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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우기(雨期)

by 언덕에서 2013. 12. 13.

 

 

우기(雨期)

 

 

 

 

 그 해 말, 학기말 시험을 끝내고 겨울방학이 시작될 무렵에, 군 입대를 위해 자의반 타의반 휴학계를 내었다. '어용 교수'로 지탄받던 병역기피자인 지도 교수는 내게 입대를 강요했다. 그런데 그해 시국이 그랬는지 휴학계를 내면 즉시 나온다던 영장(입영통지서)이 집에 도착하지 않았다. 병무청에 찾아가서 알아보니 이듬해 7월말에 입대 예정으로 되어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함께 휴학한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머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광주 항쟁 후 학생데모가 심하다 보니 강제로 입대시킬 대학생 인원수는 많고 군의 소화능력은 뻔하고 해서 생긴 병목 현상이었다. 무려 9개월 가량을 빈둥거리며 허송세월해야만 했다.  (12월 1일, 휴학계 내어 이듬해 7월 21일에야 입대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입대 보름 전인 스무 두 살 때의 여름 7월 초순이 되었다. 유달리 술을 좋아하던 후배를 고향에 내려와서도 만났는데 그는 나와 비슷한 시기에 방위병 입대 예정이었다. 같은 학교의 지하서클에서 남몰래 만나 '자본론', '러시아 혁명사', '페다고지(Pedagogy of the Oppressed)' 같은 그 시대의 불온서적을 공부하던 '엉터리 운동권'의 끈끈한 선후배 사이였는데 장동건 보다 더 잘생긴 외모에 큰 키와 조각 같은 체격을 지닌 달변의 소유자였다. 현역으로 입대하는 내게 미안했는지 보름에 한 번 꼴로 자주 술을 청했다.

 일 년 전에 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시고 편모슬하에 입대를 앞두고 있고 해서 다들 가엾다고 생각들 하셨는지 만나는 친척. 이웃 어른들마다 내게 적잖은 용돈을 주시는 바람에 30만 원가량의 거금을 쥐고 있을 때였다 (요즘 시세로 500만원 정도의 가치가 되지 않았을까?). 자산(?)은 풍부하고 달리 바쁜 일도 없고 해서 자주 가던 동네 시장통 단골 술집을 벗어나 시외버스를 타고 경남 울주군 서생면 진하해수욕장이란 곳으로 놀러가기로 했다. 탁 트인 바다, 끝없는 태평양 바다의 끝자리, 풍성한 경상도 특유의 인심……. 부산 사람들은 그곳을 흔히들 '서생 진하'라고 불렀는데 앞의 이야기에서도 소개한 바, 고2 때도 그곳에 간 적이 있다.

 

 

 

 그해는 우기(雨期)가 유독 길었는데 그날도 아침부터 하루 종일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돈은 많았고 입대할 날은 며칠 남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날만은 죽을 때까지 원 없이 술을 마시기로 후배와 나는 다짐을 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정오 12시부터 횟집에서 비싼 농어회를 안주 삼아 점심 대신 마시기 시작한 술은 새벽 4시까지 이어졌다. 저녁 7시쯤 되었을까? 둘이서 소주 8병을 마시다 자리에서 일어선 후배는 문득 다른 술집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형, 총각 딱지를 떼야 할낀데……."

 "핫하……. 웃기지 마라."

 "그라면 형, 아까 후회 없이 마시다 죽자고 했잖아?"

 "그건, 그렇지!"

 스무 두 살짜리와 스무 한 살짜리 애송이들이 알면 뭘 알겠는가? 게다가 우리는 '민중 해방', ‘민주 쟁취’, ‘독재 타도’등을 위해 목숨을 바치자던, 시대 양심의 상징이라고 나름 자부하던 터이었다. 시골 해수욕장이던 그곳에는 '그렇고 그런' 술집은 전무했다. 그래도 어떻게 찾다가 기어 들어간 곳이 다방인데 요즘 소위 말하는 '퇴폐 찻집'이었다. '커피, 위스키, 인삼즙, 맥주, 아가씨 항상 대기' 라는 안내문이 적혀 있었다. 문을 여니 30대에 가까운 늙은 아가씨 두어 명이 심드렁하게 앉아서 중년의 사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종일 마신 술로 기실 우리는 떡실신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용기를 내어 큰 병맥주 열 병을 시키는 대단한 호기를 부렸다. 술을 주문하자마자 그 아가씨 두 명이 '쪼르르' 우리 자리로 와서 앉았다(그야……. 술을 축내야 매상이 더 오르니까). 후배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선배 예우를 다하려는지 둘 중 키 큰 아가씨를 내 옆에 앉게 했다.

