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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3인 시집 『청록집(靑鹿集)』

by 언덕에서 2014. 1. 27.

 

 

 

 

 

3인 시집 청록집(靑鹿集)

 

 

 

 

 

 

 

조지훈ㆍ박목월ㆍ박두진이 1946년 6월 [을유문화사]를 통해 간행한 <청록집>은 해방 후 처음 나타난 창작 시집이다. 이한직(李漢稷), 김종한(金鍾漢)과 함께 [문장](1939)지 출신인 이들은 선자(選者) 정지용(鄭芝溶)이 해방 후 좌경(左傾)한 것과는 달리 모두 민족진영에 몸담아 작품으로 ‘순수문학’의 우수성을 실증한다.

 김춘수(金春洙)가 지적한 것처럼 ‘일제말 몇 해를 한국어와 한국 고유의 정서에 굶주려 온’ 우리에게 <청록집>은 ‘말라붙은 겨레의 심정을 적셔 준’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 자체가 암흑기의 우리들에게는 마지막의 거처요, 모국어에 대한 애정이었어요. 그래서 쓴 시들은 정서(淨書)해서 항아리 속에 감추었다가 해방이 되자 도로 파내 간추렸습니다.”

 

 

산그늘 

 

                                                                   박목월

 

 장독 뒤 울밑에

 목단(牧丹)꽃 오무는 저녁답

 모과목(木果木) 새순밭에

 산그늘이 내려왔다

 워어어임아 워어어임

 

 길 잃은 송아지

 구름만 보며

 초저녁 별만 보며

 밟고 갔나베

 무질레밭 약초(藥草)길

 워어어임아 워어어임

 

 휘휘휘 비탈길에

 저녁놀 곱게 탄다

 황토 먼 산길이사

 피 먹은 허리띠

 워어어임아 워어어임

 

 젊음도 안타까움도

 흐르는 꿈일다.

 애달픔처럼 애달픔처럼 아득히

 상기 산그늘은 나려간다.

 워어어임아 워어어임

 

 

 일제 치하의 오랜 암흑기를 거치고 해방 공간의 이념적 혼란 속에서도 생명 감각과 순수 서정을 탐구한 전통 서정시의 한 중요한 질적 성취로 손꼽히는 이 시집은 해방 직후 목적의식을 앞세운 좌익 시단에 맞서 젊은 시인들이 펴낸 첫 작품집이라는 점, 그리고 해방 이전의 순수시와 전후 전통 서정시를 잇는 중요한 연결고리로서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냈다는 점에서 그 문학사적 의의가 평가되기도 한다.

 

 

완화삼(玩花衫)

 

                                   - 목월에게 -

 

                                                                         조지훈

 

 차운 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리(七百里)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 [상아탑] 제5호(1946. 4) -

 

 박목월은 서로 지방에 흩어진 지훈과 두진에게 연락, 합동 시집을 서둘렀다. 그리하여 39편을 수록한 <청록집>은 <승무> 등 불교적 주제를 수용하는 지훈, <나그네> 등 자연 귀의의 심정을 표현하는 목월, <해> 등 기독교 영향이 강한 두진의 상이한 개성을 ‘청록파’로 묶었다. 출판 기념은 우익(右翼) 문인들의 집합소인 [푸로워]다방에서 이한직의 사회로 열렸고, 표지에 푸른 사슴을 그린 <청록집>은 3판에 매진되는 인기를 모으면서 한국시사(韓國詩史)에 중요한 몫을 차지하게 된다.(발췌) - 김병익: <한국 문단사>(1974. 4) -

 

 

 

 

 

 

 국판, 반양장, 114면. 박목월 편에 <임><청노루><나그네> 등 15편, 조지훈 편에 <봉황수(鳳凰愁)><고풍의상(古風衣裳)><승무(僧舞)> 등 12편, 박두진 편에 <향현(香峴)><묘지송(墓地頌)><도봉(道峯)> 등 12편으로 모두 39편이 수록되었다. ‘청록집’이라는 제명은 박목월의 시 <청노루>에서 딴 것으로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들 세 시인은 ‘청록파(靑鹿派)’라 불리게 되었다. 

 

 

 

                              박두진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어, 달밤이 싫어,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어,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어……,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 [상아탑] 6호(1946. 5) -

 

 

 

 일제 말기에 [문장(文章)]지를 통해 정지용(鄭芝溶)의 추천으로 함께 문단에 데뷔한 이들 세 시인은 해방의 감격 속에서 그들의 초기의 시들을 모아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당시 판을 치던 좌익시인들의 딱딱하고 생경한 구호시(口號詩)의 홍수 속에, 자연을 소재로 한 자연 예찬의 서정시로 도전하였다.

 

 

 

 

 

 

 

나그네

 

                                    박목월

 

 술 익은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 지훈(芝薰)에게

 

 강(江)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백리(三百里)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상아탑] 5호(1946년 4월호) -

 

 향토적 서정을 노래한 박목월의 시, 민족정서와 전통에의 향수를 담은 조지훈의 시, 시대적인 수난과 절망을 불멸의 생명욕으로 초극하려는 강인한 의지가 자연과 융합하는 데에서 그 표현을 얻은 박두진의 시, 이들의 시는 각기 독특한 개성을 지닌 가운데 공통된 시풍을 보여 주었다.

 『청록집』의 시적 특성은 대부분 자연의 문제와 결부되어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청록파 시인들이 자연을 시적 대상으로 삼았다고 하지만 우리 시사에서 그들만이 자연을 노래한 것은 아니다. 우리 고전 시가의 대다수가 이러한 범주에 들 것이며, 청록파 이전의 현대시에 있어서도 자연을 시적 대상으로 삼은 시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것이 사실이다.

 『청록집』의 문학사적 공적은 자연의 재발견을 통해 존재론적 생명의식을 형상화했다는 점과 함께 우리말의 가락과 심상을 높은 수준의 예술적 형상 속에서 구현해낸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의 증거는 고작해야 서른아홉 편밖에 실리지 않은『청록집』의 시편들이 발간된 지 60여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애송되고 있다는 점에서 뚜렷이 증명된다.

박목월의「나그네」,「청노루」, 조지훈의「승무」,「낙화」, 박두진의「도봉」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청록파 시인들의 시가 시대와 사회의 한계를 넘어서 애송되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우리말의 가락과 심상을 뛰어난 시적 형상으로 구현하고 있으며 그 결과 독자들의 심금을 절실하게 울린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