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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독수리를 위한 변명(辨明)

by 언덕에서 2014. 1. 24.

 

독수리를 위한 변명(辨明)

 

 

 

 

 

 

그 시절, 군생활의 시작인 신병훈련소에서부터 자대(自隊)까지 함께 와서 같은 내무반에서 동고동락하던 이른바 '군대 동기'가 있었다. 그는 인천에 있는 I대학교 화공과에 재학 중 입대했는데 고향이 마산인 관계로 훈련소에서부터 나와 금방 친해졌다. 신병교육대에서 훈련 받는 중에 아버님이 별세하는 아픔을 겪었던 그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면서도 술. 담배를 하는 좀 괴짜였는데 상당한 양의 독서를 하는 것 외에도 정의감과 의협심이 유달리 강했다. 우리는 둘 다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나는 테가 큼직한 뿔테 안경을 썼었고(조영남 안경을 연상하면 된다) 친구는 모서리가 유달리 각이 진 날카로운 인상의 안경을 썼다. 그래서 둘에게 붙은 별명이 ‘부엉이와 독수리'였다. 안경테 모양이 너무 커서, 날카로워서 붙은 칭호였다.

 

 

 

 

 어쨌든 우리는 수많은 고생 끝에 26개월을 보내고 제대를 한 달 앞 둔, 그야말로 떨어지는 낙엽에 부딪쳐 다칠까봐 노심초사하는 말년 육군 병장이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갈참'이라도 야간 경계 근무에는 열외가 없었다. 탄약고나 위병소 보초 근무는 대개 고참병 한 명과 후임병 한 명 해서 2인 1개조로 구성되기 마련인데 제대 말년에는 아무래도 근무 강도가 약해져서 그저 적당히 시간을 보내게 된다. 당시 우리 부대에는 훈련소를 마치고 갓 전입해 온 이등병이 몇 명 있었는데 모두들 나와 같은 조로 편성되길 원했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 적당히 근무하는 고참병이었기 때문이다.

 그 날 나와 근무한 '박○○'라는 이등병은 고향이 경남 진주(晋州)였다. 후임병들 사이에서는 별명이 '말(馬)'으로 불리는 모양이었는데 선임병들은 그 명칭의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비교적 큰 키에 뚱뚱한 몸매의 전형적인 시골 촌놈 스타일 외모의 소유자인 그는 뭐랄까, 사극 드라마에 나오는 힘 좋은 머슴형의 얼굴이었는데 특이하게도 코에 사마귀가 나 있어서 선임병들은 그를 ‘코사’라고 불렀다. (지금부터 그를 ‘코사’로 칭하겠다) 진주에서 공고를 졸업하고 별로 하는 일 없이 놀다가 입대했다고 했는데 멍청하게 보이면서도 능글맞은 눈빛이 좀 특이한 친구였다.

 유명 작가의 소설 속에서도 거의 비슷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그날은 이랬다. 장거리 무장 행군 훈련을 마치고 저녁 식사 후 가진 휴식 시간이었다. 함께 코사와 목욕을 다녀온 또래들의 요청으로 그는 내무반 구석에 자리 잡은 동기들 틈에서 개인화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고참병들은 무슨 일인가 멀리서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바지 앞단추를 끄르고 장대한 병기(兵器)를 꺼내 보일 때만 해도 모두들 킥킥거리기만 했다. 너무도 황당한 광경에 나도 한 마디 했다. "저 자식 저거, 미친 놈 아냐?"

 그러던 것이 누군가 주머니에서 꺼낸 편지 봉투를 그에게 내밀었고, 편지 봉투를 받아든 코사는 편지 봉투 안으로 '훗'하고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는 둥글게 입을 벌린 그 빈 봉투 속으로 자신의 포신(砲身)을 들이밀었다. 편지 봉투가 가득 찼다. 주변에 모였던 사병들이 탄성을 지르며 박수를 쳐댔지만 정말 대단한 일은 뒤이어 벌어졌다. 녀석이 자신의 뿌리에 불끈 힘을 주자 그 뿌리를 담고 있던 편지 봉투가 '뿌지직' 하고 찣어져 버린 것이었다. 이제 모든 사병들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마침 내무반을 순시 중이던 자칭 담력과 경륜이 출중한 중대장이 이 장면을 목격하고 탄식서린 소리로 중얼거리며 녀석의 병기를 향해 경례를 올렸다. 으앗, 사령관님!

