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초등학교 때는 그림 잘 그리기로 부산시내에서 유명한 아이가 나였다. 소년동아일보, 소년조선일보 주최 전국사생대회에서 몇 차례 최우수 상을 받았으나 중학교 진학 때 그 적성을 살리지 못했다. 미술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화구(畵具)와 그림 선생이 필요했는데 당시의 집안 형편으로는 어림없었기 때문이다. 가족에게 미술공부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자 돌아온 것은 웃음뿐이었다.
“미술, 웃기고 있네.”
“놀고 있네."
“미술을 배워서 뭐할 거야? 극장에서 간판 그리려고?”
“그냥 학교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회사 취직할 생각을 해야지?”
“예술가는 항상 춥고 배고프단다.”
등의 시큰둥한 반응만이 내게 돌아왔다.
고2가 되자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무엇이 되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국립대 공대에 다니던 큰형은 발군의 실력으로 현대, 대우, 삼성 등의 기업에 입사할 것임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고, 공고를 졸업한 둘째 형은 울산에 있는 대형 조선소에 제도사로 취업해 야간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주변의 친구들을 살펴보니 모두들 의사, 법관, 공인회계사, 군인, 교사, 기업인 등 나름대로의 뚜렷한 목표를 설정하고 있는듯했다. 학교의 선생님들은 학생들 대학 진학 숫자에만 관심이 있었지 적성과 관련된 학과선정에는 도무지 무관심해 보였다. 간혹 의견을 주는 분도 계셨는데 ‘집이 부유한 경우’에는 문학. 사학 등 인문대가 괜찮겠고 ‘형편이 어려운 집’인 경우에는 상과대나 법대가 좋겠다는 의견 정도였다.
학급의 친구들은 공부에 미친 듯 매달렸다. 밀양에서 유학 온 재규는 전국 고교생 평가시험에서 늘 1등을 했는데 선생님들은 별 이변이 없는 한 서울대 문과 수석이 예상된다고 했다. 치과의사가 목표라는 준호는 늘 코피를 줄줄 흘리며 공부하고 있었다. 뒷자리에서 졸다가 소설책을 읽다가 틈 나면 시 나부랭이를 쓰고 있던 내겐 모두가 남의 세상 이야기였다.
매주 토요일 마다 거르지 않고 나갔던 성당에서 고등부 아이들은 공부에 대한 이야기는 금물이었고 다들 마음에 드는 여학생에게 잘 보이려고 교구에서 제작한 성경교재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사춘기의 중심에 있었던 우리들 중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소문은 기정사실이 되었고 학교 공부는 다들 무관심해보였다. 고등부를 담당하던 젊은 수녀님은 일주일에 하루 토요일에만 성당에 오기를 주문했지만 다들 그 지시를 보란 듯 무시하고 있었다. 그 시절, 중고생의 이성교제를 감시하는 ‘교외지도반’이 교육청에 있을 정도로 엄격했던 사회분위기에서 나름대로 해방구로 교회나 성당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꽉 짜여진 학교생활 속에서 유일한 안식처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와중에서도 학년 간의 위계가 엄격해서 3학년 아이들은 입시준비를 하지도 않는지 틈만 나면 성당에 나와서 후배를 지도(?)했다. 특히 남자 아이들은 야구방망이로 남자후배들을 지도했다.
“고등부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성당활동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배들로부터 우연히 방망이 세례를 받았던 나는 친구를 통해 ‘그만 다니겠다’는 쪽지를 남기고 10년 가까이 다녔던 정든 성당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폭력을 일삼는 집단은 이유를 막론하고 깡패 양아치에 지니지 않는다는 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나의 개똥철학이다.
♣
그러나 고교 1학년 동안 학업을 도외시한 관계로 성적은 엉망이었다. 원래 상위권이었던 내 성적은 어느새 중하위권을 벗으나 하위권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내게 실망하셨는지 눈도 마주치지 않으셨다. 선생님은 공부에 흥미가 없으면 수업시간에도 허락할테니 명작소설을 꾸준히 읽으라고 권했다. 그러면 공부에 대한 감이 생길 것이라는 의견으로, 믿기 어려웠지만 이후 6개월 동안 소설만 줄기차게 읽었다. 우수했던 영어와 국어 외의 나머지 과목의 성적이 놀랍게도 조금씩 원점으로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말이 쉬워서 그렇지 매일 4시간 정도의 수면을 취할 정도의 강행군으로, 다시 원래의 자리를 찾는데 얼마나 많은 방황과 노력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고3 후반기인 1979년 10월이 되었다. 권력은 오래 잡으면 부패하는 법, 근면했으나 웃지 않는 대통령은 여자들과 술을 마시다 총에 맞아 죽었다. 반면교사, 사부님으로 배운 솜씨 그대로, 그래서 그것이 죄가 되는지 모르는 막내둥이 대머리 아저씨가 구국의 일념으로 총을 들고 일어났다. 고교 3학년 12월의 중순 즈음이었다. 혜은이의 '제3 한강교'를 부르며 '이 밤이 지나면 첫차를 타고 이름 모를 거리를 헤메일거예요~♬' 부분 다음에 "하!"라는 후렴을 목청 높이 지르던 장난끼 많은 애들은 자습시간 교탁에 나와 “각하 정신차리십시오. 이 버러지 같은 놈!”고함을 치고 있었다. 우리들은 얼마 후 기약없이 헤어지리라는 것을 모르는 철부지들이었다.
수출하기 위해서 머리칼도 팔고 오줌과 회충도 팔던 시절. 한국적 민주주의. 영샘이 아저씨가 야당총재 자리에서 축출되고 의원직에서도 제명되던 날은 대학 예비고사를 얼마 앞둔 날이었는데 하교 버스를 타는 부산시내 중심가에는 공수부대 군인들이 계엄군이라는 이름으로 완전무장 상태로 도열해있었다. 그해 겨울바람은 차가웠고 그 와중에서 나의 10대는 쓸쓸하게 저물고 있었다. 아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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