다. 그 참변을 당한 여기자가 위에서 언급한 후배이다. 고향이 거제도였던 후배의 집은 바다가 보이는 어촌의 언덕 동네였는데, 유년 시절부터 하도 바다를 많이 바라보아서 눈 흰자위가 시퍼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세월이 흐른 어느 봄날, 책장을 정리하던 아내가 낡은 앨범을 뒤적거리다 내게 한 마디 했다.

 "어머, 이 사진, 대학 다닐 때 ○○와 둘이서 찍은 사진이네요. 대학에 갓 입학한 그때 둘다 객지였든지라 참 친했어. ○○는 지금쯤 저 세상 좋은 곳에 있어야 할텐테."

 앨범을 들여다 보니 맑은 봄날 벚꽃이 흩날리는 동산에서 이제 막 어른이 된, 고등학생 티가 철철 넘치는 숙녀(淑女) 둘이서 밝은 웃음으로 화장(化粧)한 채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이 한 장 있었다. 해마다 봄이 오고 꽃잎이 휘날리면 생각난다.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황지우 시인의 '연혁'을 이야기하던 그 후배, 숨차게 달렸던 그녀의 짧은 생애를 아쉬워하며 늦게나마 명복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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