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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정현종 시집 『견딜 수 없네』

by 언덕에서 2014. 2. 3.

 


정현종 시집 『견딜 수 없네』

 

 

 


 

물질화된 사회 속에서 매몰되어 가는 인간의 순수한 영혼에 대해 노래하며, 아픈 사람의 외로움을 따뜻하게 위로하는 시인. 오늘 소개하는 『견딜 수 없네』의 저자에 대한 보편적인 소개말이다. 정현종(1939 ~  ) 시인은 대광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59년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다. 재학 시절 대학신문인 [연세춘추]에 발표한 시가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두진 교수의 눈에 띄어 1964년 5월 [현대문학]에 추천을 받았다. 1965년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해 3월과 8월에 각각 <독무>와 <여름과 겨울의 노래>가 [현대문학]에서 3회 추천을 받고 문단에 등단했다.




견딜 수 없네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 시집<견딜 수 없네>(시와시학사.2003)


 1966년 황동규ㆍ박이도ㆍ김화영ㆍ김주연ㆍ김현 등과 함께 동인지 [사계]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1970~73년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로 일했으며, 1975~77년 [중앙일보] 월간부에서 일했다. 1977년 신문사를 퇴직한 뒤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부임해 시 창작 강의를 했다. 1982년부터 연세대학교 국어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다 2005년 정년퇴임했다. 1972년 첫 시집 <사물의 꿈>을 출간한 이후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60년대사회집] [사계] 동인. 한국문학작가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1992), 대산문학상, 현대문학상(1995), 미당문학상 수상(2001), 공초문학상(2004) 등 수상했다.

 

 

 

 

 



이쁜 여자가 스쳐 지나가면


이쁜 여자가 스쳐 지나가면

내 다리는 갑자기 감속되다가

급기야는

뒷걸음질을 치는 것이야!

(이상할 게 없어요

뒷걸음질이 건강에 좋다는 설도 있으니)

 

- 시집<견딜 수 없네>(시와시학사.2003)


 정현종 초기의 시는 관념적인 특징을 지니면서 사물의 존재 의의를 그려내는 데 치중한 반면, 1980년대 이후로는 구체적인 생명 현상에 대한 공감을 다룬 시를 발표했다. 그의 시는 사물과의 거리와 긴장을 유지하면서 대상을 현상적으로 파악하는 데 있다. 그는 사물 하나하나에 인간의 감정이 지니는 요소 하나하나를 모두 추상화ㆍ객관화시킴으로써 사물과 시인 사이의 거리를 항상 의연하게 유지시키는 능력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사랑의 문제, 언어의 문제 등 대사회적인 관심으로까지 확대, <말의 형량>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말을 사랑할 줄 모르는 자, 말의 사랑을 모르는 자의 무신적(無神的) 폭력, 가엾음, 분노, 가엾음의 분노, 분노의 가엾음……. 말이 머리 둘 곳 없음에 시대가 머리 둘 곳이 없다.’는 토로를 낳게 한다.

 



여기가 거기 아닌가!


-신림(神林) 민박집에서



골짜기가 깊어 청량(淸凉)한

저녁 시간

옥수수술을 따라놓고 평상에

갈 데 없이 앉아 있는

져녁 어스름.

그 집 개 백호(白虎)는

젊은 주인 아들 내외가 돌아왔다고

마당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숨가쁘도록 질주하고

주인 아주머니는 고추를 따다가 씻어서

들고 오고

배가 보름달인 젊은 며느리는

담근 된장을 퍼오고

닭은 잡아놓은 모양이고

(무슨 문자[文字]가 필요하랴)

모든 움직임이 아름다우니

(즉 없는 게 없으니)

여기가 거기 아닌가!

 

- 시집<견딜 수 없네>(시와시학사.2003)


 

 시집 『견딜 수 없네』를 관류하는 정서는 변화하고 소멸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동시에 그것을 끌어안는 거대한 포용, 자연과 합일된 경지다. 정현종은 시간의 흐름에 마모되는 존재들을 민감하게 발견해내며, 고요하게 바라본다. “바라보는 일은 그것 자체로 완전한 행동”이라 말했던 정현종의 산문에서처럼 이 애정 어린 응시를 따라가다 보면 생명과 의지로 끓어오르는 세계에 대한 시인의 무한한 긍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의 명함


이 저녁시간에,

거두절미하고,

괴강槐江에 비친 산 그림자도 내

명함이 아닌 건 아니지만,

저 석양 -이렇게 가까운 석양!- 은

나의 명함이니

나는 그러한 것들을 내밀리

허나 이 어스름 때여

얼굴들 지워지고

모습들 저녁 하늘에 수묵 번지고

이것들 저것 속에 솔기 없이 녹아

사람 미치게 하는

저 어스름 때야말로 항상

나의 명함이리!

 

- 시집<견딜 수 없네>(시와시학사.2003)


 동시에 이 ‘바라봄’은 어둠 속에서 새 생명을 다시 틔우는 우주의 에너지 흐름에 대한 찬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정현종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쉽고 적막한 심사를 탐사하면서도 결코 감상적인 어조에 빠지지 않는다. 적막한 애수와 동심의 유머가 회통하고, 생의 깊이 있는 희비극이 교차하면서, 삶의 심연과 우주적 진실에 다가서는 유쾌한 기지를 보인다”(우찬제, 신판 해설 「어스름의 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