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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세계 시문학 사상 가장 아름다운 시『백석 시 전집』

by 언덕에서 2014. 1. 6.

 

 

세계 시문학 사상 가장 아름다운 시『백석 시 전집』

 

 

 

 

 

 

 

한국이 낳은 가장 아름다운 시인 백석(1912 ~ 1996)은 해방이 되기 전까지의 주옥같은 시 110여 편을 우리 국민에게 남겨주었다. 그의 초기시들은 고향의 정취가 가득한 풍경호를 연상케하는 수준 높은 명시들로 이루어졌고, 시집 사슴 이후의 시들에 해당하는 중기의 시들은 시인 백석의 성숙해져가는 서정적 자아가 펼치는 주옥같은 명음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놀라운 것은 백석의 후기 시들인데, 만주시절을 중심으로 해방이 되기 전까지의 작품들은 한국시가 바라는 가장 바람직한 시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백석은 <사슴> 이후에는 시집을 펴내지 못했으며 그 뒤 발표한 시로는 <통영(統營)>(조광.1935. 12) <고향>(삼천리문학.1938. 4)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학풍.1948. 10) 등 50여 편이 있다. 이후 남한에서 시집 <백석 시전집>(1987 창작사)과 <흰 바람벽이 있어>(1989 고려원) 등이 출간되었다.

 

 

 

모닥불

 

새끼 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머리카락도 헝 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깃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 늙은이도 더부살이 하는 아이도 새 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 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너울 : 외출할 때 여자가 둘러쓰던 깁, 면사포

-검불 : 풀, 낙엽 따위

-몽둥발이 : 딸려 있던 것이 다 떨어져 나가고 몸뚱아리만 남아 있는 모습

 

 

- <사슴>(1936) -

 

 이 책 <백석 시전집>에는 지금까지 알려진 백석(白石.1912∼1963>)의 시 94편과 산문 7편이 수록되어 있다.

 백석이라는 시인은 우리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오로지 민족 분단에 있다. 우리 민족이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분단됨으로써 자의든 타의든 간에 이북에 남아 있거나 월북한 작가들의 작품을 오랫동안 이남에서는 대할 수 없었다.

 본명이 백기형인 백석은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4년 오산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같은 학교를 다닌 선배 시인 김소월을 몹시 선망하였다 한다. 1029년 오산고보를 졸업한 백석은 일본으로 유학하여 영문학을 공부했고, 1934년 귀국해서 [조선일보사]에 입사했다.

 

 

교사 시절의 백석

 

 

 

 

고향(故鄕)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平安道) 정주(定州)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氏)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씨(氏)ㄹ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 [삼천리문학] 2호(1938. 4) -

 

 1935년에 [조선일보]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온 그는 이듬해인 1936년 1월에 시집 <사슴>을 출간하였다. 그 해 [조선일보사] 기자를 그만둔 백석은 교사 생활을 잠시 했고, 19389년부터는 만주에 거주하면서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다가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백석은 북방의 어느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하여 그곳의 사투리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사람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시를 썼는데, 그의 작품 활동 시기가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이 가장 극렬하게 자행되었던 시기였음을 고려한다면, 그의 시가 갖는 이러한 특징들은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즉, 그 시게에 우리 민족의 전통과 구수한 토속어를 지키는 것 자체가 의식적인 노력 없이는 불가능했던 것이며, 그런 점에서 백석은 참다운 시인이었다.

 어쨌든, 백석의 시를 읽다 보면, 옛날 우리 민족의 삶과 전통적인 정서를 느낄 수 있고, 또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다.

 

 

 

팔원(八院) -서행 시초(西行詩抄) 3

 

차디찬 아침인데

妙香山行 乘合自動車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慈城은 예서 三百五十里 妙香山 百五十里

妙香山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쌔하얗게 얼은 自動車 유리창 밖에

內地人 駐在所長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車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해고 內地人 駐在所長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 내지인 : 일본 본토인이란 뜻으로 일본인이 스스로를 일컫던 말.

* 내임 : 요금이라는 뜻의 일본말.