 만취 중이었지만 화제는 뻔했다. 마르크스……. 로자 룩셈부르크가 어쩌니……. 하다가 그마저도 밑천이 동나버렸다. 왜냐 하면 그 날 하루 종일 떠들었으니까. 내 옆의 아가씨는 마음껏 술을 축내다가 지루했는지 동료를 향해

 "이 총각, 오도바이 하고 목소리가 똑같아."

라고 말했다.

 그러자 앞에 앉았던 아가씨가

 "아, 그러네!"

하며 맞장구를 쳤다.

 오도바이가 뭐냐 하면 그 찻집에 자주 오는 동네 건달이 있었는데 한여름에도 가죽점퍼를 입은 채 오토바이(auto bicycle)를 타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취한 우리는 맥주 열 병만 마시기로 한 계획을 바꾸어 추가로 스무 네 병 한 상자를 더 마시기로 했다.

 지금 생각하니 기가 막힌다. 술로 인해 곤드레만드레가 된 우리는 몸의 수분을 빼기 위해 화장실에서 함께 소변을 봤는데, 그 자리에서 후배는 내게 이렇게 술만 마실게 아니라 아가씨 손이라도 한 번 만져봐야, 앞으로 할 몇 년 동안의 군대생활이 덜 허무하지 앓겠느냐는 그야말로 ‘말도 되지 않는 논리’로 떠들고 있었다. 그 다음의 그림은 이랬다. 후배는 자신 옆에 앉은 아가씨 손을 잡으며 나름대로 노련하게 분위기를 잡고 있었고, 나는 꼴에 선배라고 품위를 지키려고 그랬는지 옆에 앉은 아가씨의 등짝을 후배 몰래 어루만지고 있었다.

 어쨌든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져 보는 젊은 여성의 몸이었다. 후배와 나의 대화 속에 '며칠 후 입대'라는 화제가 계속 나오고 또 우리의 얼굴이 너무 어렸는지 산전수전(戰) 다 겪었을 걸로 보이는 30대 전후의 그 누님은 헤픈 웃음을 끝없이 날리며

 "히히! 이 총각 한 시간 동안 내 등판만 만지네."

하며 웃고 있었다.

 창 밖에는 바람에 섞인 비의 냄새가 느껴졌고, 거칠어진 파도 소리가 들렸다. 하늘에는 달과 별이 보이지 않고 어둠만이 원근 거리 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렇게 창 밖에는 물먹은 대기가 허공에 드리워져 있었고 부슬비는 쉬임 없이 내리고 있었다. 부슬비긴 하지만 연일 비가 내렸는데도 어쩐지 그날의 바다는 거울처럼 맑고 잔잔했으며, 그 위로 가는 빗줄기가 소리 없이 쏟아져 내려 바다는 파문(波紋)의 꽃으로 가득한 거대한 꽃밭이었다. 나는 술 마시던 것을 멈추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후배도 나처럼 망연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 갑자기 서러운 감정이 들면서 눈물이 쏟아졌다. 수억만 개의 빗방울이 바닷물의 파도에 부딪혀 포말(泡沫)을 피어냈다 없어지고 다시 피어내고 있었고 바람은 계속 불어 빗물과 함께 창을 때리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중년이 되어, 고교 동기들과 반창회 삼아 기장군에 있는 달음산에 오를 일이 있었다. 산을 내려와 버스를 타고 근처인 서생 진하해수욕장에 들러 생선회를 먹고 반주로 낮술을 마실 기회가 있었다. 진하 해수욕장은 많이 변해서 스무 두 살 때 보았던 시골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지고 부산의 광안리 해수욕장 수준의 국제적인 환락가 분위기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지나간 시절의 기억나는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하하, 그나저나 그날 스무 살 즈음의 애송이들에게 등짝과 손목을 빼앗겼던 그 찻집 누님 두 명은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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