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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딩동댕 그해 여름 ♬

by 언덕에서 2013. 11. 8.

 

 

 

딩동댕 그해 여름

 

 

 

 

내가 고1 때 MBC 방송에서 '대학 가요제1'라는 게 시작됐다. 당시 군사 정권 시절이라 들을 만한 노래가 드물었기 때문에 모두들 공연 실황을 보고 충격에 가까운 새로운 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대상을 차지했던 ‘나 어떡해’는 물론이고, ‘저녁 무렵’, ‘꿈나라’, ‘다시 핀 목련꽃’, ‘하늘’, ‘가시리’ 등 모든 노래가 매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의 곡은 ‘회심’이란 대구에 사는 여대생이 부른 노래였다. '랄랄라 콧노래 따라 흥겹게 불던 오늘도 사랑의 피리, 피리를 부네~' 라고 시작되는 이 노래는 요즘 말로 하면 ‘랩’과 비슷한 노래 속 독백이 곡 전체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데, 여대생의 가슴 아린 실연의 독백이 인상적이었다. 교실에서 누군가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학급의 분위기는 ‘슬픔의 연못’ 속에 빠지는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급기야 이 노래를 부른 그닥 예쁘지 않은 그 여대생이 헤어짐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자살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까지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친구 중에 피아노를 음대생 수준 이상으로 잘 연주하던 수경(여자가 아니라 남자다)이라는 녀석이 있었다. 녀석과 나는 우리도 몇 년 후면 대학생이 될 거니까 그때를 대비해서 대학가요제에 출전할 곡을 미리 만들어 준비해 두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고2 여름방학 때였다. 그래서 둘이는 배낭에 텐트와 버나를 넣고 울주군 서생면에 있는 진하해수욕장에 가기 위해 시외버스를 탔다. 글을 잘 쓰는 내가 노랫말을 만들고 그 가사에 음악 신동인 녀석이 곡을 붙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몇 년 후 대학생이 되면 대학 가요제에 나가서 대상을 받아 그 돈으로 대학 4년간의 장학금으로 사용하자는 실로 꿈같은 계획을 세워 둔 상태였다.

 애송이 고등학생 둘이서 도착한 시골의 해변 여름바다는 시원하고 상큼하며 정겹기 짝이 없었다. 일단 적당한 민박집을 얻은 후 천천히 시상(詩想)과 악상(樂想)을 가다듬자는 계획을 세웠으나 처음 오는 어촌 마을 어디에서 어떻게 민박집을 구하느냐가 문제였다. 때마침 해변에서 연세대 로고가 그려진 셔츠를 입고 배낭을 멘 채 길을 찾고 있는 잘 생긴 대학생을 만났다. 그를 따라 가려다가 머뭇거리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둘이서 민박집을 계속 찾고 있는데 그 동네의 불량 학생들이 냄새나는 화장실 앞에 있는 공터를 가리키며 사용료를 싸게 받을 테니 이곳에 텐트를 치도록 하라며 강요했다. 순간 적잖이 당황했지만 애써 무시하고 민박집을 계속 찾았다. 공포로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불량소년들이 우리에게 해코지 하면 대응할 수 있는 대책을 미리 세워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아까 그 대학생을 우연히 또 만나게 되었다. 그는 반갑게 우리들을 대하면서 자신도 민박집을 찾고 있는 중인데 함께 구하자고 했다. 그래서 그 형님을 따라 안전하게 민박집을 구할 수 있었다. 연세대 국문학과 2학년 최병규. 지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데 2학기가 끝나면 군입대할 거라고 이야기했던 것 같다.

