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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안현미 두 번째 시집 『이별의 재구성』

by 언덕에서 2013. 12. 30.

 

 

안현미 두 번째 시집 『이별의 재구성』

 

 

 


활달한 상상력과 탄탄한 언어감각으로 개성 있는 시세계를 펼쳐 보이며 독자와 평단의 주목을 끈 안현미(1972 ~ ) 시인의 두 번째 시집으로 2009년 9월에 출간되었다. 경쾌한 말놀이와 감각적인 환상은 독특하고, 그 안에 담긴 누추한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은 묵직하며, 그 바탕에서 우러나는 사람에 대한 깊은 사랑은 간절하다. 불편한가 하면 따뜻한, 매혹적인 시집이다.

 

 

 

 

 

 

Post 아현동



 오늘은 아현동 산동네에 갔다


 오래전 월세 글어 살던 방,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하던 방, 연탄불을 놓던 방, 이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울먹이던 방, 외롭던 방, 고맙던 방,

아주 아주 춥던 방,


 그시절 내마음에 전세 들어 살던 첫 애인을 생각하는 밤, 나의 아름다운 남동생의 흐려진 얼굴빛을 걱정하는 밤,

고단한 토끼에게 아무 약효도 없는

안약을 건네던 밤, 가난한 추억과 합체하던 밤,


 아현동 산동네를 내려와 찾아간 [BAR 다] 어둡고 낡은 나무 계단 끝에서 화장실이 어딘지 모르고 서 있는 머리 긴 외국 남자에게 "너는 왜 여기 서 있니? why?" 라고 물으며 괜시리 친절하고 싶던 밤, 함께 여기를 뜨자고 말하면

주저없이 따라가고 싶던 밤, 국적도 모국어도 잃어버리고 싶던 밤,

나 스스로에게 "너는 왜 여기 서 있니? 왜? 라고 자꾸 되묻던 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개를 기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열정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왜 여기 서 있니?


-계간 『세계의문학』2006년 가을호

 


 

 시인은 강원도 태백에서 유년기를 보내다가 여섯살 즈음에 아버지에 의해 새엄마에게 보내어 졌다. 가난해서 〈서울여상〉에 진학했고, 졸업 후 대기업 사무보조원으로 취직해 살다가 20대 후반에 서울산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야간반에 등록했고, 사무보조원 시절 아현동 월세방에서 살면서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김경주, 김민정과 같은 “불편” 동인 소속이다.

 시집 《이별의 재구성》으로 2010년 제 28회 신동엽창작상을 받았다. 심사위원회로부터 “생에 대한 아픔을 때로는 재치 있는 유머로, 조금은 삐딱한 시선으로 담아내면서 현실의 불우를 환상으로 채색해가는 이 시인의 시세계는 우리의 감성을 따뜻하게 위로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시인 손택수는 발문에서 “늘 한쪽으로 조금 기우뚱해 있는 사선(/)을 닮았다. 현실의 비참을 환상적 기법을 통해 위무하는 것이 그녀의 시가 지닌 매력”이라고 평했다.

 


어항골목


 고장난 가로등처럼 서 있는 사내를 지나 방금 도착한 여자의 어깨에선 사막을 건너온 바람의 냄새가 났고 이 도시의 가장 후미진 모퉁이에선 골목이 부레처럼 부풀어 올라 고장난 가로등처럼 서 있던 사내의 구두가 담기고 있다 첨벙, 여자는 의족을 벗고 부풀어 오른 골목으로 물소리를 내며 다이빙한다 꼬리지느러미를 활발히 흔들며 언어 이전으로 헤엄쳐간다 주름잡는다 여자의 주름에선 언어 이전에 있는 어떤 어항에서 꺼낸 것 같은 언어가 버블버블 퐁퐁 투명한 골목을 유영한다 인간의 남자를 사랑하여 아낌없이 버렸던 모든 것들이 버블버블 다시 태어난다 그사이 젖은 구두를 벗은 사내도

산소통을 부레처럼 달고 언어를 떠나온다 어항골목 고장난 가로등엔 물고기 달이 켜진다 퐁퐁 골목 밖으로 여자의 의족이 폭죽처럼 떠오른다


- 시집 <이별의 재구성, 창비시선>

 

 


 이 시집에서는 말들이 함께 헤엄치고 춤춘다. 비참과 환멸이 눈앞에 드러나는 시에서조차 그렇다. 경쾌한 언어의 의장을 하고 있지만, 아닌게아니라 시인의 시선이 향하는 것은 이별이고 슬픔의 시간이고 환멸스러운 현실이 압도적이다. 그것을 위무하기 위해서, 또는 감추면서 드러내기 위해서 시인은 짐짓 경쾌하고 활달한 언어유희와 환상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현실의 그늘에 대한 감각이 짙게 깔려 있기 때문에 그의 시가 난해하기만 한 기표의 세계에 고립되는 것으로 읽히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여러차례 평가되어온 바다. 또는 말을 바꾸면, 저 활달한 목소리가 단지 활달하게만, 평면적으로 들리지 않는 것은, 그 목소리가 항상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우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우는 소리”(「여자비」)를 배음으로 깔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들