 

 - [조선일보](1939. 11. 10)-

 

 

 

1980년대 중반 북에서 찍은 가족사진

 

 

 

 백석은 오랫동안 현대시사의 광상 속에 매몰되어 있다 뒤늦게 발굴된 보석 같은 시인이다. 현대시사의 광맥을 새롭게 탐색해들어가던 1980년대 초반에 비로소 온전히 채굴되기 시작한 그의 시는 지상의 진열대 위에 놓이면서 찬란한 빛깔과 광택을 지닌 보석으로 광채를 뿜기 시작했다.

 

 

정주성(定州城)

 

산(山)턱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헝겊 심지에 아주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잠자려 조을던 무너진 성(城)터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魂)들 같다

어데서 말 있는 듯이 크다란 산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헐리다 남은 성문(城門)이

한울빛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 [조선일보](1935. 8. 31) -

 

 

 백석의 시는 국내 시문학사상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시문학 사상 가장 아름다운 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해방이 되기 전까지의 주옥같은 시 110여 편은 시인으로서 남길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시를 우리 국민들에게 선사를 해 주었다.

 백석의 초기시들은 그대로 고향의 정취가 가득한 풍경호를 연상케하는 수준 높은 명시들로 이루어졌고 시집 사슴 이후의 시들에 해당하는 중기의 시들은 시인 백석의 성숙해져가는 서정적 자아가 펼치는 주옥같은 명음으로 이루어졌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원제 :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시봉방(朴時逢方))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삿> : 삿자리의 준말, 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

<딜옹배기> : 둥글넙적하고 아가리가 넓게 벌어진 질그릇. 질옹배기

<북덕불> : 짚이나 풀 따위를 태워 담은 화톳불

<손깍지베개> : 두 손을 깍지 껴서 머리를 받침.

<앙금> : 물에 가라앉은 부드러운 가루. 여기서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슬픔. 한탄 등이 차츰 가라앉아 진정되는 상태를 가리킴.

<쥔> : 주인의 준말.

 

 - <학풍>(1948.10) -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중기시들을 지나서 백석의 후기시들이다. 만주시절을 중심으로 해방이 되기 전까지의 작품들은 한국시가 바라는 가장 바람직한 시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수박씨, 호박씨」를 필두로 해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까지의 시들이 그것이다. 친구를 노래한 「허준」이나 만주의 목욕탕을 묘사한 「조당에서」 그리고 「두보나 이백같이」와 「북방에서」 그리고 「힌 바람벽이 있어」나 심지어 남의 시집에 써준 서문격인 「호박꽃초롱 서시」는 백석이 위대한 시인이라는 것을 알리는 시금석이기도 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마가리 : 오막살이.

 

 - [여성](1938.3)-

 

 백석의 아름다운 시 중의 하나인 「나 취했노라」는 친구인 노리다께 가쓰오에게 개인적으로 써 준 시였다. 술을 마시면서 둘의 우정이 변치 말자는 뜻에서 백석이 술에 취해 일본인 친구에게 일본말로 끄적거려 써준 시였다. 이 시를 받아본 일본의 시인 노리다께 가쓰오는 평생 백석의 시를 찬미하고 백석을 우러르는 백석의 열광적인 지지자가 되었다.

 

 

나 취했노라

 

- 노리다께 가스오(則武三雄)에게

 

 나 오래된 스코틀랜드의 술에 취했노라

 나 슬픔에 취했노라

 나 행복해진다는 생각에 또한 불행해진다는 생각에 취했노라

 나 이 밤의 허무한 인생에 취했노라

 

 

 [原文]

 

われ 醉へり

 

 われ 古き蘇格蘭土の酒に醉へり

 われ 悲みに醉へり

 われ 幸福なることまた不幸なることの思ひに醉へり

 われ この夜空しく虛なる人生に醉へり

 

 - [압록강] (1943)

 

 

 

1938년 조선일보 자매지‘여성’에 처음 발표된‘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백석 시·정현웅 삽화)

 

 

 시 한편으로 일본의 시인을 감복케 한 백석. 그 결과 평생 백석을 흠모하는 시인이 된 노리다께 가쓰오. 국경을 초월한 우정이 지금도 빛나고 있을 것이다. 정녕 이것이 시인의 역량이며 시인 백석의 찬란한 면모에 다름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