 그 형님은 우리에게 담배를 권했는데 우리가 소스라지게 놀라며 못 피운다고 하니 맑은 표정의 흐뭇한 미소를 지었던 게 기억에 남는다. 그 형님은 한참 동생 뻘인 우리 둘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썼는데 그 기억 때문인지 지금도 연세대 출신들에게 나는 호감을 갖고 있다. 어쨌든 그 형님 때문에 입 구(口)자의 구조로 된, 마당이 넓은 민박집을 수월하게 얻고 짐을 풀면서 집주인 가족들과 인사할 기회가 생겼다. 주인 할머니 외에 사촌 사이로 보이는 자매가 둘 있었는데 한 명은 서울에서 시골 할머니 집에 방학을 보내러 내려 온 경복여상 3학년 여학생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그곳에서 할머니와 함께 사는 듯한 스무 한 두 살가량의 처녀였다. 그네들은 틈만 나면 우리와 잡담을 나누었는데 수줍음이 많던 친구 녀석과는 달리 나는 용감하게도 이런저런 말을 걸어 친숙해지기를 시도했던 것 같다.

 바닷가로 녀석과 산책을 갔다가 늦은 저녁이 되어 다시 민박집으로 돌아왔는데 넓은 마당 귀퉁이의 수돗가에서 젊은 여성이 손바닥만 한 비키니 차림으로 샤워를 하고 있었다. 남자 친구로 보이는 이는 술에 취한 상태로 우리가 묵은 옆방에 짐을 풀고 있었다. 알고 보니 우리가 얻은 방은 민박을 놓기 위해 시골집의 큰방을 베니어 합판으로 대충 두 개로 나눈 허술하기 짝이 없는 방이었다.

 당시의 민박집은 별도의 세면 시설이 없었던 관계로 마당의 수돗가에서 그녀는 샤워 겸해서 씻고 있었던 것인데 아슬아슬한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채로 큰 물통에 담겨진 물을 바가지로 온몸에 퍼붓는 정도였다. 해수욕장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으로 나신(裸身)에 가까운 여성의 그 모습을 금방 잊어버리고 둘은 저녁밥을 지어 먹고 자리에 누웠다. 내 머리 속에는 좋은 시상(詩想)을 기원했고 녀석은 김창훈(산울림 멤버)을 압도하는 악상(樂想)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림 출처 : 글림작가의 세상바라기 ( http://blog.daum.net/e-klim )

 

 해변의 밤,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와 함께 시원한 바람은 불어왔고 바다 냄새와 해조음은 감미롭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옆방에서 악다구니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까 세면장에서 봤던 그 처녀와 남자가 싸우는 모양인데 “철썩!”하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이 씨발놈아, 와 때리노? 아직 아버지한테도 뺨 안 맞아봤다!”라는 소프라노 소리가 들리고 또 “철썩!”하는 뺨 때리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둘이서 싸우면서 주고 받는 대화 내용을 들어 짐작해보니 남자는 미혼의 택시 운전사이고 여자는 그의 애인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남자는 술버릇이 안 좋아 술만 마시면 여자에게 손찌검을 하는 그런 부류의 인간인 것 같았다. 급기야 민박하던 사람들과 주인 가족 모두가 그들의 싸움을 생중계 방송처럼 청취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장시간 버스를 탔었고, 해변을 싸돌아다니는 바람에 피곤했는데 그들의 싸움으로 인해 우리 둘의 잠이 완전히 달아나버렸다.

 30분가량 지났을까? 싸우다 지쳤는지, 싸움 소리를 듣다가 지쳤는지, 모두들 잠이 들었고 사방이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잠을 이루려고 하니 또 문제가 생겼다. 세상이 어둠만큼 고요한 가운데 그들 둘이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벽을 타고 우리 방에만 들어와 친구와 나의 귓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희야, 사랑한데이. 나는 니 없으면 몬 산데이!”

 그러면서 “쪽! 쪽! ……쯔읍!”하는 소리와 함께 남녀의 거친 신음과 숨소리가 계속해서 벽을 타고 들려왔다(아이고, 이렇게 표현하려니 민망하기 짝이 없다). 친구 녀석과 나는 요즘 용어로 '라이브 포르노 생중계'를 들으면서 진하에서의 첫날밤을 보낸 것이다.