 침묵에 대하여 묻는 아이에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은 침묵이다

 시간에 대하여도 그렇다


 태백산으로 말라죽은 나무들을 보러 갔던 여름이 있었지요


 그때 앞서 걷던 당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당신만큼 나이가 들면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그 나이만큼 되어 시간은 내게 당신 같은 사람이 되었냐고 묻고 있습니다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어 말라죽은 나무 옆에서 말라죽어가는 나무를 쳐다보기만 합니다


 그러는 사이 바람은 안개를 부려놓았고 열입곱 걸음을 걸어가도 당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의 시간을 따라갔으나 나의 시간은 그곳에 당도하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은, 당신은 수수께끼 당신에 대하여 묻는 내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인 당신을 침묵과 함께 놓아두고 죽은 시간


 열입곱 걸음을 더 걸어와 다시 말라죽은 나무들을 보러 태백에 왔습니다 한때 간곡하게 나이기를 바랐던 사랑은 인간의 일이었지만 그 사랑이 죽어서도 나무인 것은 시간들의 일이었습니다


- 시집 <이별의 재구성, 창비시선>

 


 그렇게 보았을 때 두드러지는 것은 이 한 시집 안에 담긴 여성성-모성의 다양한 면모일 것이다. 시집 발문을 쓴 손택수 시인이 주목하듯, 그것은 우선 클림트의 「유디트」 연작을 연상시키는 ‘공포스러운’ 표정과 ‘무아경에 빠진’ 표정의 두 가지 얼굴로 드러나 있다.

 

 

 

 


해바라기 축제


망루에 올라 해바라기 꽃밭을 본다 그 수많은 꽃들이 바라보는 태양처럼 사내는 눈부시다 해시계를 삼킨 황금 물고기 귀걸이 를 찰랑대며 여자는 묻는다 누구에게나 일생을 걸고 해바라기꽃을 꺾듯 꺾어야 하는 게 있다면 몽롱한 눈빛의 유디트가 헬멧처럼 들고 있는 홀로페르네스의 목 같은 게 아니겠냐고 망루 아래서 여자의 말을 엿듣던 뱀은 서둘러 허물을 벗어 던지고 해바라기 밭을 떠난다 어느덧 태양은 엑셀파일의 함수마법사 중 시간의 함수로 구해놓은 듯 망루 꼭대기 위로 정각에 도착 한다 목이 마른 사내는 피크닉 바구니에서 꺼낸 술병의 목을 부여잡고 기어히 목을 칠 테냐고 묻는다 여자는 축제는 축제니 까, 라고 해바라기 씨를 깨물 듯 또박또박 대답한다 망루 꼭대기에서 여자의 말을 엿듣던 태양은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여자는 최면을 건다 레드 썬 탁! 그러자 뱀이 벗어 던지고 달아난 허물 속에선 화가의 잘린 귀와 귀를 자른 칼이 튀어 나온다 여자는 잘린 귀를 확성기처럼 들고 쉭- 태양의 목을 친다 순간 꽃밭에선 해바라기꽃들의 노랑 비! 명들이 폭죽처럼 튀어오르고 달아난 뱀은 깜짝 놀라 다시 허물 속으로 달아난다 피크닉 바구니를 헬멧처럼 들고 여자는 망루를 내려간다 피크닉 바구니에선 덜그럭 덜그럭 누군가의 목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난다


- 시집 <이별의 재구성, 창비시선>

 


 이 시에서 보이는 이런 환상은 전복적이어서 치명적이다. 이것이 도발적인 여성상의 면모라면 아래의 시를 읽어보도록 하자.

 

 

 

 


와유(臥遊)


내가 만약 옛사람 되어 한지에 시를 적는다면 오늘밤 내리는 가을비를 정갈히 받아두었다가 이듬해 황홀하게 국화가 피어나는 밤 해를 묵힌 가을비로 오래 오래 먹먹토록 먹을 갈아 훗날의 그대에게 연서를 쓰리


‘국화는 가을비를 이해하고 가을비는 지난해 다녀갔다’


허면, 훗날의 그대는 가을비 내리는 밤 국화 옆에서 옛날을 들여다보며 홀로 국화술에 취하리


- 시집 <이별의 재구성, 창비시선>


 위의 시의 경우는 당혹스러울 만큼 전통적인 여성상을 환기시키는데, 하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여기에서도 정한의 서정에 대한 날카로운 도발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인에 의해 서정은 교란되면서 동시에 갱신되고 있다. 그래서 “작금의 문학 신구 구분을 그녀의 시는 아주 가뿐하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교란시킨다. 그녀는 가장 오래된 소재를 새로운 문법으로 다루고, 가장 새로운 소재를 오래된 문법으로 다룬다”(김정환 ‘추천사’)는 평은 적절하다.

 시인이 시간에 대해 말할 때 그의 시는 유서이거나 연서이거나 매한가지인 것일 터이다. 그러니 이렇게도 말해볼 수 있겠다. 시인이 이별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이별 이전의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유서이거나 연서이거나, 우리에게 그의 시들이 애절하고 따뜻하게 읽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안현미. 시인. 1972년 강원도 태백 출생. 서울산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1년 계간 『문학동네』로 등단. 2006년 시집 <곰곰> 랜덤하우스. 2009년 시집 <이별의 재구성>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