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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고은 시집 『만인보(萬人譜)』

by 언덕에서 2014. 2. 10.

 

 

 

고은 시집 만인보(萬人譜)

 

 

 

 

시인 고은이 1986년 「세계의 문학」에 연재를 시작한 이후 1990년까지 전 9권으로 간행한 시으로 1991년 중앙문화대상 수상작이다.

 고은은 연작시 <만인보(萬人譜)>를 1980년 여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제7호 특별감방에서 구상했다. 그해 5월17일 자정을 기해 발효된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처와 동시에 체포된 시인은 김재규가 사형 직전까지 머물렀던 방에 갇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운명의 발자국 소리를 하릴없이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손바닥만한 창 하나 없이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는 그 무덤과 같은 방에서 그의 의식은 옛일의 회고와 추억을 탈출구로 삼았다.

 

 

‘만인보’ 서시


너와 나 사이 태어나는

 순간이여 거기에 가장 먼 별이 뜬다

 부여땅 몇천 리

 마한 쉰네 나라 마을마다

 만남이여

 그 이래 하나의 조국인 만남이여

 이 오랜 땅에서

 서로 헤어진다는 것은 확대이다

 어느 누구도 저 혼자일 수 없는

 끝없는 삶의 행렬이여 내일이여


 오 사람은 사람 속에서만 사람이다 세계이다

 

 - <'만인보(萬人譜)> 제1권-

 

 만일 살아서 나간다면 지나간 삶의 구비에서 마주친 이들을 시로써 되살리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은 그로부터 6년 뒤에야 실현된다. 그 사이 시인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군법회의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뒤 사면, 석방되며 결혼하고 자식을 본다.

 선동적인 시를 써왔던 그가 1980년 5월 광주를 통과하면서 <만인보>의 세계로 나아간 것은 하나의 놀라움이었다. “막말로 말해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알게 된 사람들에 대한 노래의 집결”이라는, <만인보>에 대한 설명에서 그의 1970년대를 특징짓는 전투성과 이념성을 찾기란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만인보>를 권력에의 투항이나 현실 순응으로 보는 시각 역시 맹목과 단견으로서 타기되어 마땅하다. 그보다는 싸움의 역사로부터 견딤의 역사로, 화살의 세계관에서 장강(長江)의 세계관으로 변모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한 이해가 될 터이다.

 

 

 실제로 `서시'에 이어지는 `할아버지'와 `머슴 대길이'는 인간과 세계와 역사를 대하는 시인의 관점에 조금치의 변화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할아버지와 머슴 대길이로부터 시작한 <만인보>의 여정은 시인의 가족과 친척, 고향 사람들을 두루 훑은 다음 시인 자신의 편력을 따라서 이 땅 곳곳으로 뻗어나가도록 돼 있다.

 

 

머슴 대길이


새터 관전이네 머슴 대길이는

상머슴으로

누룩도야지 한 마리 번쩍 들어

도야지 우리에 넘겼지요.

그야말로 도야지 멱 따는 소리까지도 후딱 넘겼지요.

밥 때 늦어도 투덜댈 줄 통 모르고

이른 아침 동네 길 이슬도 털고 잘도 치워 훤히 가리마 났지요.

그러나 낮보다 어둠에 빛나는 먹눈이었지요.

머슴 방 등잔불 아래

나는 대길이 아저씨한테 가갸거겨 배웠지요.

그리하여 장화홍련전을 주룩주룩 비 오듯 읽었지요.

어린 아이 세상에 눈 떴지요.

일제 36년 지나간 뒤 가갸거겨 아는 놈은 나밖에 없었지요.

대길이 아저씨더러는

주인도 동네 어른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요.

살구꽃 핀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홑적삼 큰아기 따위에는 눈요기도 안 하고

지게 작대기 뉘어 놓고 먼데 바다를 바라보았지요.

나도 따라보았지요.

우르르르 달려가는 바다 울음소리 들었지요.

찬 겨울 눈더미 가운데서도

덜렁 겨드랑이에 바람 잘도 드나들었지요.

그가 말했지요.