 다음날 아침밥을 지어먹고 녀석과 나는 민박집의 마루에 앉았다. 옆자리에는 예의 그 자매 둘도 앉게 되었다. 민박집 방 밖의 장소에서는 앉을 곳이라고는 그곳 밖에 없었으니까. 어젯밤에 지지고 볶던 옆방의 남녀가 짐을 싼 후 다정하게 팔짱을 낀 채 대문 밖으로 나가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자매 중 언니인 처녀가 입을 열었다.

 “미쳤다. 요새도 여자를 쌔리는(때리는) 넘이 있나!”

 곧이어 동생이 말했다.

 “어젯밤 그렇게도 많이 두드려 맞더니만 저 여자도 미친 거 아냐?”

 나는 친구랑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많이 끓인 바람에 여분으로 한 잔이 남았다. 서울에서 왔다는 고3 여학생에게 권했는데 의외로 미소를 지으며 받아주어서 기분이 마냥 좋았다. 핫하, 눈빛으로 느낌을 알 수 있지 않는가? 지금도 그렇다,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몸에 밴 여성이 아무리 서울말 연습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금방 그 출신지를 알아차릴 수 있다. 부자연스러움까지 고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워서 감미롭게까지 느껴지는 오리지널 서울말을 사용하는 또래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니 마치 구름 위에 뜬 기분이었다. 언니는 그 모습을 보고 씩 웃고 있었다. 아마 순진해 보이는 어린아이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겠지.

 글을 쓰면서 내 자신, 기억력에 대해서는 천부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나보다 더 기억력이 좋은 이가 있다. 동행했던 친구 녀석이다. 십 년 전에 연락이 끊겼다가 최근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내가 그해 여름 진하해수욕장에서의 일을 기억하는 것은 여기까지인데 녀석은 내 기억의 세 배 쯤을 더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연상의 그 여학생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며칠 후 짐을 싸고 돌아올 때 어떤 표정이었는지를 말이다.

 자, 이젠 이야기를 마쳐야겠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바다와는 전혀 관계없는, 교회 찬송가의 가사 구절 같은 ‘빛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노랫말을 내가 만들게 되었고 친구는 곡을 아예 만들지 않았다. 그 전에 곡을 만들었거나 이후에도 곡을 만든 적은 없으니까.

 

 

<제2회 대학가요제 대상을 받은 부산대학교 보컬팀 <썰물>>

 


 참고로, 우리가 여름을 그렇게 보내고 난 뒤, 몇 달 후, 늦은 가을에 열린 제2회 대학 가요제에서는 부산대학교의 ‘썰물’이라는 중창 팀이 부른 ‘밀려오는 파도소리에’라는 노래가 그랑프리 대상을 차지했다. 친구와 나는 이런 노래를 만들기 위해 그곳에 간 건데 라이브 포르노 중계와 오리지널 서울말씨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바람에 여행의 본래 목적을 잊어버린 것이다. 본말전도(本末顚倒)가 이런 경우일 것이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전국 방방곳곳에 가라오케나 노래방이라는 '노래발표 무대'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대학가요제에 출전하지 못한 녀석과 나는 약속이나 한 듯이 조영남이 부른 일사후퇴 때 피난 내려왔던 내용의 ‘고향 충청도’를 화음과 고함을 섞어가며 절규하는 톤으로 불러댔을 뿐이었다.

 


  1. MBC 대학가요제는 문화방송이 주최하는 대학생 대상의 가요제이다. 명랑한 대학풍토 조성과 건전가요 발굴을 목적으로 시작하였으며, 참가한 대학생들은 창작곡으로 노래 실력을 겨루고, 본선은 문화방송을 통해 생방송 혹은 딜레이 녹화방송으로 진행된다. 1977년 9월 3일의 제1회 대학가요제 이후로 매년 개최되었고, 2012년을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1]대학가요제는 1970~80년대에 큰 인기를 누렸으며, 대학가요제의 참가 또는 입상을 계기로 많은 가수들이 데뷔하였다. 배철수, 임백천, 심수봉, 노사연, 유열, 신해철, 015B, 전람회(김동률), 이한철, 김광민 등이 그들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