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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눈물

by 언덕에서 2013. 12. 20.

 

 

 

눈물

 

 

 

 

 

 

그해 7월, 경남 창원시 소답동에 위치한 39사단 신병 교육대에서의 6주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아버님의 돌연한 별세로 인해 내가 받은 충격은 지대했다. 그녀에게 선사받은 실연도 성인이 된 이후의 내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데 일조를 했으리라. 원래 그다지 건강 체질이 아닌데다가 연이은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거의 1년 동안을 술에 절어서 살다보니 체력은 바닥에 와있었다. 게다가 전방 부대에 비해 근무 강도가 낮다고 일반적으로 평가받고 있었던 향토 사단의 교육 군기는 그런 평가를 상쇄하려고 작심하는 듯 실로 엄하고 고되기 짝이 없었다. 한 여름의 무더운 날씨는 그야말로 한 인간을 벌레처럼 나약하고 비참하게 만들고 있었다. 매일 4~5km 구보는 기본이었는데 서너 명은 항상 대오를 이탈하여 낙오되거나 실신했으며 해당 훈련병은 그에 대한 대가로 심한 얼차려를 받기 일쑤였다. 문제는 그 서너 명 속에 내가 항상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훈련소 입소할 때의 몸무게가 70kg이었는데 퇴소할 때의 50kg로 줄어든 것만 봐도 내겐 얼마나 혹독하고 견디기 힘든 훈련인지 지금 생각해도 무사히 신병 훈련을 마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운동을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이 갑자기 심한 달리기를 하게 되면 우선적으로 무릎에 이상이 온다고 한다. 훈련 중 피교육생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갑자기 군기를 잡아야겠다고 생각이 들 때는 교관이나 조교들은 흔히 ‘선착순’이라는 기합을 준다. 내가 경험한 가장 비인간적인 기합 - 얼차려 방법이다. 동료들을 짓밟으며 앞질러 뛰어야 내가 추가적으로 고통을 받지 않는다는 그 ‘기합’을 받을 때부터 갑자기 몸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무릎에서 흡사 망치에 맞은 것과 같은 극심한 통증을 느꼈던 것이다. 참다못해 조교들에게 고통을 호소한 결과 마산에 위치한 국군마산통합병원에 가서 외진을 받게 되었다. 군의관은 퇴행성관절염으로 사료된다는 판정을 내리면서, 훈련병이니 별 방도가 없으니 약을 먹으며 훈련을 이겨내라며 진통제 20알을 주었다. 피(P) 터지고 알(R)배고 이(I) 갈린다는 PRI(Preliminary Rifle Instruction)라는 '사격술 예비 훈련'이나, 강인한 체력과 인내심 배향을 위해서 실시되는 유격 훈련을 받을 때는 극심한 무릎 통증으로 인해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만이 뇌리에 가득했다.

 

 내무반 막사에서 만난 70명의 훈련병의 구성은 실로 다양했다. 대학원생부터 야간 카바레의 무명 가수, 막노동판의 노가다까지 실로 각양각색의 청년들이 국방의 의무라는 족쇄를 해결하기 위해 비인간적인 훈련을 감내하고 있는 중이었다. 소대원 70명 중 대학을 다니다 입대했거나 졸업한, 그러니까 이른바 대학물을 먹은 이는 15명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입소 후 내무반에서 각자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학의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다 입대한 그러니까 나보다 나이가 일곱 살이나 많은 ‘영감’이라는 친구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영감'은 다섯 살 때 사고로 인해 동시에 조실부모(早失父母)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모 예술전문학교를 졸업했다는 포크계열의 가수가 있었는데 당시 인기 절정을 달리던 탤런트 최명길과 동기동창임을 과시했고, 무모증(無毛症)의 여자와 육체관계를 가지면 3년 동안 재수가 없다고 하는 남자들의 속설(俗說)을 이야기하면서 앞으로의 3년 군대 생활이 걱정된다고 하던 제비족 출신의 청년이 기억에 남는다.

 

 

 

 앞 편의 이야기에서 잠시 언급한 적이 있다. 대학 가요제를 준비하기 위해 고2때 진하해수욕장으로 함께 간 친구 수경이는 나보다 일년 먼저 입대하여 내가 지옥 같은 훈련을 받고 있던 39사단 사단본부의 군악대에서 작대기 세 개(상병)를 단 채 고참병 근처의 서열로 복무 중이었다. 2주차 훈련 중일 때 친구는 SUN 담배 한 갑을 사들고 군악대 인근 대대에 위치한 신병교육대에 면회를 왔다. 조교는 친구보다 훨씬 후임임에도 불구하고 5분의 면회시간을, 그것도 자신이 지켜보는 앞에서만 허용했다. 친구가 내게 담배를 권했지만 조교는 ‘절대 안 됩니다!’며 눈을 부라렸다(신병훈련 기간 중 '금연'은 기본이다, 지금은 끊었다). 그러나 사단 본부 바로 옆 대대 고참의 청을 무시하는 것이 그 입장에서는 심히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자 조교는 내게 자신이 가진 담배를 꺼내어 한 대 권했는데 더운 여름 날씨와 긴장감으로 인해 흐르는 땀이 온몸을 흠뻑 적시는 바람에 담배는 스스로 꺼져 버려서 제대로 피우질 못했다.