사람이 너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른단다.

남하고 사는 세상인데

대길이 아저씨

그는 나에게 불빛이었지요.

자다 깨어도 그대로 커져서 밤 새우는 불빛이었지요.


 - <'만인보(萬人譜)> 제1권-

 

 지난 1986년과 1988, 1989년 세 차례에 걸쳐 한번에 3권씩 모두 9권이 나온 <만인보>의 초반부는 시인의 유년시절 고향 사람들의 모습과 삶의 이모저모를 소묘한다. 거기에 그려진 것은 “배고파서/하루이틀 꼬박 굶고/물배만 채워/다섯 식구/서로 얼굴 보고 앉았”(`굶는 집')는 궁상과 허기의 삶이지만, 민중의 생명력에 대한 시인의 굳은 믿음으로 밝은 빛깔로 채색된다. 가령 대를 이은 소도둑으로 군산형무소 감방에서 마주치게 된 어느 부자간의 대화를 들어 보라. “선득아 너 들어왔냐/예 2년 먹고 나가려고 들어왔어라오/밥 먹을 때 오래오래 씹어먹어라/예”(`소도둑').

 

 

사행이 아저씨


미제 방죽 물 위에

오직 한 사람

키다리 사행이 아저씨

주낙배 주낙 걷는다

사행이 아들 칠성이 물가에 뛰어왔다

너무 멀어서 불러도 소용없다

아버지 아버지 어머니가 죽었어 눈 뜨고 죽었어


사람과 사람 사이 영영 끊어져 잔물결 인다

 

 - <'만인보(萬人譜)> 제1권-

 

 시인의 고향은 현재의 전북 군산시 미룡동. <만인보>에 미제방죽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등장하는 은파유원지와 할미산을 끼고 있는 마을이다. 은태 소년이 학살당한 이들의 주검을 나흘 걸려 파내었던 할미산의 참호는 우거진 관목에 가리기는 했지만 예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문둥이만 혼자 살 뿐 인적 하나 없던 저수지 가에는 고층 아파트군이 숲을 이루게끔 되었고, 그 너머로 희미하게 장항제련소의 굴뚝이 건너다 보인다고 한다. 

 고은의 연작시편 『만인보』가 전3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980년 여름 내란음모 및 계엄법 위반으로 육군교도소 특별감방에 갇혀 있는 동안 구상한 지 만 30년 만에, 1986년 1, 2, 3권을 출간한 이래 25년 만에 대장정의 막을 내린 것. 경이롭다고밖에 할 수 없는 총 작품수 4001편, 조연급 정도만 포함해도 등장인물은 5600여명에 이른다. 이것은 기존에 출간된 1-26권을 출간 시기별로 양장합본하고 여기에 신간 27-30권을 더하여 전12권의 전집(연보·인터뷰·작품색인·인명색인 등을 담은 별책 1권 포함)으로 묶은 것이다.

 세계 시단에서도 ‘20세기 세계문학 최고의 기획’이라 평가받는 『만인보』는 말 그대로 ‘시로 쓴 인물 백과사전’이다. 시인생활 30년 만에 봇물처럼 터져나온 ‘사람들에 관한 노래’가 대하(大河)를 이루어 망망대해로 나아가는 파도소리에 우리는 경탄할 수밖에 없다. ‘빠리의 호적부’와 겨루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던 발자끄에 빗대어 말하자면 가히 ‘시로 쓴 한민족의 호적부’라 이를 만하다. 그 어떤 대하소설도 에 버금가는 성과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세계 시단에서도 ‘20세기 세계문학 최고의 기획’이라 평가받는 『만인보』는 말 그대로 ‘시로 쓴 인물 백과사전’이다. 시인생활 30년 만에 봇물처럼 터져나온 ‘사람들에 관한 노래’가 대하(大河)를 이루어 망망대해로 나아가는 파도소리에 우리는 경탄할 수밖에 없다. ‘빠리의 호적부’와 겨루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던 발자끄에 빗대어 말하자면 가히 ‘시로 쓴 한민족의 호적부’라 이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