 

 

 

<제대를 몇 달 앞두고 찍은 사진.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글쓴이며 세 번째가 '논개 사건'으로 묵사발이 되었던 '코사'다 >

 

 어느 날인가 나의 야간 보초 근무가 코사와 같은 조로 편성되어 있었다. 고참병이 전입한 신병에게 흔히 하는 질문이 있다. 당시에는 신병이 전입하면 '사랑 이야기'를 끄집어내라고 강요하는 부대가 많았는데 우리 부대에서는 공식적으로 그러지는 않았다. 독수리와 내가 그런 분위기를 없애려고 노력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말년의 보초 근무는 매우 길게 느껴졌기에 생각 없이 한 마디 툭 던져 보았다.

“너, 여자 친구 있냐?”

 그런데……. 의외의 답변이 나왔다.

“여자를 진저리나도록 많이 경험해서 이젠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 나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기가 막혔다. 이야기인 즉은 공고를 졸업한 후 백수 생활을 하는데 여자를 사귀려 하니 그런 처지의 그를 누구도 만나주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살던 도시의 모 대학교 앞의 다방에서 1년을 죽치며 살다시피 했다고 했다. 헌책방에서 법학 개론 한 권을 사서 옆구리에 끼고 S대 법대생인데 휴학 중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여대생들과 친해진 후 한 명씩 각개격파(各個擊破)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놀라지 마시라.

 '코사’는 자신이 해치운(?) 여대생이 자그마치 200명이 넘는다고 내게 떠들었다('해치운'이 어떤 의미인지는 별도로 설명하지 않겠다). 야간 경계 근무 중에 후임병에게 이런 자랑질을 듣는 순간 나는 경악했다. 평범하다기 보다는 아주 못생긴 외모에 무식함이 뚝뚝 흘러내리는 천박한 말투……. 무엇이 수많은 여대생들을 끌리게 만들었을까? 결론은 S대 법대 다니는 예비 판검사라는 거짓말 때문이 아니었을까? 일단 근무를 마치고 내무반에 돌아와 잠을 청했으나 씁쓸함은 더해만 갔다. 얼굴을 붉히며 그녀에게 제대로 말조차 붙이지 못했던 나 자신의 소심함과 내가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에 '현학(衒學)이 피곤하다'며 찢어버렸다는, 3년 전 무정했던 그녀에 대한 트라우마가 또다시 생각났던 것이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무슨 일을 했는지 말년임에도 정신없이 바빴는데 행정반에서 독수리를 만났다. 갑자기 전날 밤 보초 근무 때 ‘코사’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결국은 녀석이 200명의 정조(情操)를 유린했다는 건데……. 야!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독수리의 얼굴이 갑자기 붉으락푸르락 변해갔다. 급기야 내무반으로 달려가더니 큰 소리로 코사를 불렀다.

“코사! 이리와! 이 짐승 같은 새끼!”

 독수리는 군대에 오기 전에 전통 궁중 무술을 익힌 유단자였다.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은 펀치를 무수히 코사의 면상에 퍼부었다.

“이 나쁜 새끼, 니가 논개를 200명이나 잡아 묵(먹)고도 지구 상에서 무사할 줄 알았어?”

 아아,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날 만큼 웃음이 난다. 논개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왜군 장수를 안고 물에 뛰어든 진주(晋州)의 상징인데 독수리의 불타는 정의감에 코사는 그날 묵사발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진주 촉석루>

 

 

 그로부터 5년 후, 독수리와 연락이 되어 내가 근무하는, 태평로의 회사 본관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먼 거리에서부터 서로를 알아 본 둘은 아무 말이 필요 없다는 듯 가슴 벅찬 포옹을 했다. 사필귀정이겠지만 열심히 공부하던 독수리는 선경합섬(사명이 변경되어 지금은 SK케미컬) 수원 공장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북창동에서 소주에 삼겹살을 구워 먹으면서 독수리에게 물어보았다.

“그때, 말년에 코사를 왜 그리 때렸니?”

“하하, 불공평하잖아. 당시 너와 나는 여자 손목도 못 잡아 보았는데…….”

 다시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말을 음미해 보자. '사(事)'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을 뜻하고, '정(正)'은 '이 세상의 올바른 법칙'을 뜻한다. 사필귀정은 좋은 일을 하면 반드시 복을 받고 나쁜 일을 하면 반드시 벌을 받는 식의 올바른 법칙의 적용을 받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고참병들의 횡포(橫暴)라고 야단치지 마시라. 죄는 지은 데로 가고 덕도 닦은 데로 가는 게 세상의 이치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살이가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사필귀정 식으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더라도, 사필귀정의 논리가 맞는다고 믿으면서 살고 싶다. 한 번쯤 이마를 짚고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그날의 독수리를 욕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요즘 방식으로 말하자면 나름대로 독수리는 정의로운 사회구현을 위해 행동으로 보인 선구자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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