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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옛날의 금잔디

아버지

by 언덕에서 2013. 12. 6.

 

 

 

 

아버지 

 

 

 


아버님은 술과 담배를 즐기셨다. 내가 나이 들어 생각해보니 그럴 만도 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건강이 극단적으로 악화하여 가고 있었으나 가족 중 누구 하나 눈여겨보지 않았고, 취미생활조차 없으셨으므로 삶의 기쁨 역시 부재했을 것이다. 술과 담배는 그나마 생활의 활력소가 되어 당신을 지탱시키는 기둥이었다.

 아버님은 감기 등으로 몸의 상태가 좋지 않으실 때마다‘죽겠다’며 고통을 호소하셨는데 어머님과 세 아들은 '건강염려증'이란 병에 걸린 아버님의 엄살이려니 하고 무심히 넘기기 일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웃통을 벗으면 보디빌더를 연상시키는 탄탄한 몸매와 거의 매일 소주를 한 병씩 드시는 음주량을 고려할 때 아버님의 건강에 문제가 있을 리는 만무하다고 변변찮은 상식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아버님은 어느 날 직장으로 향하던 출근길에서 쓰러져 의식을 잃으시고 말았다. 철도청 객화차 사무소 근처인 부산진구 당감동 남도교회 앞길이었는데 다행히 교회로 가던 젊은 아가씨가 경찰에 연락하는 도움 덕택에 급히 구급차에 의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담배 한 대 내봐라!”

 한 마디 말씀을 내뱉을 때마다 수술 부위의 통증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셨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버지는 네 담배 피우는 거 벌써 알고 있었다. 한 대 피워야겠다.”

 그해. 내가 스무 살이 되었던 해의 무더운 여름날, 부산 동구 초량에 위치한 성분도 병원의 병실 앞뜰이었다.

 나는 그해 대학에 입학하여 가족 몰래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는데 아버님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쓰러지신 아버님은 말기 간암 진단을 받았고 의사는 길어야 3개월 시한부 삶을 선고했다. 가족 모두 아버님께서 낙심하실까 봐 그 사실을 숨겼고 혹시 하는 마음으로 병원 측에 수술을 요청했다. 그렇게 수술을 받았으나 결과는 좋지 않아 이틀 동안 의식을 잃으셨다. 그러다 모처럼 깨어나셔서 병실 앞을 힘들게 거동하셨는데 부축하는 막내아들에게 근엄하게 하신 말씀이다.

 "너, 네게 솔직히 말해야 한다. 진짜 내 병명이 어떤 것이고 살 수는 있다더냐?"

 가족끼리 말 맞춘 데로 거짓으로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다.

 "별것 아닌 병이랍니다. 수술하고 한두 달 입원했다가 완치 후에 퇴원하면 되구요."

 "하아, 그런가?……."

 설마 그 순간이 아버님과의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몰랐다. 불효자식이었는지, 철이 없었는지 간암 수술을 받으신 아버님께 담배에 불을 붙여 건네 드렸는데 엄숙할 정도로 진지하고 소중하게 피우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53세의 아버님은 그로부터 1주일 후에 세상을 떠나셨다.

 생전에 무신론자였던 아버님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에 세례를 받으셨다. 나는 그날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데 우리 가족이 다니던 성당의 주임 신부인 오수영 신부님이 병원에 오셨다. 신부님은 극작가 오혜령 씨의 사촌 오빠로 기억하는데 이후 근무지를 옮겨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에 있는 ‘오순절 평화의 마을’에서 사목하다 지금은 은퇴하셨다. ‘오순절 평화의 마을’은 사회와 가정에서 소외된 정신질환자, 장애인, 노인 등이 한 가족을 이루어 살아가는 사회복지시설이다.

 그날, 신부님은 우리 가족에게 ‘본인이 거부하지 않느냐’고 재차 물으셨고, 아버님은 이불 속에서 몸을 일으키고 세례를 받으셨다. 나는 그때 병실 입구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신부님이 신으셨던 구두의 약칠이 벗겨져 희게 보였던 게 유달리 기억에 남는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힌 후 신부님은 그 주 주일미사 강론 때에도 장례미사 때 이미 말씀하신 ‘선량한 그분이 탁주 한잔 하자고 청했는데 바빠서 응하지 못한 게 내내 마음이 아프다’는 내용을 거듭하셔서 지금까지도 감사한 마음이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후 각종 사후 마무리는 내 몫이었다. 장례식 후 어머님은 몸져누웠고 형들은 객지에 있는 각자의 직장으로 돌아갔다. 마침 방학이어서 사망신고 등 각종 행정처리를 이제 성년이 된 내가 해야만 했다. 며칠 후 아버님의 직장에서 퇴직금을 받아가라는 연락이 왔다. 아버님의 근무처인 철도청 객화차사무소의 행정실은 방 구석구석 온통 기름때에 찌든 곳에 오래된 책상을 대여섯 놓아둔 그야말로 초라하고 허름한 장소였다. 사무실 입구에 앉아있는 양복 입은 남자에게 아무개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했더니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내게 다가와서 손을 잡고 위로해주었다.

 “안됐다. 막내아들이 명문대 입학했다고 그렇게 좋아하더니만.”

 아버님께서 남긴 삶의 마지막 흔적인 퇴직금을 받고 사무실을 나섰다. 아버님의 일터인 철로 변에는 7월의 검붉은 태양 아래 검은 얼굴의 초췌한 중년 사내들이 시퍼런 작업복에 시커먼 기름 범벅이 된 채 담배를 피우며 더운 땀을 식히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 속에서 돌아가신 아버님의 고단했던 삶의 모습이 겹치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풍수지탄(風樹之嘆)이란 말이 있다. 불효했던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려고 생각할 때에는 이미 돌아가셔서 그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중3 때 경찰서장 아들이던 친구와 둘이서 하교하는 길이었다. 등 뒤 30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누가 큰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 들렸다. 나를 부른 사람은 마침 퇴근하던 아버님이었는데 옷차림은 어찌나 남루하며 키는 왜 그렇게도 작아 보이시는지……. 게다가 한국전쟁 부상의 후유증으로 그날따라 다리를 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버님의 남루하고 초라한 모습에 창피함을 이기지 못한 나는 ‘저분 누구냐?’는 급우의 물음에 ‘이웃집 아저씨’라고 둘러대고 말았다.

 작년 모 대학교의 축제 때 가수 싸이의 공연을 볼 기회가 있었다. 싸이는 ‘아버지’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랫말은 어찌나 슬픈지 나는 노래가 끝난 후에도 북받치는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고 계속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노래에서 계속되는 후렴 부분은 이랬다.

 ‘아버지 이제야 깨달아요’ / 어찌 그렇게 사셨나요 / 더 이상 쓸쓸해 하지 마요 / 이제 나와 같이 가요‘

 아들로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고 어떤 위로의 말도 못 드렸으며 아무런 보호와 희망의 몸짓도 드리지 못한 상태에서 보내야만 했고 어언 3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아버님은 지금의 나보다 적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신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런 나이가 되고 보니 아직 나 자신이 철들지 않음을 알게 되고, 이제 철들려 하는 나는 다시금 아버님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아들아이의 나이가 아버님을 보낼 당시의 내 나이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철없던 그 날의 그 장면은 내 나이 오십이 넘은 지금에도 비수(匕首)처럼 나를 찌른다.

 

 

 

- 월간 소식지 『맑고 향기롭게』 2015. 12월호 게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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