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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류시화 시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by 언덕에서 2014. 1. 20.

 

 

 

류시화 시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시인이자 명상가인 류시화(1958 ~ )가 15년 만에 펴낸 세 번째 시집으로 2012년 4월 <문학의 숲>에서 간행되었다.

 그동안 시 발표와는 거리를 둔 채 명상서적을 번역 소개하거나 변함없이 인도 네팔 등지를 여행하며 지내는 중에 쓴 350여 편의 시 중에서 가려낸 56편이 수록되어 있다.

 꽃에게 손을 내미는 돌, 돌에게 말을 거는 꽃. ‘돌’과 ‘꽃’의 대화가 오가는 언어는 시인 류시화가 돌과 꽃에 새긴 기도문과 같아 보인다. 각각의 시에 담긴 독특한 시적 감성과 상상력이 이상한 빛을 발하며 다가온다. 이 시집에는 긴 시간의 시적 침묵이 가져다 준 한층 깊어진 시의 세계가 있다. ‘시는 삶을 역광으로 비추는 빛’이라는 그의 말을 증명하듯, 시인의 혼이 담긴 56편의 시에는 상처와 허무를 넘어 인간 실존의 경이로움과 삶에 대한 투명한 관조가 담겨 있다. 또한 오랜 기간 미발표 상태에서 써 온 시들을 모은 것이라 시의 소재와 주제도 매우 다양하다.

 

 

어머니

 

 

시가 될 첫 음절, 첫 단어를

당신에게서 배웠다

 

감자의 아린 맛과

무의 밑동에서 묻은 몽고반점의 위치와

탱자나무 가시로 다슬기를 뽑아 먹는 기술을

그리고 갓난아기일 때부터

울음을 멈추기 위해 미소 짓는 법을

내 한 손이 다른 한 손을 맞잡으면

기도가 된다는 것을

 

당신은 내게 봄 날씨처럼 변덕 많은 육체와

찔레꽃의 예민한 신경을 주었지만

강낭콩처럼 가난을 견디는 법과

서리를 녹이는 말들

질경이의 숙명을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내 시는 아직도

어린 시절 집 뒤에 일군 당신의 텃밭에서 온다

때로 우수에 잠겨 당신이 바라보던 무꽃에서 오고

비만 오면 쓰러져 운다면서

당신이 일으켜 세우던 해바라기에서 오고

내가 집을 떠날 때

당신의 눈이 던지던 슬픔의 그물에서 온다

 

당신은 날개를 준 것만이 아니라

채색된 날개를 주었다

더 아름답게 날 수 있도록

 

하지만 당신의 경사진 이마에

나는 아무것도 경작할 수 없다

삶이 파 놓은 깊은 이랑에

이미 허무의 작물이 자라고 있기에

 

 -류시화 제3시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시인 류시화는 경희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된 바 있다. 1980~1982년까지 박덕규, 이문재, 하재봉 등과 함께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했으나 1983~1990년에는 창작 활동을 중단하고 구도의 길을 떠났다. 이 기간 동안 명상서적 번역 작업을 했다.

 이때 『성자가 된 청소부』,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티벳 사자의 서』, 『장자, 도를 말하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등 명상과 인간의식 진화에 대한 주요 서적 40여 권을 번역하였다. 1988년 '요가난다 명상센터' 등 미국 캘리포니아의 여러 명상센터를 체험하고, 『성자가 된 청소부』의 저자 바바 하리 다스와 만나게 된다. 1988년부터 열 차례에 걸쳐 인도를 여행하며, 라즈니쉬 명상센터에서 생활해왔다.

 

화양연화

 

나는 너의 이마를 사랑했지

새들이 탐내는 이마

이제 막 태어난 돌 같은 이마

언젠가 한 번은 내 이마였던 것 같은 이마

가끔 고독에 잠기는 이마

불을 끄면 소멸하는 이마

 

스물 두 살의 봄이었지

새들의 비밀 속에

내가 너를 찾아낸 것은

책을 쌓아놓으면 둘이 누울 공간도 없어

거의 포개서 자다시피 한 오월

내 심장은 자주 너의 피로 뛰었지

나비들과 함께 날들을 세며

 

다락방 딸린 방을 얻은 날

세상을 손에 넣은 줄 알았지

넓은 방을 두고 그 다락방에 누워

시를 쓰고 사랑을 나누었지

슬픔이 밀려온 밤이면

조용한 몸짓으로 껴안았지

 

어느 날 나는 정신에 문제가 찾아와

하루에도 여러 번 죽고 싶다, 죽고 싶다고

다락방 벽에 썼지

너는 눈물로 그것을 지우며

나를 일으켜 세웠지

난해한 시처럼 닫혀 버린 존재를

 

내가 누구인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너밖에 없었지

훗날 인생에서 우연히 명성을 얻고

자유로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그때가 나의 화양연화였지

다락방 어둠 속에서 달처럼 희게 빛나던

그 이마만이 기억에 남아있어도

 

 -류시화 제3시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그의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1989년~1998년 동안 21번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시인은 「시로 여는 세상」 2002년 여름호에서 대학생 53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인에 윤동주 김소월. 한용운과 함께 이름을 올렸으며 명지대 김재윤 교수의 논문 설문조사에서 20세기 가장 위대한 시인 10위, 21세기 주목해야할 시인 1위, 평소에 좋아하는 시인으로는 윤동주 시인 다음으로 지목된다. 저작권 협회의 집계 기준으로 류시화 시인의 시는 라디오에서 가장 많이 낭송되는 시로 손꼽히기도 한다.