 그 향토사단 본부의 의무대대에는 나보다 한 살 많은 사촌형의 친구가 위생병 병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후 알게 되었지만, 어머니는 내가 훈련 중 몇 차례 졸도했던 사실도 그 위생병이 사촌형에게 전한 소식을 통해 상세하게 알고 계셨다.

 어쨌든 지옥 같은 6주의 훈련이 끝나고 퇴소식 때는 가족과의 면회시간이 한 시간 주어졌다. 그런데 전체 교육받던 훈련병의 반 정도는 가족이 면회를 오지 않았다. 대부분 먹고 살기 힘든 생계 문제 대문에 짬을 내기 어려웠던 시절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항상 형님처럼 나를 대하던 ‘영감’의 가족도 그를 면회 오지 않았다. 6주의 신병훈련이 끝났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나의 무릎은 정상이 아니었다. 걷는 것은 그런대로 가능했지만 구보를 할 때는 흡사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 때문에 제대로 뛸 수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당시 당뇨병으로 거의 실명 상태였던 어머니는 면회를 위해서 김밥과 통닭, 사이다 등을 싸서 오셨는데 두 시간 내내 안쓰러운 표정을 하신 채 음식을 전혀 드시지 못했다. 인생이란 게 그렇지만 원래 행복한 순간은 오래 가지 않는 법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 연병장 옆 잔디밭에서의 면회 시간은 금방 흘러가고 말았다. 연병장 단상에서 “신병! 전체 집합!”이라는 마이크 소리가 들리고 우리는 퇴소식을 위해 가족들과 헤어져야만 했다.

 “어머니. 건강하게 제대할게요!”

 그 말 한 마디를 남기고 연병장을 향해 뛰어가야만 했다. 그런데 몇 발자국 움직이다 보니 다친 무릎의 통증으로 인해 제대로 뛰어지지 않아 계속 절룩거리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순간 뒤를 돌아보니 어머니는 그런 내 모습을 계속 지켜보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나는 평정심을 잃어버리고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이후 연병장에서 대오를 맞춰 줄을 서고 있는데 내 앞에 서있던 ‘영감’이 나를 향해 질책을 했다. 그는 어머니와 내가 헤어지던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인마! 뒤돌아보면 어떡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어!”

 아아, 장난처럼 나이 들어 결혼하고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고,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생각해보면 대책 없이 어렸던 순간이었다.

 퇴소식이 끝나고 열 대의 트럭은 신병 3개 중대 신병 병력을 싣고 창원역으로 향했다. 조교의 말을 들어보니 열차 안에서 각자가 배치될 부대를 통보해 준다는 것이었다. 9월 초순, 기나긴 여름이 드디어 끝나 가는지 그날따라 태풍주의보가 내려져 바람은 세차게 불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창원역 광장, 트럭에서 내리니 해당 부대 ‘파도 사단’의 군악대가 도열하여 환송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군악대 앞줄에는 내 친구 녀석이 클라리넷을 부르고 있었다. 아쉬움 때문인지 안타까운 때문인지 면회 온 많은 가족들이 곧바로 귀가하지 못하고 역까지 이동하여 우리가 집결된 그 광장에 모여들 있었다. 아마도 한 순간이라도 귀한 아들 얼굴을 더 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 때문이었겠지.

 혹시나 하여 시선을 그 곳으로 돌렸지만 속사포처럼 퍼붓는 비 때문에 인파 속의 어머니를 찾을 수 없었다. 조교들의 불같은 호령에 쫓겨 도열하여 열차를 타려는데 가족들이 모인 인파 속에서 탄식과 같은 안타까운 함성이 들려왔다. 제각기 아들들의 이름을 불러대는 부모님들의 애타는 목소리였다. 이렇게 전방으로 가면 살아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인파가 모인 지역을 지나 군악대 앞으로 해서 열차를 타려는데 클라리넷을 불고 있는 친구 녀석의 모습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이별의 노래(Anniversary Song)’라는 음악이 연주되고 있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고 안타까운 부모님들의 목소리는 커져만 가고 있었다. 그 때문에 눈물인지 빗물인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이제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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