 

 

 

 

 

바람의 찻집에서

 

바람의 찻집에 앉아 세상을 바라보았지

긴 장대 끝에서 기도 깃발은 울고

구름이 우려낸 차 한 잔을 건네받으며

가장 먼 데서 날아온 새에게 집의 안부를 물었지

 

나 멀리 떠나와 길에서 절반의 생을 보내며

이미 떠나간 것들과 작별하는 법을 배웠지

 

가슴에 둥지를 틀었다 날아간 날개들에게서

손등에서 녹는 눈발들과

주머니에 넣고 오랫동안 만지작거린 불꽃의 씨앗들로

모든 것이 더 진실했던 그때

어린 뱀의 눈을 하고

해답을 구하기 위해 길 떠났으나

소금과 태양의 길 위에서 이내 질문들이 사라졌지

때로 주머니에서 꺼낸 돌들로 점을 치면서

해탈은 멀고 허무는 가까웠지만 후회는 없었지

 

탄생과 죽음의 소식을 들으며

어떤 계절의 중력도 거부하도록

다만 영혼을 가볍게 만들었지

 

찰나의 순간

별똥별의 빗금보다 밝게 빛나는 깨달음도 있었으나

빛과 환영의 오후를 지나

가끔은 황혼과 바람뿐인 찻집에서 차를 마시며

생의 지붕들을 내려다보고

고독할 때면 별의 문자를 배웠지

누가 어둔 곳에 저리도 많은 상처를 새겼을까

그것들은 페허에 핀 꽃들이었지

그러고는 입으로 불어 별들을 끄고 잠이 들었지

봉인된 가슴속에 옛사랑을 가두고

외딴 행성 바람의 찻집에서

 

 -류시화 제3시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류시화 시인의 작품은 문단과 문예지에도 외면을 당하기도 했는데 안재찬으로 활동했을 당시, 민중적이고 저항적 작품을 지향했던 당대의 문단과는 달리 신비주의적 세계관의 작품세계로 인해 문단으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외계인이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주장하고 있는 민중주의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당시의 문단에서 현실 도피의 소지를 제공한다며 비난을 받았으며 대중의 심리에 부응하고 세속적 욕망에 맞춰 작품이 창작되었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시인 이문재씨는 류시화의 시가 그 때나 지금이나 거의 변하지 않고 초기의 시세계를 유지하고 있음에 주목하고 20여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을 지키며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이 큰 변화 못지않은 견딤이라 평가하기도 하였다. 류시화의 시는 일상 언어들을 사용해 신비한 세계를 빚어내어, 걸림 없이 마음에 걸어 들어오면서 결코 쉽고 가볍게 치부할 수 없는 무게로 삶을 잡아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낯익음 속에 감추어져 있는 낯설음의 세계를 재발견하는 시세계를 한껏 선사해왔다.

 

돌 속의 별

 

돌의 내부가 암흑이라고 믿는 사람은

돌을 부딪쳐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돌 속에 별이 갇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

돌이 노래할 줄 모른다고 여기는 사람은

저물녘 강의 물살이 부르는 돌들의 노래를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 노래를 들으며 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사람이다

돌이 차갑다고 말하는 사람은

돌에서 울음을 꺼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 냉정이 한때 불이었다는 것을 잊은 사람이다

돌이 무표정하다고 무시하는 사람은

돌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안으로 소용돌이치는 파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 무표정의 모순어법을

 

 -류시화 제3시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그의 대표작인『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에서는 한층 깊어진 눈빛을 지닌 시세계가 곱씹히고 곱씹힌다. 류시화는 가타 명상센터, 제주도 서귀포 등에서 지내며 네팔, 티벳, 스리랑카, 인도 등을 여행하며 그가 꿈꿔왔던 자유의 본질 그리고 깨달음에 관한 사색과 명상들이 가득한 산문집을 내기도 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실소를 자아내는 일화들 속에서, 그렇지만 그냥 흘려버리기엔 너무 무거운 이야기로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을 전해준다.

 

낙타의 생

 

사막에 길게 드리워진

내 그림자

등에 난 혹을 보고 나서야

내가 낙타라는 걸 알았다

눈썹 밑에 서걱이는 모래를 보고서야

사막을 건너고 있음을 알았다

옹이처럼 변한 무릎을 만져 보고서야

무릎 기도 드릴 일 많았음을 알았다

많은 날을 밤에도 눕지 못했음을 알았다

자꾸 넘어지는 다리를 보고서야

세상의 벼랑 중에

마음의 벼랑이 가장 아득하다는 걸 알았다

혹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보고서야

무거운 생을 등에 지고

흔들리며 흔들리며

사막을 건너왔음을 알았다

 

 -류시화 제3시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을 비롯하여, 잠언 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치유 시집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과 하이쿠 모음집 『한 줄도 너무 길다』를 집필했고, 산문집 『삶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들』을 썼다. 또한, 인도 여행기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지구별 여행자』와 인디언 추장 연설문 모음집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를 썼으며,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티벳 사자의 서』, 『조화로운 삶』,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 『용서』, 『인생수업』 등의 명상서적을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